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차가운 에어컨 바람이 머리카락을 간질였다.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겨드랑이는 밤새 배어 나온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이불을 목까지 올려 덮었다. 눈을 뜨고 싶지도, 하루를 시작하고 싶지도 않았다. 온몸을 식은땀으로 적셨던 그 악몽으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어젯밤, 굶주리며 울던 고양이를 본 탓일까.
어젠 저녁식사로 버팔로 윙과 맥주를 먹었다. 필리핀 날씨는 대체적으로 덥지만 저녁엔 바람이 불어 나름 선선했다. 가게를 나오자마자 편의점으로 향했다. 필리핀 음식은 기름졌다. 먹을 땐 맛있지만 먹고 나면 언제나 매콤한 라면이 생각났다. 요샌 이곳 편의점에도 한국라면이 많이 들어와 있다. 한류가 내게 끼친 바람직한 영향이랄까. 뭐. 종류가 많다고 내게 좋을 건 없지만. 신라면 말고는 입맛에 맞지 않는다. 여하튼 컵라면 두 개를 들고 나왔을 때, 문 앞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내가 들고 있던 컵라면을 힐끗 보더니 야옹 하고 울었다. 옆에는 쓰레기봉투가 엉망으로 뜯겨 있었다. 수세미처럼 거칠어 보이는 털을 가진 고양이는 꼬리가 오른쪽으로 꺾여 뭉툭했다. 먼 옛날에 사고로 난 상처 같았다. 얼마나 굶었는지 갈비뼈가 보일 정도로 앙상했다. 고양이는 커다란 눈으로 나를 응시하더니 하품하듯 입을 크게 벌리고 야옹 울었다. 미안하지만 고양이에게 줄만 한 음식은 없었다.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나는 컵라면 두 개를 들고 서 있었다. 라면을 먹고 싶은 마음은 사라져 버렸다. 찬장에서 참치 통조림을 꺼내 편의점까지 서둘러 걸어갔다. 고양이는 그 자리에 없었다. 아까 먹은 치킨과 맥주를 쏟아내고 싶었다. 이런 내가 싫었다. 혐오스러웠다.
그래서 기분 나쁜 꿈을 꿨는지도 모르겠다.
일어났으니 카페에 가기로 했다. 조용한 집보단 그곳이 좋았다. 적어도 외롭진 않으니까. 밖은 덥고 습하다. 시원하게 짧은 반바지에 민소매를 입고 싶지만 팔과 다리의 흉터를 가리기 위해 긴 청바지를 입고 카디건까지 걸쳤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땀이 솟는다. 기분 나빠. 조금만 참으면 된다. 카페엔 에어컨이 추울 정도로 세게 틀어져있으니까. 며칠 전 산 천 페소짜리 젠스포츠 가방엔 스케치북과 펜 몇 개, 노트북이 들어있다. 나는 보통 카페에서 다섯 시간 정도를 보낸다. 오전 여덟 시에서 오후 한 시까지. 딱히 할 일은 없다. 나는 직업이 따로 없다. 다만 취미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아등바등 취업할 생각은 없다. 부모가 돈이 많아서 돈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다. 평생? 아마. 지나가면 누구나 쳐다보는 슈퍼카를 몰 정도는 아니고 여행지에서 다음 여행지를 고르며 세계여행을 할 정도도 아니며 집안의 돈을 노리고 남자가 접근할 정도도 아니다. 동남아 어느 도시에서 글을 쓰고 그림이나 그리면서 사치를 부리지 않으며 평생을 살아갈 만큼은 있다. 몸을 한껏 숙인 채 시간을 소모하고 죽기를 기다리기엔 충분한 돈이다. 지금의 나처럼.
왁스로 머리를 빳빳하게 고정시킨 프랭키가 웃으며 물었다. What’s your name? 가지런하고 하얀 이가 눈에 들어왔다. 왠지 모르게 가식적으로 보였다. 나도 가식적으로 웃으며 답했다. Kelly. 물론 그가 내게 이름을 물어본 건 내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다. 음료가 준비되었을 때 이름을 불러 음료를 가져가도록 하기 위해서다. 인간미 넘쳐 보이도록 설계된 효율적인 시스템. 그게 다야. 그런데 프랭키는 왜 내 이름을 모를까. 거의 매일 아침마다 오는 내 이름을. 찾아오는 모든 손님의 이름을 기억할 순 없어도 매일 아침 여덟 시에 찾아오는 내 이름은 기억할 만도 한데. 아무리 인간미 넘치는 척, 설계된 시스템이라도 인간미가 조금은 가미되어도 괜찮잖아. 어쩌면 프랭키는 내게 관심이 전혀 없다는 걸 드러내기 위해 그러는지도 모른다. 그래. 그런 게 분명해. 나는 보기만 해도 역겹게 생긴 여자니까. 라떼 한잔과 초콜릿 쿠키 세 개를 주문했다. 나도 너 따위 필리피노에겐 관심 없어. 네가 아무리 핸섬하고 클린한 미소를 가졌다고 해도. 돈 한 푼 없는 필리피노와 사랑에 빠지진 않는다고. 상상 속에서라도 절대 안 그래. 상상. 그렇다. 나는 밤마다 상상을 한다.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태어난다면 내게 생길 일들을 하나씩 떠올리는 일종의 상상놀이다. 희망이라곤 보이지 않는 이번 생(生)을 끝내버리면 내게 찾아올 새로운 삶을 그리며 하는 놀이. 이 놀이가 없었더라면 나는 진작 고층빌딩에 올라가 몸을 던졌을 것이다. 상상.
현실 속 나는 뚱뚱하고 못생긴 여자다. 키 165cm, 몸무게 95kg. 뚱뚱한 사람 중엔 살을 빼면 괜찮아질 것 같은 사람이 종종 있다. 긁지 않은 복권처럼. 대체로 그런 사람들은 피부가 하얗고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예쁘다. 비록 지금은 살에 묻혀 있지만 지방 덩어리들을 걷어내고 나면 보석처럼 빛날 눈, 코, 입을 가졌다. 반면 나는 답답할 만큼 작은 눈에 쌍꺼풀도 없다. 큼지막한 들창코엔 검은 피지가 씨처럼 박혀있다. 소시지처럼 두툼하고 시체처럼 푸르뎅뎅한 입술, 까무잡잡하고 거친 피부, 화산활동이 막 끝난 것처럼 열려 있는 커다란 모공들. 몸매 비율은 어떻고. 다리는 닥스훈트처럼 짧고 허리는 통나무처럼 뭉툭하고 가슴은 찌그러진 풍선처럼 생겼다. 뚱뚱하면 가슴은 크다던데. 씨발. 나는 왜 이래. 살을 뺀다고 해도 절대 예뻐지지 않을 것이다. 내기를 해도 좋아. 수술을 해도 소용없다. 성형을 하면 성형한 못생긴 여자가 되겠지. 그러니 나는 운동도 성형도 하지 않는다. 괜한 돈을 쓰고 시간을 쓸 필요는 없다.
나도 예뻐지고 싶어. 나도 다른 여자들과 다를 바 없다. 나라고 못생기고 싶어서 못생긴 건 아니다. 못생겼다고 못생긴 마음을 가진 것도 아니다. 보통 여자처럼 화장을 하고 몸매를 가꾸기 위해 운동을 하고 부족한 부분을 성형 수술로 메꾸고 싶다. 달콤한 디저트를 먹는다.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린다. 잘생기고 몸매 좋은 남자를 만난다. 손을 잡는다. 키스를 한다. 그리고 같이 잔다. 사랑을 나눈다. 내겐 절대 불가능한 일이지만. 내가 디저트를 먹고 있으면 사람들은 잘 먹는 종자돼지라도 보는 냥 대놓고 얼굴을 찌푸린다. 손가락질하며 수군거리는 모습을 본 적도 있다. 내가 봐주길 바라는 것 같다. 그런 새끼들은 그렇게 행동하면 내가 부끄러워 다이어트라도 하고, 결과적으로 내게 좋은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려봤자 아무도 봐주지 않는다. 불법 도박 사이트를 홍보하는 가짜 계정들이 와서 댓글을 남길뿐. 남자와의 사랑? 남자는 나와 눈 마주치는 것조차도 혐오하는 걸.
다 필요 없어. 나는 슬리퍼를 벗고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노트북을 열고 글을 적기 시작했다. 오늘 밤 침대에 누워 상상할 이야기를. 노트북 바탕화면엔 지어낸 이야기 파일들이 가득했다. 이야기는 늘 이렇게 시작한다.
다시 태어난다면.
나는 스페인계 필리피노다. 구릿빛으로 태운 피부는 잘 익은 올리브처럼 새까맣다. 몸 구석구석 골고루 태운 피부는 건강한 빛을 발한다. 수분도 잔뜩 머금어 기분 좋게 반짝인다. 허리까지 오는 길고 고운 머리카락은 코코넛 향을 내뿜는다. 팔라완의 바다를 떠올리게 하는 연녹색 눈동자가 있다. 아침이면 아메리카노를 사들고 집으로 찾아오는 남자친구도 있다. 딩동. 문 앞에 서 있는 건 남자친구. 사랑스러워 참을 수 없다는 듯한 뜨거운 눈빛을 보내고 있다. 손에 든 커피보다 뜨거워 보이는 눈빛이 나를 향한다. 그가 다른 한 손으로 내 허리를 휘어 감는다. 보상을 바라는 것처럼 살짝 벌어지는 입. 나는 자비로운 여왕이다. 그 입술에 세상에서 가장 황홀할 키스를 선사한다. 사이. 사랑을 나누고 나면 그는 언제나 결혼 쪽으로 은근슬쩍 화제를 돌린다. 글쎄, 과연 우리 아버지가 너를 만족스러워할까 모르겠어, 속으로만 생각한다. 아버지는 마닐라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거대 조직 보스. 딸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기분파. 그런 아버지에게 내가 결혼하겠다고 하면 아마 널 죽일지도 몰라.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아버지를 싫어하는 다른 조직에게 납치된다. 살려줘!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치지만 코코넛 향이 나는 머리카락도 보석처럼 아름다운 눈동자도 아무 소용없다. 나는 그대로 외진 섬 오두막에 갇힌다. 밖에선 바다 울음소리가 들리고 안에는 전등 하나 없는 곳. 마침맞게 찾아온 태풍 때문에 천둥 번개가 쏟아지고 빗줄기가 창문을 부술 듯이 때린다. 발목과 손목은 덕트 테이프로 꽁꽁 묶여있다. 눈은 안대로 가려져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철컥. 그때 문이 열린다. 누구지? 무서워. 몸이 덜덜 떨린다. 이때 들리는 정다운 목소리. 너를 구하러 왔어. 벗겨지는 안대. 눈앞엔 잘생긴 내 남자친구. 백마 탄 왕자님. 일망타진되는 상대 조직. 흐뭇해하는 아버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아름다운 결혼식. 달콤한 키스.
젠장. 오줌이 마려웠다. 라떼를 마시면 화장실에 자주 가고 싶어 진다. 상상이 현실적인 문제로 끊길 때가 가장 짜증 났다. 오줌이 마려우면 참을 수가 없다. 벗어둔 슬리퍼를 발가락에 꿰어 넣고 화장실로 향했다. 아, 결국 보고 말았어. 거울에 비친 내 모습. 거대하고 흉측하고 못난 내 얼굴 내 몸매. 한숨이 나온다. 어느 한 부분도 구릿빛 피부와 연녹색 눈동자를 지닌 스페인계 필리피노와 안 닮았다. 우르르 콰쾅. 볼일을 보고 물을 내릴 때 하수구로 흘려보내는 배설물과 함께 내 못생김도 함께 버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더러운 오물이 씻기고 깨끗한 물이 나오는 것처럼 내 모습도 새로워지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죽고 다시 태어난다는 확신이 있다면 당장에라도 손목을 그어버릴 거야.
다시 자리로 돌아와 스케치북을 꺼냈다. 이야기는 이제 끝. 상상 속 여자의 모습을 그려봐야겠어. 나는 그림을 꽤나 잘 그린다. 상상 속 아름다운 내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초코칩 쿠키를 먹었다. 초콜릿 향이 입안에 퍼진다. 아, 달콤해.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잠깐, 이 미소는 초콜릿 때문이 아니야. 스케치북 속 여자가 예뻤기 때문이지.
그 순간,
“Kelly?”
뒤에서 프랭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를 기억한 거야? 내게 무슨 볼일이 있는 거지? 이번 주말에 영화라도 같이 보자고 하는 걸까.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정적.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프랭키 앞에는 여자가 서있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여자가. 다시 태어난다면에 나올 법한 그런 여자. 피부가 하얗고 고운 그 여자는 북유럽 혈통을 이어받은 것처럼 보였다. 지지난주에 북유럽 공주로 태어난다면 저런 모습일 거라고 상상했었다. 큼직한 가슴에 잘록한 허리, 풍만한 엉덩이. 다리는 길고 얼굴은 작다. 몸에 딱 달라붙는 청바지가 묘하게 관능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발목에 채워진 천 팔찌는 그녀가 입은 보헤미안 스타일 셔츠와 잘 어울렸다. 밝게 웃을 땐 주변 공기도 덩달아 환하게 빛났다. 그 여자는 프랭키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그래, 그녀의 이름도 켈리인 것이다. 나와 마찬가지로. 켈리라는 이름은 내 영어 이름이긴 하지만 나는 한국에 돌아갈 마음이 전혀 없고 켈리라는 이름이 내겐 더 익숙하다. 프랭키는 내게 주문을 받을 때와는 사뭇 다른 표정으로 그녀의 주문을 받았다. 여자도 라떼 한잔을 주문했고 바 테이블에 앉아 음료를 기다렸다. 나는 곁눈질로, 아니 뚫어질 듯이 여자를 살폈다. 그녀는 완벽했다. 얼굴부터 몸매, 투명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하얀 피부. 내가 저 여자가 될 수 있다면 내 모든 걸 바칠 거야.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하겠지. 언제 어디서나 주목받는 삶. 누구나 사랑해주는 삶. 삶이라는 드라마 속 주인공. 왕자님과 로맨틱한 사랑을 하고 결혼해 자신을 닮은 아이를 낳는다. 그리고 다음은? 당연하지 않나. 그들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
나 같은 여자와는 다르다. 늙어빠진 아파트 관리인이나 가난한 청소부한테도 멸시받는 나와는 다르다. 내 얼굴은 주인공의 얼굴이 아니다. 내 얼굴은 사기꾼, 협잡꾼, 스토커의 얼굴이다.
켈리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음료를 기다렸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잠깐만. 저건 말도 안 돼. 믿을 수 없었다. 켈리가 곁눈질로 커피를 내리는 프랭키를 훔쳐보고 있었다. 켈리가 프랭키를? 고풍스러운 북유럽 공주님이 하찮은 거렁뱅이 필리피노를 좋아할 리가 없잖아. 물론 프랭키가 필리피노치고는 키도 크고 잘생긴 외모인 건 사실이지만 그래 봤자 카페 알바생일 뿐이고 가난한 이류 인생일 뿐이다. 그런데도 켈리는 마치 프랭키에게 첫눈에 반했다는 듯이 설렘 가득한 표정이었다. 프랭키는 그런 시선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열심히 라떼를 만들었다. 라떼를 받은 켈리는 창가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녀는 쉬지 않고 핸드폰을 두들기며 라떼를 마시고 이따금씩 프랭키를 훔쳐봤다. 프랭키와 눈이 마주치면 부끄러움 가득한 소녀 같은 미소를 지었다.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나는 초조하게 쿠키를 씹었다. 초콜릿의 단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긴장한 탓에 위에서 쓴맛이 올라왔다. 프랭키 역시 일 하는 내내 켈리를 의식하고 있었다.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헛기침을 하고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런, 설렘 가득한 두 사람의 모습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그날 밤 침대에 일찍 누웠지만 잠이 오질 않았다. 켈리가 프랭키에게 마음이 끌리는 이유는 무얼까. 그녀가 입은 옷과 장신구는 분명 비싼 것들이었다. 그녀는 가난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왜? 예쁘고 부유한데 왜 프랭키에게 반한 거지. 그녀가 좋아했던 옛사랑과 닮았나. 아니면 불치병 때문에 목숨을 잃은 소중한 남자의 이름이 프랭키? 명찰을 보고 그 이름을 보자 조건반사의 개처럼 침을 뚝뚝 흘린 걸까. 눈을 감으면 두 사람이 눈이 마주쳤을 때 짓던 미소가 떠올랐다. 켈리는 수줍게 웃고 프랭키는 부끄러운지 귀가 빨개졌다. 쿵쿵쿵. 그들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로를 보고 흥분한 두 사람의 심장은 혈액을 미친 듯이 뿜어낸다.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내 심장도 두근두근 첫사랑을 시작하는 소녀처럼 뛰었다.
소풍 가기 전날인 학생처럼 나는 설레는 마음에 잠을 설쳤다. 눈곱 때문에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카페로 향했다. 오늘도 켈리가 왔을까. 라떼 한 잔과 초콜릿 케이크를 주문했다. What’s your name? Kelly. 역시 이번에도 프랭키는 내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오늘따라 프랭키는 활기차 보였다. 키도 더 커 보이고 미소도 더 따뜻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프랭키가 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 게 어제만큼 아쉽지가 않았다. 그때 켈리가 들어왔다. 켈리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역시나 딱 달라붙는 검은색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위엔 거의 헐벗은 것 같은 요가 복을 입었다. 질투심이 치솟았다.
나는 라떼와 초콜릿 케이크를 받아 들고 자리를 찾아 앉았다. 두 사람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프랭키는 켈리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렇게 몸뚱이를 드러냈는데 눈이 안 가는 게 신기하지. 켈리도 그 시선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남자를 유혹하려고 저렇게 차려입었겠지. 프랭키가 말했다. 안녕, 켈리. 좋은 아침이야. 그리고 환하게 웃는다. 안녕, 프랭키. 좋은 아침이네. 켈리도 웃으며 답한다. 교차하는 두 사람의 시선. 마치 이 세상에 두 사람만 존재한다는 듯이 서로를 향한 눈빛. 내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내 설렘은 프랭키 때문도, 켈리 때문도 아니었다.
세상에, 나는 두 사람이 빠진 사랑과 사랑에 빠져버린 것이다.
혼란스러웠다. 타인의 사랑과 사랑에 빠지다니. 이게 가능이나 한 일일까. 태어나서 이토록 강렬한 감정은 처음이었다. 가슴 한편이 전기에라도 감전된 듯 찌릿찌릿 저렸다. 숨도 밭아졌다. 평소 같으면 순식간에 먹어치웠을 케이크엔 손도 대지 않고 두 사람을 훔쳐봤다.
두 사람은 어제보다 한결 가까워 보였다. 켈리는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 대해 이야기했다. 포브스우드 헤이츠란 곳인데. 얼마 전에 이사 왔어. 그리곤 자신이 발견한 요가학원에 다닐 거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잠깐, 포브스우드 헤이츠라면 내가 사는 곳이잖아. 켈리가 내가 사는 곳으로 이사를 왔다니. 신기해. 두 사람의 켈리. 너무도 다른 켈리. 나는 스케치북을 펼치고 그림을 그리는 척하며 두 사람 이야기에 집중했다. 카페엔 우리 셋 밖에 없었다. 프랭키와 켈리는 끊임없이 대화를 나눴다. 그들에게 있어 나는 카페에 걸린 액자처럼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 모양이었다. 켈리가 프랭키보다 적극적이었다. 그녀가 먼저 오늘 저녁 함께 맥주 한잔이나 하자고 말했다. 마닐라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주변 사정을 모르니 설명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프랭키는 갑작스러운 제안에 놀랐는지 대답을 못하고 있었다.
이 답답한 필리피노야. 당장 수락해. 얼른.
나는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프랭키는 겁 많은 척후병처럼 주변을 살피고 나서 켈리에게 속삭였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그림 그리기에 열중한 척하면서 그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대답은 예스였다.
언제나처럼 저녁이 찾아왔다. 가로등이 포브스우드 헤이츠 거리를 밝히고 있었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바람이 불어왔다. 대로변에 깔아놓은 테이블에 앉아 사람들은 먹고 마시며 밤바람을 즐겼다.
나는 언제나 시끄러운 음악이 넘실대는 스포츠펍으로 들어갔다. 이곳을 찾은 손님 중엔 골초가 많았다. 1층엔 언제나 담배연기가 가득했다. 매캐한 담배연기도 싫고 뜨거운 꽁지도 싫어. 담배는 필연적으로 나를 예전 기억으로 이끈다. 씨발. 지금 그런 걸 생각하고 싶지 않아. 켈리,라고 말하자 종업원은 나를 예약해둔 야외 테라스로 안내했다. 자리에 앉아 아시안 치킨 윙과 산미겔 병맥주를 주문했다. 마늘만 잔뜩 올리면 아시안 푸드냐.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얼마 안 있어 프랭키와 켈리가 들어왔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내 옆자리에 앉았다. 자연스럽게,라고 하기엔 내 치밀한 작전 덕분이지만. 나는 테이블 두 개를 예약해두었다. 가장 분위기 좋은 테라스 테이블로. 다른 자리는 이미 모두 만석. 그들이 두리번거리며 자리를 찾을 때, 나는 전화를 걸어 예약을 취소했다. 완벽해. 이제 두 사람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어.
켈리는 언제나처럼 아름다웠다. 진한 노란색 드레스엔 화려한 꽃이 프린팅 되어있었다. 화보를 찢고 나온 모델 같았다. 프랭키도 카페 유니폼을 입었을 때보다는 훨씬 잘생겨 보였다. 그래 봤자 싸구려 가죽모자에 싸구려 청바지를 입었을 뿐이지만. 촌스러웠지만 뭐 나름대로 봐줄 만 해.
두 사람 대화에선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오래전에 나온 감자튀김과 맥주는 여전히 나왔던 그대로였다. 맥주를 마시고 감자튀김을 먹을 시간조차 아까운 것이다. 둘의 시선은 온전히 서로를 향했다. 어쩜 저렇게 사랑스러울 수 있지. 켈리는 프랭키의 세련되지 못한 농담에도 즐겁게 웃음을 터뜨렸다. 코에 생기는 잔망스러운 주름. 프랭키는 세상에 이보다 아름다운 존재는 없다는 듯이 켈리를 바라봤다. 아, 역시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진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숨이 가빠왔다. 나는 맥주를 단번에 들이켜고 한 병을 더 주문했다. 라이브 쇼를 보는 기분이었다. 나는 두 사람의 시선이 스치고 그 시선에 담긴 사랑을 느낄 때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행복했다. 입이 벌어지고 침이 고였다. 관념적인 오르가즘이었다. 누군가 이런 내 모습을 봤다면 배가 고파 입맛을 다신다고 생각했겠지만.
“켈리는 꿈이 뭐야?”
프랭키가 물었다.
“아티스트.” “나는... 나는... 꿈이 없지.”
우리는 대답했다. 아티스트라. 나도 일종의 아티스트야.
“멋져. 어떤 아티스트?”
“화가. 보통 화가랑은 조금 다르지만.” “다시 태어난다면을 만들어 내는 아티스트.”
“예를 들면?”
“나는 극사실주의 화풍으로 그림을 그려. 거기에 사진을 더하지.” “다시 태어난 나는 나이지만 동시에 내가 아니야.”
프랭키는 이해가 잘 가지 않는 표정이다.
“사진을 찍고 인화해. 그리고 그 사진이랑 똑같은 크기의 그림을 그리는 거야. 사진보다 더 실제 같게. 빛의 일렁임이라든지 떠다니는 먼지 하나까지 놓치지 않아. 미세한 주름도 작은 모공도 자세하게 그려내. 그림을 다 그리면 사진의 일부를 잘라서 그림에 붙여. 조각난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새로운 내 모습을 상상하고 지금 나와는 완전 다른 내가 살아가는 삶을 지어내는 거야. 다시 태어난 나는 그 누구보다도 행복하고 그 누구보다도 즐거운 삶을 살아. 다시 태어난 내 삶의 사소한 부분까지도 모두 내가 설계해. 어떤 음식을 좋아하고 어떤 색을 사랑할지. 조각난 현재의 삶을 멋진 퍼즐로 교체하는 거지.”
“내겐 조금 어렵네. 켈리는 참 멋지다.”
그럼 그렇지. 프랭키는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것도 모를 테니까.
“전혀 어렵지 않아. 나중에 한번 보여줄게. 아마 좋아할 거야. 프랭키, 넌 꿈이 뭐야?”
프랭키는 자기 꿈에 대해 확신에 차 이야기했다. 하지만 뭐, 뻔한 이야기다. 은행이나 관청에 들어가 돈을 벌고 집을 사고 여자를 만나(켈리 너처럼 예쁜)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고 자녀를 기르며 살아가고 싶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뻔한 이야기. 가여운 프랭키. 켈리는 그런 평범한 소망엔 관심을 갖지 않는단다. 세부가 결여된 프랭키의 미래는 갈수록 힘을 잃어갔다. 켈리는 진즉 흥미를 잃었지만 프랭키에 대한 애정으로 하품을 참아가며 이야기를 들었다. 집중해서 듣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굳게 다문 입술. 머릿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할 게 뻔하지만 시선만은 프랭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스승에게서 금언(金言)이 나오길 기대하는 그리스 철학자처럼.
어쨌든 거기엔 사랑이 있었다. 프랭키의 꿈이 아무리 시시해도, 켈리의 꿈이 이해받지 못해도. 두 사람 사이엔 분명 사랑이 싹트는 중이었다. 나는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맥주가 그렇게나 달았던 적이 있었나. 그 어느 영화보다도 생생한 영화가 내 눈앞에 펼쳐졌다. 최고의 안주. 보통 영화와는 차원이 다른 리얼함.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전개. 그리고 두 사람이 나누는 로맨틱한 시선. 제목? 켈리와 프랭키.
과음을 해버렸다. 세상이 푸딩처럼 물렁해지더니 무너지기 시작했다. 바닥이 흔들리는 게 배 위에 타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바닥에 토하고 말았다. 종업원이 달려왔다. 나는 종업원의 손에 음식 값 두 배에 해당하는 돈을 쥐어주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나왔다. 프랭키와 켈리는 그런 나를 혐오스럽다는 듯 쳐다봤을까.
침대에 누웠는데도 세상은 여전히 빙글빙글 돌았다.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태어난다면. 상상을 해야 하는데. 그냥 잠들기엔 밤은 너무 길었다.
“저 돼지 같은 년을 봐.”
눈을 뜨자 나는 사방이 거울로 된 방에 갇혀있다. 천장과 바닥까지 모두 유리다. 거울 속 나는 알몸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명이 쏟아져 주위를 환하게 밝혔다. 거울 속엔 끔찍한 몸뚱어리를 가진 추녀(醜女)가 허둥대고 있다. 역겨워. 거울 바깥에선 내 모습이 보이는 모양이다. 여러 사람들이 추한 모습을 보고 욕설을 내뱉는다. 까무잡잡한 피부. 짧은 목. 이상한 반점이 돋은 팔과 다리. 복어처럼 튀어나온 불뚝한 배. 수북한 털이 뒤덮인 성기. 역겨운 내 모습을 거울이 복제해낸다. 나는 끝없이 증식한다. 하나 같이 역겨운 몰골이다.
“저 돼지랑 할 수 있는 사람?”
남자가 묻자 사람들이 폭소를 터뜨린다. 몇 사람은 자살폭탄테러에 대한 이야기라도 들은 것처럼 탁한 신음소리를 흘린다.
“저거랑 비교되니 돼지도 기분 나쁘겠어.”
또다시 터지는 폭소.
“농담이 아니야. 하는 사람한테 선물을 주겠어. 원한다면 현찰로도.”
“얼마나 줄 건데?”
“백만 원.”
“야 저거 때문에 받은 정신적 피해보상만 백만 원이 넘어.”
“오백.”
“도전.”
두 남자는 흥분한 목소리로 대화를 주고받는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꽉 막힌 방에서 숨을 곳을 찾는다. 눈을 감고 싶지만 눈이 감기지 않는다. 그때, 문이 열린다.
“내가 돈 때문에 별짓을 다 하네.”
역겨워.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다. 살찐 쥐처럼 생겼다. 코에는 새까만 여드름이 잔뜩 나있다. 왼쪽 다리를 절며 내게 다가온다. 내게 손을 뻗는다. 환호소리가 커진다. 동시에 탄식도 터져 나온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남자를 밀었다. 찌그러진 내 젖가슴이 흔들리는 게 느껴진다. 남자는 넘어졌다. 잔뜩 찌푸린 미간.
“가까이서 보니 도저히 못하겠다. 일주일은 밥 못 먹겠어.”
남자는 욕과 함께 내게 침을 뱉었다.
그러자 다른 남자들이 들어온다. 건장한 남자 셋. 모두 입에 담배를 물고 있다. 담배연기는 조명을 받아 뿌옇게 빛난다. 내 얼굴엔 눈물과 침이 범벅이다. 나는 내 몸에 가리고 싶은 부분이 너무 많아 아무 곳도 가리지 못했다. 얼굴도 다리도 가슴도 성기도 하나 같이 역겨워. 그들은 더러운 벌레라도 보듯이 나를 보고 있다. 그러다 한 남자가 칼을 꺼내 내 허벅다리를 벤다. 인두로 지진 것처럼 격렬한 고통이 허벅지를 덮친다. 비명을 지른다. 그는 아랑곳 않고 피던 담배꽁초를 내 팔뚝에 지진다. 고기가 익는 고소한 냄새가 방에 퍼지고 곧바로 통증을 느낀다. 이번엔 인두로 지진 것처럼, 이 아니야. 정말 인두로 지진 거라고. 방금 전과는 결이 다른 비명이 터져 나온다. 얼굴을 찡그리고 돼지처럼 울부짖는 내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눈을 감고 싶어. 하지만 눈이 감기지 않는다.
“너 뭐하냐.”
다른 남자가 묻는다. 만면에 조소를 띄고서.
“다이어트 도와주려고. 피 빼면 살 빠질 수도 있잖아.”
“그러다 죽으면 어쩌려고.”
“나라면 이렇게 사느니 죽는다.”
“그것도 그러네.”
세 남자는 음흉하게 웃는다. 같은 의견을 가진 자들의 미소.
칼을 든 남자가 칼을 손가락에 끼우고 돌리기 시작했다. 윙윙.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생각한다. 그래, 이렇게 사는 것보단 죽는 게 낫겠지. 점점 주변이 어두워진다. 정신이 흐릿하다.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사이렌 소리가 들린다. 웅성거리는 사람들. 얼굴에 스치는 차가운 겨울바람. 다리 사이로 흐른 피가 딱딱하게 굳는다. 고통에 허덕이는 허벅지와 팔뚝보다 그 감각이 더 신경 쓰인다. 살을 에는 듯 한 바람. 바람에 굳어가는 검붉은 피.
희미해지는 의식 사이를 비집고 누군가 속삭인다.
“너 같은 년은 행복하면 안 돼.”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병원이 아니다. 경찰도 없다. 멀리서 필리핀 억양이 섞인 영어가 들려왔다. 여긴 한국이 아니야. 그저 악몽이라고. 겨드랑이가 축축했다. 기분 나쁜 냄새가 방에 떠다녔다. 무력감과 좌절의 냄새였다. 씨발.
대충 옷을 꿰어 입고 카페로 향했다. 꿈에서 빠져나와 현실에 발을 딛고 싶었다. 마닐라의 공기가 반갑게 다가왔다. 카페에 도착해 마주한 광경은 어젯밤 꿈을 잠깐이나마 완전히 잊게 해 주었다. 켈리가 직원용 앞치마를 입고 밝게 웃으며 내게 인사했으니까. 이게 무슨 일이야. 그녀는 너도 행복할 자격이 있어 라고 말하는 것처럼 웃어주었다. 프랭키도 나를 보고 웃어주었다. 나는 말을 더듬으며 라떼를 주문했다. What’s your name? Jenny. 이름을 묻는 프랭키에게 제니라고 답했다. 여신처럼 아름다운 여자와 악마처럼 흉측하게 생긴 내가 같은 이름이라면 비웃을 게 분명하니까.
“너 켈리 아니야?”
“어, 어. 사실 이름을 아직 못 정해서. 켈리도 제니도 아니야.”
“그럼 아무도 아닌 거네?”
프랭키는 웃는다. 재치 있는 농담이라고 생각하겠지. 그런데 전혀 웃기지 않아, 프랭키. 잠깐, 너 내 이름을 알고 있었어? 나는 미소라곤 할 수 없는 경직된 표정으로 라떼를 받았다.
두 사람은 시선을 교환하고 짜기라도 한 듯 어깨를 움츠리며 웃었다. 내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둘은 다시 서로에게 집중했다. 프랭키는 켈리에게 커피 내리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뒤에서 허리를 감싸고 팔목을 부드럽게 잡으며 원두를 갈아 넣었다. 어젯밤 내가 정신을 잃고 가게를 나온 뒤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둘은 분명 한걸음 가까워진 것 같았다. 어제의 나를 원망했다. 술 때문에 내가 대체 뭘 놓친 거지. 온몸이 저릿할 만큼 화가 났다. 하지만 켈리와 프랭키의 애정행각을 보니 동시에 마음속에서 따뜻한 온기가 흘러나왔다. 악몽이 준 냉기를 물리치는 따스한 감정. 두 사람의 사랑에 내 마음이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 지금부터는 한순간도 놓치지 않겠어.
켈리가 프랭키 어깨에 손을 얹는다. 내 아랫배에 뭔가 묵직한 것이 자리 잡는 기분이다. 기분 좋은 답답함이랄까. 뺨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이어 프랭키가 켈리의 머리카락을 넘겨준다. 엉큼한 자식. 내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오른다. 숨을 짧게 들이켰다. 입속은 바싹 말라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대화한다. 사타구니가 조여 오는 느낌이 든다. 좋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서로를 사랑해봐, 내가 볼 수 있게.
하지만 곧 사람들이 몰려온다. 프랭키는 커피를 만드느라 바쁘고, 켈리는 그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앞치마를 벗고 밖으로 나온다. 그럼 그렇지. 켈리가 일을 할 리가 없다. 그녀는 연락하겠다고 말하고 밖으로 나간다. 이런, 한껏 달아오른 내 흥분도 갈 길을 잃었다. 타다 남아 버린 장작 같다. 고조된 감정을 발산하고자 상상을 시작한다. 다시 태어난다면.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두 사람의 손이 스치던 순간, 빨라지던 내 심장 고동 소리가 다시 떠오른다. 카페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갔다.
켈리는 매일 아침마다 프랭키의 카페에 찾아왔다. 지난번처럼 앞치마를 입고 커피 내리기를 배우지는 않았다. 바 테이블에 앉아 프랭키와 이야기를 나눴다. 손님이 많아지면 서로만 이해할 괴상한 손짓으로 서로에게 마음을 전하는 것 같았다. 둘만의 약속이 없고서야 검지와 약지만 펴고 나머지는 모두 접은 손 모양을 보고 그렇게 행복한 미소를 지을 리가 없으니까. 일이 끝나면 값비싼 레스토랑에 가서 식사를 하거나 하이스트리트에서 쇼핑을 했다. 켈리가 목걸이나 요가 복을 사면 프랭키는 큼직한 쇼핑백을 들고 따라 다녔다. 두툼한 스테이크를 이빨로 뜯어먹던 프랭키는 이제 제법 세련된 손놀림으로 고기를 썰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점점 더 가까워졌고 내 관념적 오르가즘도 점점 더 많은 쾌락을 가져왔다. 나는 더 이상 상상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림도 글도 내게서 멀어졌다. 하루 대부분을 두 사람을 지켜보며 보냈다. 현실이 행복을 제공하니 상상이 끼어들 자리가 사라졌다.
어느 날 켈리가 프랭키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드디어. 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켈리의 집에 들어가고 싶었다. 그녀의 집은 포브스우드 헤이츠 최상층 스위트룸이었다. 같은 아파트지만 방 하나 뿐인 내 집과는 다르다. 켈리와 나는 길가에서 동전을 구걸하는 아이와 나만큼 다르다. 크고 넓은 부잣집 날씬한 켈리와 작고 좁은 시궁창 뚱뚱한 켈리. 두 사람은 서둘러 방으로 향했고 당연히 나는 들어가지 못했다. 난 두 사람이 처음으로 사랑을 나누는 순간을 놓쳐버렸다. 온몸이 찢어지는 것처럼 화가 났다. 난 그 장면을 꼭 보고 싶었다. 서로를 탐하는 입술, 성급하게 옷을 벗는 프랭키, 다리를 벌리는 켈리. 상상하면 할수록 실제를 원했다.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순간을 본다면 내 뇌는 쾌감으로 새하얗게 타버릴 텐데. 나는 최상층 스위트룸으로 향했다. 복도에서 서성이다가 문에 귀를 대보기도 했다. 안에선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바다동굴에서나 날 법한 우웅하는 소리가 들려올 뿐이었다. 벌써 끝났을까. 안 돼. 내가 못 봤단 말이야. 쿵쿵쿵.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곧이어 문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나는 재빠르게 달려 비상구로 몸을 숨겼다. 켈리 집 문이 열리며 프랭키가 나왔다. 급하게 꿰어 입은 듯 청바지는 구겨져 있었고 상의는 맨몸이었다. 땀 때문인지 거무죽죽한 몸이 번들거렸다. 집에서는 어렴풋하게 푹 익은 바나나향이 새어나왔다. 어쩌면 두 사람이 뿜어낸 사랑일지도 몰라.
“아무도 없어. 잘못 들었나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들킬까봐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반라의 프랭키가 불러일으킨 전라의 켈리, 그리고 문에서 새어나온 그들의 체취. 이 모든 게 내 상상을 자극했다. 두 사람이 안에서 가졌을 상황이 현실로 다가왔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상상에 몰두했다. 그 후 며칠 동안 집에 틀어 박혀 그 상상만으로 몇 번이나 절정을 맛보았다. 시간이 갈수록 상상은 흐릿해졌다. 내 욕망은 끝없이 팽창했다. 상상으론 부족해. 나는 두 사람이 사랑을 하는 모습을 직접 보고 직접 듣고 싶어.
일주일 후 몰래카메라와 도청장치가 도착했다. 켈리와 프랭키의 사랑을 사랑하는 동안엔 악몽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 둘을 보며 나는 스스로가 평범한 사람이 되고 있다는 걸 실감했다. 그들이 내뿜는 사랑을 먹으며 조금씩 성장하는 벌레처럼, 나는 변하고 있었다. 보다 많은 사랑이 필요했다. 그들을 보지 못하면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낫다.
여러 번 시도 끝에 켈리의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열쇠를 넣어두는 자물통 비밀번호를 입수해낸 것이다. 멍청한 가사도우미 덕분이었다. 자물통의 비밀번호는 1215. 가사도우미가 설정해둔 건 1214.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맨 끝 번호만 내려 봤을 뿐인데 주문을 외운 것처럼 열렸다. 청소부가 돌아가고 켈리가 프랭키를 데리고 연어 타르타르를 먹거나 테니스 라켓을 고르고 있을 무렵 나는 집에 잠입해 몰래카메라와 도청장치를 설치했다. 침대를 부감으로 담아내도록 광각렌즈가 달린 카메라를 전등 속에 달고, 확대가 가능한 줌렌즈를 침대 앞 텔레비전 위에 달았다. 도청장치는 침대 매트리스 안에 쑤셔 박았고. 부엌이나 거실까지 볼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것까지 사기엔 돈이 부족했다.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눌 확률이 가장 높은 장소에 집중하는 게 나았다. 선택과 집중. 이게 성공의 지름길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