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희소식! 당신도 아름다워질 수 있고 아름다움에 만족!
"예쁘냐? 그래서, 예뻐?"
이것은 남성들이 어떤 여성을 떠올리든 하는 말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종종 개그의 소재가 된다.
여성이 생각, 신념, 능력을 가진 것보다, 우선 예쁜 것으로만 그 가치가 증명되는 것처럼 이야기된다. 이 순간, 여성은 사람이 아니라 트로피다.
내가 여성주의에 대해 말하고 얼굴을 드러냈을 때 간혹 들어오는 공격 중 하나는 작품에 대한 건설적인 비판이 아니라 뜬금없는 나의 외모에 대한 비아냥이었다. "이런 거 할 시간에 거울이나 봐라"같은.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당연히 비공개 계정이다.) 외모를 건드려야 내가 가장 타격받을 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이런 단면만 봐도, 세상의 많은 여성들이 외모를 검열하고 자책하며, 동료 여성들을 타박하느라 시간을 쏟게 되는 거겠지. 아름다운 외모가 권력인 동시에 족쇄가 되는 것을 경험하면서.
(위) 유독 여성에게 강조되는 가부장적 덕목들 중 몇가지(정숙, 정조, 조신)를 남성속옷 위에 자수로 새겼다.
가부장제와 외모지상주의에 대해 화를 쏟아내는 것만으로도 끝없이 글을 쓸 수 있겠지만,
일단 오늘은 '스스로 만들어내는 대상화'에 대하여 솔직하게 고백하고 싶다.
며칠 전에 동네의 한 국숫집에 들어갔다. 사장님께서 안내해 주시는 2인석 테이블에 앉아 칼국수 한 그릇을 주문했다. 꽤나 맛집이어서 손님들이 들이닥쳤고 가게는 곧 만석이 되었다. 나는 입구 쪽에 앉아 있었는데 밖에는 어느덧 대기하는 손님들로 북적였다. 나는 혼밥엔 일가견이 있었기에 내 관심은 온통 칼국수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순간 젊은 남성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저기 자리 비었다. 합석 하자고 해." 내 건너편의 빈 자리를 두고 한 이야기였다. 어떤 남성이 내 반대편으로 와서 내 얼굴을 확인하더니, 밖에 있는 남성 무리에게 "뒤질래?"라고 했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낄낄거리며 웃었다.
우습게도, 그 순간 내가 한 생각은 '내가 그렇게 못생겼나' 였다.
평소 내 얼굴을 그렇게까지 스스로 못났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도 그랬다. 예쁜 얼굴로 무례한 남성의 밥맛을 좋게 해 줄 의무가 없는데도. 무례한 남성들보다, 순간적으로 스스로 내 외모를 검열한 나 자신이 더 미워지는 순간이었다.
외모강박에 대한 내 기억은 어릴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치원을 다닐 무렵, 내 꿈은 무려 '미스코리아'였다. 어깨 뽕이 잔뜩 들어간 원피스와 반짝반짝 윤이 나는 빨간 구두 같은 것을 좋아했다. 아침에 엄마가 머리를 묶어주거나 미용실에서 파마를 할 때면, "예뻐지는 거야"라는 주문에 몇 시간 동안이나 마법같은 인내심을 발휘하기도 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무렵에는 학급회의를 했다. 선생님 없이 우리끼리 회의를 하는 시간이었다. 몇 번 이런 주제를 놓고 투표했다. 우리 반에서 제일 예쁜 사람. 우리 반에서 제일 옷을 잘 입는 사람. 왜 그런 놀이를 했을까? 예쁜 여자를 뽑는 놀이는 낯설지 않았다. 간혹 내 이름이 언급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멋 부리는 데에 관심이 많던 나는 그 때 상위권에 이름을 올라가기도 했다. 신경 쓰지 않는 척, 속으로는 제일 예쁘고 싶었다. 우습지만, 그 땐 우스운 일이 아니었다. 발렌타인데이에 초콜릿을 많이 받는 아이가 되었으면 했다.
하두리 캠으로 얼짱각도 사진을 찍었다. 희뿌연 화면 안에서 내가 얼짱까진 아니어도 좀 예쁘장하다 생각했던 적도 있다.
하지만 전성기(?)도 잠시, 얼굴에 여드름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얼굴에 여드름으로 도배했냐"라는 말로 놀림받는 게 일상이 되었다. 게다가 시력이 안좋아져 안경알이 점점 두꺼워졌다. 이 때부터는 '공부를 해야 하니까 외모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아이'로 나를 정체화했던 것 같다. 그러지 않으면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갖은 노력을 다 해도 계속 이렇게 못생기면 그건 너무 견디기 힘든 일이니까.
그래도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기 위해서는 외모가꾸기에 손을 아예 놓을 수는 없었다. 중고등학생 시절 내내 클리어훼어니스로션을 얼굴에 바르고, 디어달링틴트를 바르고, 학교 티비장 뒤에서 고데기를 했다. 급식을 배불리 먹기엔 불편한 적당히 줄인 교복을 입고, 여드름을 가려 줄 일자 앞머리를 유지했다. 교실 안에 있는 거울에는 언제나 화장품이나 잘린 머리카락 같은 것들이 지저분하게 묻어있었다.
나는 '여자답지 않게' 몸에 털도 많았다. 어떤 아이가 스타킹 밖으로 돌출된 내 털들을 보고 면박을 주는 바람에, 하복과 팔 사이에 난 겨드랑이 털이 샤프심처럼 보이는 게 혐오스럽지 않냐는 친구의 말을 들어버려서, 이후로 매일 면도를 해야 했다. 그리고 어른이 된 후에는 피부과에 가서 레이저시술을 받았다. 간호조무사들이 내 다리를 보고 "또 왔다" 며 수군거리며 웃었지만 불쾌감을 표현할 줄도 몰랐다.
스무 살이 된 이후에는 과체중과 저체중을 모두 경험했다. 비만일 때는 운동을 하기보단 살빼는 주사를 택했다. 반대로 살이 빠지고 나니 피부는 더욱 예민해졌고 이젠 내가 내 몸을 조각조각 떼어 분석하기 시작했다.
하와이에서 비키니를 입은, 배가 많이 나온 할머니를 본 적이 있다. 누구의 시선도 신경쓰지 않는 그 모습이 멋지면서도 생경했다. 나는 비키니를 입는다는 생각만으로도 머리와 마음이 따로논다. 머리로는 수영할 때 입는 옷이며 누구나 입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몸이 수영복을 입기엔 '아직' 부적합하다 느낀다. 이상적인 몸매여야 자격이 부여되는 게 아닌데, 부적절한 생각을 완벽히 떨쳐내기 어렵다.
인기투표에서 내 이름 옆에 바를 정자가 몇 개가 되는지가, 오늘 날 SNS셀피의 좋아요 갯수로 이어졌을까.
허벅지가 딱 달라붙지 않고 간격이 있어야 하고, 허리가 A4용지에 들어가는지 경쟁하면서.
물론, 30대가 된 나는 그렇게까지 외모를 가꾸고 신경쓰는 스타일은 아니다. 올 해는 미용실을 가지 않기로 마음먹고 실천중이고 화장도 거의 하지 않는다. 미디어가 제시하는 미의 기준에 동조하기는 커녕 늘 비판적인 태도를 유지하려 노력하는 여성주의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거울 앞에 선 내 모습이 흡족하진 않다. 내면의 아름다움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지만, 며칠 전엔 모공을 조여준다는 세럼을 샀고 오늘은 팔자주름을 펴준다는 패치를 검색했다. 이 마음은 말그대로 모순적이다.
하지만 이런 내 마음을 인정한지는 꽤 오래되었다. 우리는 누구도 아름다움을 쫓는 본성으로부터, 기이한 아름다움의 기준을 제시하는 미디어로부터, 가부장제를 내면화한 부모세대의 가르침으로부터 완벽히 자유로울 수 없으니까. 게다가 덮어두고 "우린 모두 아름답습니다"하는 슬로건은 어쩐지 와닿지도 않는다. 외모에 대한 집착을 아예 떨쳐버리겠다는 생각은 애저녁에 접었다.
대신, 그 외의 것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더 많이 말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
노력, 배려, 창조, 연대감, 성취, 웃음, 치유, 탐구, 함께하는 시간 같은 것들 말이다.
실시간으로 나를 비추는 거울이 나를 따라다니는 세상에서,
나는 여전히 종종 거울 앞에 서서 나를 뜯어보곤 하겠지만,
거울을 나로부터 멀리 두고 멀찍이서 나를 보는 건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 가까이에 있는 다른 아름다운 것들을 더 많이 생각할 수 있겠지.
내 몸이, 눈요기가 아니라, 기능적으로 멋진 일들을 해낼 수 있으리라 믿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