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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명카 애기

그게 나임.

by sliiky Mar 21. 2025
선생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를 생각이 1도 없는 어린이의 '궁굼증'



한 쪽에는 놀이기구같은 커다란 자동차 정비 기계가 있고, 작은 사무실이 딸려 있다. 침침한 조명 아래 시커먼 기름때가 묻은 각종 공구들이 정리되어 있고, 난로 위에 귤이 버석하게 말라 구워지느라 시큼한 단내가 나고, 유리로 된 원형 탁자 아래로 00상사 같은 거래처들과 00각 같은 이름의 중화요리집 스티커가 붙어 있다. 나는 낡아서 표면이 다 벗겨진 레자(인조가죽)쇼파에 앉아서 엄마가 시켜준 짜장면을 먹는다. 내 접시 위에는 엄마가 짜장면을 이잡듯 뒤져서 찾아 낸 작은 고깃덩어리들이 올려져 있다. 밥을 다 먹고 나면 화장실이 가고 싶어진다. 사무실을 돌아서 뒤 쪽으로 가면 코를 찌르는 냄새가 나는 재래식 화장실이 나오는데, 무서워서 아빠를 붙잡고 화장실 문 앞에서 보초를 서게 한다. 그리고 의기양양해진 표정으로 화장실에서 얼마나 성공적인 활동을 했는지 보고한다. 주말이면 파란 봉고차가 봉제인형을 가득 싣고 카센타 앞에 자리를 잡는다. 매 주마다 인형을 사달라고 떼를 쓰던 나에게 결국 엄마가 내 손에 핑크색 토끼인형을 쥐어주었다. 핑크토끼는 매일 내 잠자리를 지켜준다. 어느 여름날엔 카센터 앞에 커다란, 적갈색 다라이(고무대야)가 놓인다. 저 멀리서부터 호스를 통해 시원한 물이 채워진다. 나도 오빠도 미니 수영장에 들어간다. 찰박찰박 그저 물 속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무척 재미있다. 손톱 밑에 까만 기름때가 끼어있고 굳은살로 단단해진 아빠의 손을 잡고 생각한다. 우리 가족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대명카애기가 웃는다.




20대 초반의 젊은 부부가 낳은 둘째, 대명카 애기가 나다. 



아빠는 가난했고, 엄마도 가난했고, 가난한 두 사람 사이, 나는 서울의 한 카센터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아빠는 카센터사장이었다. (당시엔 자동차정비사 라는 말은 잘 쓰지 않았던 것 같다.) 낡은 카센터는 어린 내가 보기에도 허름했다. 



아빠는 스무살이 되기도 전에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멋 모르고 운전대를 잡고 멋 모르고 담배를 피우고 그냥 알음알음 부딪히면서 정비를 배웠다. 대출을 받아 빌린 땅에서, 아빠는 카센터를 열었고, 그 곳에 딸린 작은 방에 네 식구가 함께 생활했다.

비가 오는 날이었던가, 집에 물난리가 나서 물건들이 둥둥 떠다닌 적도 있었는데, 엄마 눈에 비친 절망감을 감당할 수 없어서 차라리 해맑은 척을 했던 기억이 난다. 물난리가 아니라 물놀이를 하는 것처럼, 그렇게 애써 웃었다. 그래야 눈물도 보송하게 마른다는 듯이.



고작 20대 초반의 청년이었을 아빠는 보호자가 되는 게 어떤 것인지도 모른 채 아빠가 되었다. 아빠는 내가 몇 살인지, 언제 어떠한 것들이 필요한지도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냥 "막냇딸이고, 돈이 필요하니까, 돈을 번다. 휴가 따윈 상상도 말고, 쉬지 않고 벌어야 한다." 이것 외에 다른 목표는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어릴 때 이름대신 카센터 이름에 '애기'를 붙인, '대명카 애기'로 불렸다.  양육자라기보단 바쁜 사람, 바쁘지만 나를 '대명카애기'라는 이름으로 예뻐하는 사람이 아빠였다. 



카센터를 찾아오는 사람들 중 다수가 짜증이 나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휘몰아치는 세상에서 바빠죽는 와중에 차까지 고장나서 속이 뒤집어진 채로 오는 사람들. 그래서일까. 작업복을 입고 땀에 절은 아빠를 존중해주는 사람은 찾기 어려웠다. 사람대접받을 만한 직업이 아니었던 느낌이다. 다만 해맑은 '대명카애기'한테까지 얼굴을 찌푸리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적어도 어린아이에게만큼은 조금은 관대했던 시절이었다. 고객이면 누구에게든 고개를 숙여야 했던 아빠에게 대명카애기가 숨 쉴 틈을 주는 존재였기를 바란다.




사실, 시커먼 기름때와 검뿌연 자동차 배기가스처럼, 아빠와 나 사이에는 묵은 몰이해가 있다. 아빠는 수도없이 내 마음에 상처를 냈고, 나는 가자미눈으로 아빠를 원망했던 날들이 좋았던 날보다도 더 많다.




하지만 고단한 아빠의 삶 속, 나의 어린 날의 어떤 기억은 한 편의 가족드라마처럼 머릿속에 펼쳐진다. 적어도 대명카애기는 그 드라마를 '행복'으로 기억하고 있다. 지금은 대명카도 없고 더 이상 애기도 아니지만, 이런 기억들이 아이에게 켜켜이 쌓여, 어른인 내가 되고, 그렇게 점차 단단해 지는 거겠지.




종종 지금의 나보다 더 어렸을 한 부부와 대명카애기를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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