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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케빈은 어떤 어른이 되어 있을까?

by BOX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으시다면


외계인이 지구인 사이에 숨어 산다는 영화, <맨 인 블랙>에는 뉴럴라이저라는 만년필처럼 생긴 작은 물건이 나온다. 이 장치의 버튼을 누르면, 불빛이 번쩍거리는데, 이 불빛을 쬐면 순식간에 기억이 지워지는 아주아주 신박한 기계다.


주말 아침, 쓰린 위장을 부여잡고 살포시 눈을 뜬다. 가만있어보자, 지난밤 회사 회식자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더라? 꼰대 같은 김팀장에서 '당신이 팀장이면 다야? 이런 씨를 발라먹을 수박 같으니라고' 아련히 주정뱅이 꽐라가 되어 테이블을 엎었던 기억이 서늘히 스친다. 어디 그뿐인가? 헤어진 애인에게 카톡을 남긴 이불킥의 후회도, 망할 놈의 코인투자로 날아간 적금의 아픔도 모두가 지우고 싶은 기억들이다. 이럴 때 필요한 게 바로 이 기계다. 그렇다. 흑역사의 기억을 지워줄 뉴럴라이저 하나만 있다면 만사 오케이다. 그래, 까짓껏! 쓰~윽, 불빛만 한번 쬐면 그만이다. 그러니까 내 머릿속의 지우개가 되시겠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에서는 최면술사가 이 기계를 대신하는데, 영화 끝자락에 배우 최민식의 아픈 기억을 아주 깔끔하게 지워준다.


그렇지만 세상에 그런 환상적인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뉴럴라이저든 최면술사든 곁에 있으면 좋으련만, 현실의 나에겐 그저 머리를 쥐어뜯는 후회만이 남을 뿐이다. 그렇다. 영화는 영화다.


혹시, 12살 케빈을 아시나요?


뽀글 머리의 케빈은 12살이다. 시리즈를 거치며 13살이 되고 14살이 되었지만, 나에게 케빈은 언제나 12살로 기억된다. 그에겐 사랑하는 부모가 있고, 같은 부모의 자식이라고는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 망나니 형도 한 명 있다. 눈치 없고 세상 물정 모르는 너드 같은 친구와 첫사랑 여자친구도 있다. 드라마의 시작은 어른이 된 케빈이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꺼내는 이야기다. 낡은 비디오테이프 속에 가족들과 친구들의 모습 속에서 그의 작은 세상이 펼쳐진다. 사실, 나는 이 드라마를 제대로 본 적이 없다. 그러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떠오르지 않는다.


헌데, 이상하다. 나에게 케빈은 오랜 추억처럼 빛난다. 이 무슨 해괴망측한 말도 안 되는 소린가? 기억에는 없는데 추억으로는 남는다고? 어떤 이유일까? 대체 기억과 추억은 무슨 차이길래, 보지도 않은 케빈을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추억하고 있는 걸까? 궁금한 마음에 사전을 찾아본다.

IMG_6053.heic 추억이라는 다시 못 올 화양연화

기억 記憶 이전의 인상이나 경험을 의식 속에 간직하거나 도로 생각해 냄.

추억 追憶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함. 또는 그런 생각이나 일.


이랍니다.... 만! 혹시 차이는 아시겠어요? 이것만으로는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대관절 기억과 추억은 뭐가 다른 걸까? 곰곰이 생각해 본다. 아마 추억이란 감정과 시간이 쌓이고 채색된 기억의 일부가 아닐까? 오랜 시간에 걸쳐 기억의 서랍에서 꺼내어 펼쳐보고 수만 번의 되새김질 끝에 만들어진 감정의 단어가 아닐까?


기억은 아픔이 있지만, 추억은 언제나 애틋하다


그래서 뉴럴라이저건 최면술사건 기억은 지울 수 있겠지만, <케빈은 12살>을 보았던 아름답고 애틋했던 시절의 추억은 잊혀지지 않는다. 그렇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나면 회식의 창피함도, 이불킥의 후회도 추억이 된다. 억지로 지우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아픔은 무뎌지고, 과거는 윤색되어 빛나게 된다. 왜일까? 과거는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기억 속에 자리한 그 모습만으로도 우리에겐 추억이 된다. 그리 변하거나 꼭 알려들지 않아도 그 순간 그 자리의 기억이 그대로라면 그것만으로도 그 시절은 화.양.연.화.花樣年華 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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