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상선암 수술
눈을 떠보니 회복실이었다.
마취과 친구가 회복실에서 환자가 자꾸 말을 걸거나 침대에서 내려오려고 하는 것만큼 난감한 게 없다고 한 것이 기억났지만 깨어났다는 티는 내고 싶어서, 부지런히 눈만 깜빡깜빡 감았다 떴다 하고 있었다.
회복실에서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드는 감정은 안도이다.
인생의 챕터가 있다면 전환이 된 느낌이랄까.
역시 나에게도 다음 이야기가 있어.
이송원이 도착해서 병실로 이동하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기 시작했다.
아마도 수술 시 목을 최대한 위로 들어 올리는 자세(Full extension)를 유지했었기 때문에 후두부에 무리가 갔을 것으로 추정한다.
병실에 가까워지고 담당 간호사님의 얼굴이 보이자 말했다.
"저... 근데 머리가 너무 아픈데요..."
목소리가 나와 안도했다.
수술 위치가 목소리를 지배하는 신경과 인접하여 발성에 문제가 생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간호사님이 서둘러 뒷목과 어깨에 파스를 붙여주었고, 수술부위에는 얼음팩을 대주었다.
이동을 위해 목 주변 근육에 힘을 조금만 주어도 목이 화끈거리고 주변 근육들이 아파왔다.
손과 발이 저리기 시작했다.
수술 후 부갑상선의 혈액순환장애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증상이었다.
물먹는 연습을 해보자고 간호사님이 빨대가 꽂힌 냉수를 주셨는데, 한 모금 넘길 때마다 사레가 들리며 목이 아파와서 간호사님이 나간 후로는 물을 마시지 않았다.
나는 나의 병과 수술 후 증상들에 대해 전부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어서 무력감을 느꼈다.
몸이 성치 않은데 수액 때문에 폴대를 끌고 다니는 것이 참 불편했다.
수액줄 때문에 옷을 갈아입기도 힘들고 샤워를 하기에도 곤란했다.
첫 수술로 진행해서 수술이 10시쯤 끝났는데, 전날 자정부터 금식이었으니 10시간 넘게 공복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배가 너무 고팠는데 저녁이 되어야 죽이 나올 것이라고 해서, 몰래 가져간 쿠키를 먹었다. (죄송합니다...)
나는 불필요한 경우에는 수액은 주지 않고 식이처방은 좀 더 신경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창문 유리로 양갈래 머리를 한 내가 보였다.
이런 머리 해본 게 20년도 더 된 것 같은데.
문득 학생 때 생각이 났다.
수능이 끝나고 재수학원 친구들과 명동에서 만났다.
평일 낮시간에 학원이 아닌 곳에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참 신이 났다.
생전 처음으로 친구들과 백화점에 들어갔는데, 1층 액세서리 코너에서 예쁜 헤어밴드를 발견했다.
두께는 1센티 정도로 두껍지 않았지만 바깥쪽은 연보라색 실크 재질이었고 한편에 브랜드 로고가 작은 금장으로 박혀있었다.
안쪽에는 짙은 보라색 스웨이드가 덧대져 있고 브랜드 로고가 음각으로 새겨진 심플한 헤어밴드였다.
하지만 가격은 그다지 심플하지 않았다.
내가 오랫동안 보고 있으니까 친구들이 한번 해보라고 응원(?)을 해주어서 착용을 해 보았는데, 더 마음에 들었다.
내가 망설이자 친구들이 수능도 끝났는데 이 정도 사도 되지 않냐, 사서 매일 하고 다니면 뽕을 뽑는 거다, 하고 또다시 응원을 해주어서 지갑에 있는 모든 현금을 털어서 헤어밴드를 샀다.
그 헤어밴드를 한동안 정말 열심히 하고 다녔다.
함께 동봉된 품질보증서에 '액세서리의 특성상 파손 시 A/S가 어렵습니다.'같은 문구가 있어서 매번 처음 샀던 케이스에 고이 보관했다.
그런데 어느 날, 동아리 언니가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서 '머리띠 할 나이는 아니지 않니?'라고 웃으며 말을 해서 멋쩍었다.
그 뒤로 헤어밴드를 하려고 할 때마다 어쩐지 그 말이 떠올라서 점점 안 하게 되었다.
그런데 삼십 대 중반에 양갈래 머리를 하고 나니, 이십 대 초반에는 헤어밴드 열개를 하고 다녀도 됐었겠는데, 싶었다.
무엇을 하기에 딱 좋은 나이 같은 것은 없다.
내가 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나이가, 그것을 하기 좋은 나이다.
그때그때 하고 싶은 것을 실천하며 살기만 해도 인생은 짧다.
중요하지 않은 사람의 말까지 검토해줄 시간이 없다.
왜 남은 시간이 길지 않을 수도 있을 때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될까.
다음번에는 핑크색으로 염색을 하고 싶다.
우리 딸이 좋아하는 시크릿쥬쥬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