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온이라 쓰고 사랑이라 읽는다
‘꽃그림’을 그리고 싶은데. 그려야 하는데.
몇 년 전 나는 꽃 그림 생각으로 머릿 속이 그야말로 꽃밭이었다. 그러던 와중 다이소에서 충동적으로 조화(造花)를 샀다. 라벨에는 ‘언제나 생생한' 식물이라고 쓰여 있었다. 생생하다는 것은 '生生'하다는 뜻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순 우리말이고 뜻은 세 가지나 되는 말이었다.
생생하다
1. 시들거나 상하지 아니하고 생기가 있다.
2. 힘이나 기운 따위가 왕성하다.
3. 빛깔 따위가 맑고 산뜻하다.
*쌩쌩하다 : ‘생생하다’보다 센 느낌을 준다.
조화는 생화를 대체하려고 만들어졌지만, ‘자연스럽지’ 않다. 조화는 시들지 않는다. 꽃은 해를 보고 물을 마시며 피는데, 조화는 해를 보고 비를 맞으면 색을 잃는다. 선명한 발색의 조화는 '생생'하고, 색바랜 조화는 어쩐지 '쌩쌩'하다. 살면서 색을 잃은 조화를 봤던 게 언제 어디에서였는지를 생각하면 괜히 마음이 먹먹해진다.
쓰임을 다해 빛깔이 다 빠진 조화는 보통 서둘러 교체된다. 시든 꽃이 받는 대우와 다르지 않다. 탈색된 조화도 사랑받을 수 있을까? 빛에 바래버렸어도 여전히 꽃일까? 조화라고 해서 꽃이 아닌 것은 아니지 싶다가도, 사실 꽃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그 처지가 슬프면서도, 어쩐지 사랑스럽기도 했다.
왜 하필 조화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나는 조화가 '언제나 생생해야만'하는 이유가 아팠다.
조화를 보며, 경계 주변에서 서성거리는 약하고 아름다운 존재들, 부서지기 일보 직전의 내 신념과 양심들을 떠올렸다. 내가 지키고 싶은 것들을 지키기엔 나는 너무 약하다. 소중한 것들은 언제나, 내 손을 빠져나가고, 색을 잃고, 쓰이고 소멸한다. 그럼에도 나는 조화를 위해 내 체온을 나누고 싶었다. 조화가 스스로 서 있을 수 있는 자리를 내어 주고 싶었다. 그냥 내가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생생한 그림>은 조화에게 체온이라는 다정을 전달하려는 마음을 담은 회화다.
생화는 플로럴폼(오아시스)을 통해 일시적이고 제한적인 생명력을 얻는다. 조화엔 플로럴폼 대신 체온으로 조물거리며 만든 '점토 돌멩이'를 접붙였다. 조화를 위해 내 체온을 나누고 싶다. 손끝에 힘을 주어 둥글넙적하게, 네모지게, 조금 갈라지거나 작더라도 안정감있게. 생생한 자리를 만들어 주고 싶다.
‘생생한 체온’를 마련해 주고 싶은 마음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아무리 진심을 다해 사랑한다 하더라도, 체온으로 데운다 해도, 점토는 결국 식게 될 것임을 알고 있다.
사력을 다해 목소리를 낸다 한들, 바뀌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견고한 사회의 부조리들처럼.
하지만 알면서도 손에 쥘 수 밖에 없는 마음이, 있다.
나는 그런 마음들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싶다.
온기는 결국 식지만, 손자국은 남는다.
지나 온 나의 애씀들이 그러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