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 그림, 꽃 그림이 뭐가 어때서
사회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작업을 연이어 한 뒤에, 내게 찾아온 것은 두려움이었다.
입으로는 희망과 연대를 말하는 한편, 솔직히 나는 약간 겁에 질려 있었다.
내 얼굴이 실린 기사에 악플이 달렸고, 인스타그램 DM으로 비방하는 메시지가 왔다.
내가 그렇게 유명한 작가도 아니고, 인플루언서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데 이럴 수가 있나 싶었다.
논리가 없는 비난과 협박임에도 무시하기가 쉽지 않았다. 나는 당장의 안온함도 중요했으므로.
피로감을 견디며 다음 작업을 고민하고 있던 와중에 문득, 대학시절 '꽃 그림'에 대한 교수님의 농담 반, 진담 반의 조언이 떠올랐다. "너희들은 인사동의 '꽃 그림이나 그리는' 아줌마 작가가 되지 말아라." 라는.
어째서 이 말은 사라지지 않고 내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다가 이제야 갑자기 튀어나왔을까?
나는 회화전공을 졸업했다.
(영어회화의 그 회화 아님주의. 평면, 설치, 영상 등의 현대미술을 포함하는 조형 미술을 뜻하는 회화.)
취업보다는 전업작가양성이 목표인 학과다. 좀 거칠게 표현하면 아마도 교수님은 심미성이나 상업성에 치중한 작업들은 가볍고, 예술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반면 미술관이나 비엔날레에 초청되는 작업은 미술계에서 어떤 지위를 획득한, 고차원적인, 이른바 진짜 예술가가 가야 할 길처럼 묘사했던 기억이 난다.
인사동의 '아줌마 작가들'은 당연히 전자일테고.
진짜 예술, 가짜 예술이 무엇이고 이러한 분류가 옳은지 혹은 어떤 기준으로 이것을 분류하느냐는 차치하고서라도, 미술계에 진입할 때 작가들이 (말은 안 해도) 각자 목표로 하는 노선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내 목구멍에 가시처럼 소화되지 않은 것은 '하위예술'또는 '예술도 아닌 것'에 '아줌마'라는 딱지를 붙여놓은 거였다. 인사동의 꽃 그림들을 정말 전부 '아줌마'들이 그렸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아줌마들이 하는 일에는 전문성이 없다는 편견, 집에 걸어 놓기 좋은 아름다운 그림은 진정한 예술과는 거리가 있다는 믿음, 중년여성을 작가로 불러주지 않는 오만함이, 나를 삐딱선 타게 만들었다.
아줌마가 그리는 꽃 그림이, 뭐가 어때서.
마침 나는 그냥 좀 '예쁜' 그림을 그리고 싶었고 게다가 사회적으로 '아줌마' 나이가 되기도 했으니 꽃 그림 그리기에 제격(?)이었다. 그렇게 꽃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내 관심사는 뻔하고, 폄하된, 전형적인 꽃에 관한 것들이었다. 미술사에서 유구한 주제로 다뤄지는 꽃은 전형적인 '여성적' 영역으로 간주되어 왔다. 여성들이 있는 곳을 두고 "여긴 꽃밭이네."라는 둥, 여성은 향기롭지만 약하고 아름답지만 수동적인 존재로 대상화되기 일쑤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누군가 나를 꽃으로 대하는 것도, 반대로 꽃으로 대하지 않는 것도, 모두 불쾌함 내지는 찝찝함을 남겼다. 나는 스스로 꽃이길 바랄 때가 있었고, 꽃으로 불리기도 했었고, 이제는 꽃이 아닌 존재로 규정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부러 웃기도 했지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에 계속 어딘가를 곁눈질했고 내 마음은 허공에 가 있었다.
나는 어쩌고 싶은거지? 여성스러움이란 뭐지? '꽃 그림이나 그리는'일은 어떤 의미가 있지?
질문하기 위해 작업을 한다. 느낌표 대신 물음표로 감각하기 위해.
나는 우선 꽃시장으로 달려가, 대뜸 "여성스러운 꽃 주세요." 라고 말하며 갖가지 꽃을 사들고 왔다. 꽃 상인들은 뭔가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자신들이 생각하는 '여성스러운'꽃을 내게 쥐어주었다.
나는 이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앉아 세 번에 걸쳐 사진을 찍었다. 꽃은 피어나고, 시들고, 말라갔다. 들고 있기만 해도 손목이 저려오도록 무겁던 꽃 더미는 시간이 흐를수록 수분이 다 빠지고 향기를 잃어갔다. 이 과정이 내 꽃 그림에 고스란히 담겼다.
나의 꽃 그림은 일반적인 꽃이 주는 화사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여.성/화>는 사회 속에서 주변부에 머무르게 되는, 마치 제물처럼 취급되는, '여성스러운' 꽃의 처지를 상징한다. 동시에 시들어가는 과정을 그대로 묘사해, '꽃같은 여성'에 대한 시선에 담긴 욕망과 기대를 좌절시킨다.
꽃을 입체적으로 감각하려는 노력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대상화와 내면화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며 자기자신으로 불리고 싶은 꽃과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불려지는 꽃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여성스러움'이 수시로 납작해지는 일들을 관찰하고, 아예 고착화된, 진부한, 진부해서 더 문제인 단어들로 경계를 허문다.
결국, 나는 '꽃그림이나 그리는' 정성스러운 작업을 통해서 여성스러움을 긍정하면서도 부정하고,
동시에 꽃다발이 어떤 맥락에 의해 얼마나 의미가 달라지는 지,
자신이 자신을 충분히 설명한다는 것이 얼마나 다층적이어야 하는 지를 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