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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레스트 Oct 23. 2024

번아웃, 포기할 결심

제9장, 세컨 비자를 포기하고 시드니로 돌아간 이유

내가 지쳤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엄마의 도움 덕분이었다. 당시 나는 회의감을 느끼면서도 이것을 왜 느끼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통 알 수 없었다. 길을 잃었다고 생각될 때마다 찾게 되는 사람은 늘 엄마였고, 이번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엄마와 전화가 연결되고 나서 내 말이 끝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엄마는 내 이야기가 끝나고 상황 파악이 다 끝났다는 듯 명쾌한 말투로 내게 말했다.


“너 지금 지친 거야.”


지쳤다고? 내가? 내가 지금••• 지친 거구나.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건, 더 이상의 노력을 할 힘이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이었구나. 세컨 비자를 따러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시드니에서 서비스업에서 두 개의 일을 병행하며 열심히 일했다. 그렇게 결국 호주가 좋아졌고, 서비스업에서의 근무를 통한 비자 연장을 위해 케언즈로 떠났다. 그러나 상황은 내 예상과 많이 달랐고, 결국 농공장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곧바로 치킨 공장에서 일하게 됐지만 일이 나와 맞지 않는다는 변수가 생겼고, 적응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아닌 것은 아니라는 교훈을 얻고 그곳을 떠나게 되었다.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가장 일하고 싶었던 농장에 취직하게 되어 마침내 바라던 일상을 쟁취했다. 하지만 3주라는 짧은 시간 뒤에 이번에는 일이 없다며 당일 해고를 당했다.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매 순간 최선을 다했지만 일은 계속해서 어그러졌다. 더는 노력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일어나려는 오뚝이 근성을 타고났기에 나는 내가 이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앞으로는 세컨 비자를 취득하는 데에 최선을 다하고 싶지 않았다. 따라서 상황이 흘러가는 대로 움직일 계획이었다. 그 생각을 뒷받침해 주었던 것은 이번에도 엄마의 조언이었다.


“회의감이 온다는 건 지쳤을 때 나오는 증상이야. 뭘 하는데 계속 어그러지면 그렇게 돼. 그땐 지친다는 걸 모르고 회의감부터 느껴. ‘과연 내가 잘하고 있는 건가? 끝까지 손을 떼지 말아야 하는 건가?’ 하는 의문감이 들잖아? 그때가 지쳤을 때라는 거야. 물음표를 가질 때. 근데 그때가 바로 인생의 전환점이야. 그때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길이 달라지는데, 크게 고민할 필요 없어. 일이 계속 어그러질 땐 애쓴다고 해도 안 돼. 고민해 봤자 답도 안 나와. 그러니까 그럴 땐 그냥 손을 놓고 일이 흘러가는 방향을 지켜봐. 그쪽에서 손짓하면 가고 안 하면 멈추면 돼. 그동안 다른 생각을 하면서 그것에 대한 답을 기다려. 더 가야 할 것인가, 멈춰야 할 것인가. 좀 기다려도 답이 오지 않으면 떠나면 돼. 여기까지 온 게 아쉽긴 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것과 인연이 아닌가 보다 하고 돌아서야 해.”


이즈음 엄마만큼 정신적으로 큰 도움을 준 것은 김하나 작가님과 황선우 작가님이 진행하시는 팟캐스트 <여자 둘이 토크하고 있습니다(여둘톡)>였다. 작가님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 상황을 재편집해서 바라보기 시작했다. 첫째로, 32화 <부자로 사는 법>을 들으며 다른 이들의 삶과 그들이 갖는 기회를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내’가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대단한지를 더욱 인지하며 살아야겠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지금처럼 비자 만료까지 3개월 앞둔 상황에서 한순간에 실업자가 되어 버렸지만, 내가 혼자 호주로 떠나왔고 그 과정에서 나만이 겪을 수 있는 경험들을 했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그러면서 통찰력을 키워 나갔고 다방면적으로의 성장도 이루어 냈다는 것도. 또한 호주의 대도시, 소도시, 그리고 시골로까지 옮겨 다니며 다양한 곳에서의 삶을 경험했고 더 이상 장 보는 데 시간을 많이 들이지 않고 먹고 싶은 것도 맛있게 만들 수 있게 됐다. 나는 이곳에 오기 위해 체력을 길렀고, 돈을 벌었으며, 영어 실력을 키웠다. 이곳에 오고 나서도 ‘스스로 해 낸다’를 나에게 수없이 증명해 왔다. 난 바라는 게 있으면 결국 해 내는 사람이었다. 세컨 비자의 경우 시간을 들여도 상황이 좀처럼 괜찮게 흘러가지 않았지만 만약 더 운이 따라 주었더라면, 차가 있어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며 일자리를 알아볼 수 있었더라면 지금의 상황은 분명히 금방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현재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그 최선에 걸맞은 결과를 이끌어 내 온 것이다. 따라서 행복할 이유는 여전히 넘쳐 흘렀다.


둘째로, 하나 작가님의 쿠바 여행 에피소드를 들으면서 내 현 상황까지도 좋게 받아들여졌다. 작가님은 쿠바로 여행 간 첫날 환전 사기를 당해 여행 경비의 절반을 날리고 여권도 잃어 버렸다고 했다. 처음에는 본인 스스로가 매우 원망스러웠지만 앞으로의 여행 동안 계속해서 자책할 경우 자신의 일생일대의 여행을 망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에 그 돈은 애초에 없었던 것이고, 그 절반의 돈만 가지고 왔다고 생각하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그렇게 쿠바 여행은 마지막 날까지 최고의 여행으로 남았었다고. 작가님은 ‘마음 작용’에 대해 언급하며 우리에게 어떠한 손해가 발생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손해가 아닌 것으로 복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한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이 생각하게 됐다.


나는 애초에 귤 농장에서 3주밖에 일하지 못할 운명이었다. 슈퍼바이저들은 그 사실을 알고 나를 고용했을 것이다. 그 기간만큼이라도 일하게 된 덕분에 돈을 적잖이 벌었고 그토록 원했던 일상 루틴 체화에 성공했다. 또한 치킨 공장에서 잘림으로써 농장에서까지 일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매우 다양한 환경에서 근무한 사람이 되었다. 육체 노동을 시작하면서 나의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나에 대해 깊이 알아가는 시간도 오래 가질 수 있었다. 그러니, 이제는 힘 좀 빼도 괜찮다고. 여기까지 충분히 잘 왔으니까.


실직한 지 이틀째, 나는 홀로 생일을 맞이하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인 닭볶음탕을 요리해서 나에게 선물했다. 처음으로 요리해 보는 음식이라 괜찮을까 싶었지만 기대 이상으로 성공적이었다. 이후로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동네 이곳저곳을 누비며 러닝을 했고, 팟캐스트를 듣기도 하며 자기 전에는 책을 읽었다. 수시로 마음이 불편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내겐 시간이 지나면 곧 해결될 일만 있을 뿐이었다. 그 사실을 여러 번 곱씹으며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쯤 나는 I로부터 회답을 받았었는데, 시드니 근교 농장에서 일하고 있는 지인에게 나를 소개해 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어차피 세컨 비자 따는 대로 시드니로 돌아가 귀국할 때까지 친구들과 좋은 시간을 보낼 계획이었기에 시드니로 넘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고 그가 자신의 보스로부터 마리바에 있는 농장에서 내가 일해도 된다는 답을 받았다고 했다. 그곳에서도 역시 출퇴근 차량이 제공될 예정이었고 이사하지 않고 바로 일을 재개하는 것이 훨씬 나은 선택지였기에 그의 말을 믿고 기다렸다. 그런데 그가 내게 전달한 연락처의 주인은 그의 보스가 아닌 다른 농장에서 일하는 매니저였다. 지금에서 돌이켜보면 그가 정말 매니저였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는 내게 농장의 정보만 알려 줘 놓고 이후로 그 어떤 연락에도 답하지 않았고 당연하게도 나를 자신의 일터로 데려가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또 속은 것이었다. I로부터.


이틀 후 마리바 농장으로 출근하면 된다던 I의 친구는 출근 전날에 하루 종일 연락 불통이었고 그날 밤 나는 확신했다. I를 포함해 그와 연관된 사람들에게서는 그 어떤 것도 얻어낼 수 없다는 것을. 연락하려고 해 봤자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이제 더 이상 내게 일자리를 연계해 줄 사람도 없었고 그렇다고 겨울에 접어들어 이미 시즌 거의 다 끝난 지역들에 가서 없는 가능성에 매달리고 싶지도 않았으며 시급을 제대로 쳐주지 않기로 유명한 한인 농장에는 더더욱 갈 생각이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세컨잡(세컨비자를 위한 일)을 포기하기로 결심하고 결국 4개월을 끝으로 세컨 비자를 좇는 여정을 마무리했다.


누군가는 그럴 것이다. 퍼스트 비자 만료되기까지 약 3개월이라는 충분한 시간이 남았고 이미 세컨 비자 일수도 꽤 채워 뒀으면 좀 기다렸다가 일 구하는 대로 바로 일하면 세컨 비자 딸 수 있는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냐고. 나는 호주에 온 뒤로 쉬지 않고 일을 구하거나, 일을 해 왔다. 그것의 목적은 생활 영위이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세컨 비자를 따기 위한 빌드업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무수한 일을 거쳐 왔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계획이 어그러지는 것을 보니까 이 길은 내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호주에 진정 다시 오고 싶다면 반드시 길은 열릴 거라고, 워홀 비자가 아니어도 분명 다른 방법이 있을 거라고도. 조금의 미련도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꽤나 후련하게 세컨 비자의 손을 놓았다. 더 이상 너에게 끌려다니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며.


여행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기도 하고 돈을 쓰는 것도 썩 좋아하지 않아서 어떻게 하면 최대한 절약하면서 호주에 남아 있을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때 떠오른 것이 펫시팅/하우스시팅이었다. 호주에 오기 전에 이미 멤버십까지 가입해 두었던 바로 그 일. 펫시팅/하우스시팅은 집주인이 개인 일정으로 단기간 혹은 장기간 동안 집을 비울 때 그들의 집에 머물면서 그들을 대신해 그들의 반려동물을 돌보는 일이다. 나는 곧바로 내가 가입해 두었던 사이트에 들어가 시드니가 있는 NSW주에서 사람을 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보냈고, 다음 날 바로 두 사람으로부터 답장이 왔다. 내가 그 일을 맡아 줬으면 좋겠다는 답장이.


이후의 일들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중 더 가고 싶은 곳과 전화 인터뷰, 화상 인터뷰를 먼저 보고 그들의 선택을 받은 뒤 바로 시드니행 비행기 표를 알아봤다. 그들은 다음 주 수요일 오전에 여행을 떠날 예정이었기에 화요일 오후에 시드니에 도착하는 항공편으로 예매했다. 이후 케언즈, 마리바에서 사귄 소중한 인연들과 함께할 시간을 마련했다. 농장에서 만난 지인과는 마리바에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놀았고, 하우스메이트들에게는 새우 볼로네제 파스타를 만들어 선물로 주었다. 케언즈에서 살았던 집의 노부부에게는 쇼핑센터에서 구매한 각자의 기호에 맞는 선물을 전달한 뒤 그들의 집에서 오랜만에 점심 식사를 같이했다. 그 집에서 친하게 지냈던 하우스메이트는 그녀도 이후에 마리바로 넘어 왔었기 때문에 우리 집에서 그녀를 위해 만든 김치볶음밥을 같이 먹었고 오후에는 그녀의 집에 가서 놀았다. 그들과 함께한 시간은 짧았지만 그들이 내 마음에 남기고 간 사랑은 결코 작지 않았기에 한 명 한 명과 잘 헤어지기 위해 노력했다. 다시 보게 되는 날까지 씩씩하게 잘 견딜 수 있도록.


그들과의 이별은 내가 사랑하는 도시로의 귀환을 의미하기도 했으므로 사실 슬픔보다는 기쁨이 더 컸다. 6월 25일 화요일, 예정대로 떠나는 날이 찾아왔고 나는 마지막까지 집주인 분의 도움을 받으며 버스정류장까지 수월하게 도착했다. 버스는 나를 마리바에서 케언즈 공항으로 데려다 놓았고, 이제는 매우 능숙하게 백드랍을 마치고 로비에서 어제 저녁에 만들어 놓은 매콤 아보카도 토스트를 꺼내 아점으로 먹었다. 비행기에 오르기 전 나와 동행해 줄 목걸이를 하나 구매했다. 이전부터 내 마음에 드는 목걸이를 사고 싶었는데 마침 면세점에서 마음에 드는 펜던트를 발견한 결과였다. 보딩 시간에 맞춰 비행기에 올랐고, 그렇게 벌써 세 번째, 나 홀로 비행을 맞이했다.


“Good morning, ladies and gentlemen. This is your captain speaking. Welcome aboard this flight from Cairns to Sydney. ••• We’ll be cruising at an altitude of 35,000 feet, and the weather in Sydney is looking clear with a temperature of 17 degrees Celsius. Sit back, relax, and enjoy the flight.(안녕하십니까, 승객 여러분. 기장입니다. 케언즈에서 시드니로 가는 항공편에 탑승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 오늘 저희는 35,000피트의 고도로 비행할 예정이며, 시드니의 날씨는 맑고 기온은 섭씨 17도입니다. 편안하게 앉아 비행을 즐기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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