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치킨 공장과 귤 농장에서 두 번의 실직을 겪다
치킨 공장에 들어갔을 때 처음으로 든 감상은 모두가 공장의 부품같이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모두가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자세로 닭의 살을 분리하고 있었다. 물론 구역별로 하는 일은 조금씩 달랐지만 시장에서 판매되는 제품을 만든다는 개념은 그곳에 있는 모두에게 적용됐다. 그러니까 나는, 그들 사이로 완전히 섞여 들어가기 전까지 그들에게서 기계화, 단일화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공포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기이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곳에서 ‘내’가 본격적으로 일하기 전까지는.
첫째 날, 오전 7시 45분까지 휴게실에 집합하고 교육 받은 대로 일회용 근무복을 입고 도구들을 챙겨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생닭의 비릿한 냄새가 역겹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견딜 만했다. 초보자들을 위한 테이블이 따로 마련돼 있어 그곳에서 대만 친구들과 함께 슈퍼바이저를 기다렸다. 우리는 그날 창고로 들어가 닭이 담긴 대형 플라스틱 상자들을 한데에 옮겨 담아 - 보통 6~7개의 상자를 한 번에 가져가도록 권장됐다 - 제자리로 가져가는 법, 생닭 날개를 요령껏 3등분으로 자르는 법, 자른 것들을 상자당 20KG씩 모아서 무게를 체크한 다음 보관 공간에 가져다 두는 법을 배웠다. 나는 그날 상체가 아작나는 경험을 했고, 하체엔 온갖 멍이 들었다.
근무한 지 3일째 되는 날, 손목이 완전히 망가진 느낌이 들었고 힘 주는 것마저 고통스러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살아야 된다는 생각에 손목 스트레칭을 부지런히 하고 잔 덕분에 근무 4일차에는 그나마 괜찮았다. 다행이게도 4일차부터 새로운 일을 배우게 됐는데 5일차에 바로 원래 하던 일로 돌아갔다. 내가 금방 못 따라하는 게 여간 답답한 게 아니었는지 슈퍼바이저가 바로 날 니블nibble* 테이블로 돌려보낸 탓이었다. 결국 이틀 연속 생닭 날개 자르는 일만 하다가 그 다음 주 월요일이 되어서야 다시 새로운 작업에 돌입할 수 있었다.
*닭날개와 닭봉
요리를 해 본 경험이 많지 않았던 게 문제였을까? 스킬을 요하는 일이어서 요령을 빨리 익히는 게 관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감 잡는 게 어려웠다. 분명 점점 나아지고 있는 느낌은 들었지만 슈퍼바이저들이 보기에는 영 탐탁치 않았는지 그들은 내게 그런 식으로 하면 못 가르쳐 준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며칠이 지나고, 아침에 일어났는데 손의 뼈마디가 너무 아파서 급하게 유튜브에 있는 스트레칭 영상을 틀어 따라했다가 더 큰 고통을 느끼고는 진지하게 일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마침 그날은 오후에 출근하는 날이었는데, 슈퍼바이저가 면담 요청을 하더니 다음 주 화요일까지 자세를 고쳐 오지 않으면 나를 해고할 것이라고 했다.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왕 기회가 온 거 끝까지 최선을 다해 보고 싶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그 다음 주 수요일은 마지막 근무일이 되었고, 이에 대해 나는 놀라울 정도로 아무렇지 않았다.
확실히 적응해 나가고 있었지만 몸이 아파서 눈물이 나는 경험은 그때가 처음이었을 만큼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연속이었기에 공장 일을 후련하게 보내 줬다.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하기 전부터 근처 농장으로 옮기는 것을 고려한 적이 있었어서 앞으로의 할 일은 명확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근처에 아는 일자리가 있냐고 물어보고, 페이스북 워홀러&지역 페이지와 한인 오픈채팅방, 그 외 다양한 사이트에서 관련 정보들을 찾아보는 것.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해고당할 줄 모르고 일하는 내내 머릿속으로 고안해 낸 나만의 레시피로 저녁을 만들어 먹는 것이었기에 집에 돌아오자마자 샤워를 마치고 빠르게 요리사로서의 임무를 수행했다. 그렇게 나는 그날, 연고도 없는 깡시골에서 갑작스레 직업을 잃어 버렸음에도 그럭저럭 괜찮은 밤을 보냈다.
모든 불운이 거기서 끝났으면 아마 정말 괜찮았을 것이다. 아무리 유튜브, 블로그 등에 많은 사람들의 세컨 비자 취득 성공 사례가 올라와 있대도 모두가 그것을 수월하게 취득한 것은 아닐 테니까. 그러나 나의 경우, 치킨 공장은 단지 화려한 실패에 대한 빌드업의 시작에 불과했다.
치킨 공장에서 잘린 다음 날부터 이곳저곳을 알아보았고 실직 이틀 차에 인도네시아 사람으로부터 블루베리 농장 쪽으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는 해당 농장에서 일하는 슈퍼바이저로, 최근에 아보카도 수확을 마치고 새롭게 블루베리 팀을 꾸리고 있었다. 치킨 공장에서 일한 경력과 내가 가진 일에 대한 가치관을 좋게 평가하고는 다음 주 월요일에 만나서 서류 작성을 하자고 했다. 그렇게 당일에 케언즈까지 나가서 그를 만났고 서류를 작성했으며, 빠르면 내일 늦으면 수요일부터 일이 시작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다음 날 바로 다음 주 월요일이나 화요일에 일하게 될 것 같다고 했다. 농장 일이 기후 변화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것을 알아서 그때까지는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일요일에 다시 답장을 주겠다던 그는 그 다음 주 수요일 오후가 되어서야 연락을 주었고, 대뜸 특정 번호를 넘겨 주며 그에게 전화하라는 말을 남겼다.
정리하자면 상황은 이런 거였다. 좀처럼 좋아지지 않는 날씨 때문에 일이 언제 시작될지 본인도 알지 못하는데,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기는커녕 며칠 단위로 가능성을 계속 남겨 둔 채로 연락을 피하다가 시작될 기미가 도무지 안 보이니까 결국 다른 농장에서 일하는 자신의 지인의 번호를 넘겨 준 것이었다. 신뢰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 추천한 사람답게 그 역시 다른 사람의 번호를 넘겼고 그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이라곤 에이전시에 찾아가서 정보를 넘기면 근처 농장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뿐이었다.
그즈음 나는 그와 함께 일하게 되지 못할 것 같다고 반쯤 확신한 상태였다. 그래서 농공장을 오가는 기사 일을 하는 하우스메이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전부터 일해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농장에 지인이 있다고 한 그는 지인의 번호를 나에게 바로 넘겨 주었다. 우연찮게도 그 지인은 한국인이었고 그 한 번의 통화에서 나는 그곳에서 일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보았다. 하여 그가 연락해 보라고 했던 총괄 매니저에게 문자와 전화를 번갈아가며 연락을 시도했지만 그는 결코 답장하지 않았고, 결국 한인 매니저에게 다시 연락했다. 평일에도 그와 연락이 안 되는데 혹시 대신 컨택해 줄 수 있냐고.
이때쯤 인도네시아 매니저가 - 앞으로는 I로 약칭하겠다 - 직접 다른 농장주에게 나를 소개해 주겠다며 월요일에 만나자고 했었다. 그러나 그는 월요일 오후가 되어서야 본인이 늦게 도착할 것 같으니 내일 보자고 했고, 그 다음 날이었던 화요일에는 당신의 도움이 필요 없어졌다고 할 때까지 감감무소식이었다. 더 이상 그와 함께할 이유가 없어진 데에는 정말 운이 좋게도 한국인 매니저의 도움이 컸다. 그때 나는 I가 오전 내리 연락을 받지 않는 것을 보고 더는 기다릴 필요 없겠다는 생각에 그간 제일 갖고 싶었던 웍을 사러 K마트로 향하던 길이었다. 그러던 중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고, 그 전화는 내일부터 귤 농장으로 출근하면 된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한인 매니저로부터 걸려 온 것이었다. 나는 갑작스레 찾아온 행운, 그리하여 마침내 해결된 실직 문제에 얼떨떨했고, 얼마 안 가 행복을 만끽했다. 당장 내일부터 다시 세컨 비자 일수를 채울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원래 들르려고 했던 K마트에서 웍 외에도 농장 일에 필요한 물건들을 구입했고 집으로 돌아가 다음 날 점심으로 먹을 도시락을 준비했다. 그렇게 모든 것이 탄탄대로일 것만 같았다. 해당 농장에 취직하고 나서 3주 동안은 실로 그러했다. 규모가 큰 기업답게 직원들에게 출퇴근 버스를 제공했고 덕분에 나는 이사를 하지 않고도, 무려 차가 없이도 오피스로 출퇴근하는 데에 문제가 없었다. 근무 시간은 오전 7시부터 오후 5시까지였으나 그 사이에 오피스에서 농장으로 이동하는 시간과 15분의 쉬는 시간 두 번, 30분의 점심 시간도 포함되어 있어 실제로 일하는 시간은 보통 약 8시간이었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고정 쉬프트가 주어졌고 가끔 금요일에도 일이 있었는데 그날은 일을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날이었다.
이렇게 편안한 환경에서 안정적인 스케줄이 주어진 만큼 나는 모든 시간을 매우 알차게 보내려고 노력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스트레칭으로 하루를 시작했고, 이후에 바로 영어 칼럼을 읽고 블로그에 정리 노트를 업로드했으며, 저녁에는 IT 공부를 하거나 영어 릴스에 나오는 대사를 통암기한 뒤 스트레칭하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쉬는 날에는 평일 루틴을 지키는 것뿐만 아니라 야외 러닝을 하러 꼭 한 번씩 밖에 나갔고 이따금 동네 수영장에서 수영도 했다. 잠시 멈추었던 독서도 재개하고 직접 요리해 끼니를 챙겨 먹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를 잘 돌본다는 것이 얼마나 삶을 만족스럽게 만드는지 깨닫게 만드는 하루하루였고, 그 생활은 영원토록 끝나지 않을 것처럼 너무나도 평화로이 지속되었다.
물론 농장에서 일하는 것도 힘들기는 매한가지였으나, 치킨 공장에 비하면 일 강도가 매우 낮은 편이었다. 다만 농장 일 역시 처음 하는 것이다 보니 변수가 있었다. 당시 시즌의 귤 농장 팀은 주로 나무에서 귤을 따다 바닥에 버리거나 컨테이너에 담는 작업, 그리고 아보카도 농장에 산만하게 흩뜨려진 나뭇가지들을 도로로 한데 끌어모으는 작업을 했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허리를 90도 이상으로 꺾어 가며 일했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서 허리뼈 부근에서 엄청난 고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슈퍼바이저도 내가 일하는 모습을 보고는 그 자세는 허리에 좋지 않다며 어떤 자세로 일해야 하는지 알려 주기도 했었는데, 그렇게까지 심각한 것이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제서야 나는 허리 건강이 얼마나 삶의 질을 좌지우지하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또 다시 스트레칭의 도움을 받아야만 삶을 영위하는 것이 가능한 상태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 무렵 나는 손목에 두드러기가 잔뜩 올라왔었는데, 동료들의 말로는 아보카도 나무에 뿌려진 화학 물질의 성분 탓일 확률이 높다고 했다. 다행히도 집주인이 알레르기 면역 치료 용액을 가지고 있었어서 그것의 도움으로 천천히 회복해 갔다. 허리고 손목이고 성치 않은 곳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이번에는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내실을 다지는 데 굉장히 도움이 되는 시간이었고, 정신적으로도 매우 치유되는 시간이었다. - 내리쬐는 햇빛을 받으며 과일이 달린 나무 아래서 모두가 조용히 수확에만 집중한다. 가지에서 꽃으로 피어나 열매로 자란 귤들을 따면서, 식탁에 올라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재료들이 기나긴 성장의 여정을 겪는지 생각하며 음식의 소중함을 가슴 깊이 느낀다. 따스한 고독을 하루 종일 즐기고 나면 밤이 찾아오고, 밤에는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며 수많은 것들의 노력 끝에 만들어진 나의 소중한 일상에 대해 감사함을 느낀다. 분명 돈을 벌기 위해, 세컨 비자를 따기 위해 그곳에서 일시적으로 일하는 것이었지만 그때의 일상은 단순히 그런 의미로써만 작용하는 것이 아님을 당시에도 알았다. 그렇기에 그 일상이 최대한 길게 이어지기를 바랐다.
그러나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이루어질 순 없는 모양이었다. 3주의 시간이 흐르고, 생일을 이틀 남겨 두고 있던 날 나는, 아니 우리는 퇴근하는 자리에서 모두 당일 해고를 당했다. 다음 주부터는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고, 시즌이 끝나서 더 이상의 일이 없다며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했다. 이렇게 생각지도 못하게 해고를 당한 적은 처음이었지만 당일 해고의 경험이 바로 약 두 달 전에 있었고 이후의 할 일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크게 당황하지는 않았다. 내가 직시한 것은 일이 이미 벌어졌다는 사실과 해당 기업에 더 이상의 일자리가 없다는 것, 이 두 가지뿐이었고 따라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전처럼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이들에게 현 상황을 알리고 다양한 사이트에서 정보를 찾아보는 것밖에 없었다.
마지막 퇴근길에서 내가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모든 이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집에 도착한 뒤에는 예전에 갈 뻔했던 워킹호스텔부터 이제 막 뜨는 곳까지 여러 곳의 일자리 상태를 알아보며 시간을 보냈고, 그 다음 날 아침에는 일어나자마자 이력서를 수정했다. 이후 다양한 곳에 지원하며 이번에는 지역을 옮겨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회의감이 들었다. 호주에 온 이후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회의감이 든 적이 없었다. 그런데 할 수 있는 데까지 다 했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갑자기 힘이 쭉 빠지면서 지금 내가 무얼 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피어올랐다. 더 이상 그 무엇도 하고 싶지 않았고, 그 어떤 노력도 들이고 싶지 않았다.
계속해서 일이 이렇게 되는 것에 대해서는 안타깝긴 했어도 그리 절망적이진 않았다. 앞으로 수많은 좌절을 경험하게 될 텐데 그때마다 무너지고 싶진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라는 것을 그때의 나는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