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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행 Nov 21. 2023

난독증이지만 살만합니다.

: 쓸데없이 재미있게 살아볼게


‘25쪽부터 30쪽까지 읽어봐’ 


초등학교 때 가장 두려운 시간였습니다. 글을 소리 내어 읽지 못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공부를 잘 못했던 것도, 책 읽기가 싫어서도 아녔는데 말이죠.


친구들에게 부끄러워 선생님이 제발 책 읽기만 시키지 말았으면 언제나 바랐습니다. 책을 읽으면 단어의 앞글자와 뒷글자가 서로 얽히게 됩니다.


‘소크라테스’는 ‘소크라스테’가 되고

‘플라톤’은 ‘톤플라’가 되곤 합니다.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이나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같은 러시아 소설들은 다른 사람들의 책 읽기 시간에 곱절은 더 걸립니다.


문장은 읽다 놓치기가 일쑤입니다. 불편하지만 읽는 문장을 따라 손으로, 펜으로 쫓아가며 읽어야 겨우 속도가 붙습니다. 


이런 증상이 왜 내게 일어났는지,

무슨 이유 때문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 증상이‘난독증’이라는 것도 한참 어른이 된 후 알았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아인슈타인, 피카소, 리처드 브랜슨이나 톰 크루즈가 난독증이라는 것도 큰 위안이 되지 않습니다.


부모님께도 알리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를 떠나보내는 마지막 날 떠듬떠듬 송가를 낭독했습니다. 


자연스럽게 문자보다는 그림이 더 편안합니다. 

전화번호나 은행계좌번호 같은 숫자도 사진처럼 기억합니다. 


다행히도 저는 광고를 만드는 광고쟁이입니다. 

광고는 낯설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낯설게 보이는데 나름 난독증은 크립톤 별에서 지구에 온 ‘슈퍼맨’의 능력입니다.


빨리빨리의 민족에게 저 같은 사람이 한 명쯤 있어도 괜찮을 거라 생각합니다. 


‘광고쟁이님, 이 기획안 어떠세요?’ 오늘도 사람들은 제게 묻습니다. 

이제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 잠시만요, 제가 난독증이 좀 있어서요’


난독증이지만 살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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