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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레스트 Oct 04. 2024

내가 호주로 떠나야만 했던 이유

제0장, 고국을 떠나는 이방인은 지금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지금 당장 일어나는 일처럼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되는 순간들이 있다. 이를테면, 대학 시절 발표 도중 학우들 앞에서 난데없이 눈물을 터뜨린 사건이라든지, 아니면 내 감정에 못 이겨 결국 좋아해서는 안 되는 사람에게 절절한 사랑 고백을 건넨 순간 같은, 다소 창피스럽고 뺨이 화끈거리는 일들. 하지만 그런 류의 기억들은 이불 몇 번 차고 나면 ‘그래,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하며 넘길 수 있다. 다시 말해, 지금의 나를 그때 그 시절의 감정에 그리 오래 묶어 두지 못하는 기억들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회상하는 것만으로 나를 심연으로 끌어들이는 기억들은 무엇이 있을까. 사람마다 그 기억의 범주를 이루는 이야기는 제각기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나의 경우 대개는 트라우마와 관련되어 있다. 가족사로 보자면 엄마와 아빠, 엄마와 나, 동생과 나, 그리고 친척들과 나 사이에 있었던 일들일 것이고, 개인사로 보자면 자그마치 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지금 이 모든 이야기의 출발점이 된, 그때 그 시절로.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눈을 감으면 손에 잡힐 것처럼 명확하게 그려지는 풍경들이 있다. 이를테면, 가장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내 책상에 놓여 있던 각종 학용품을 바닥에 떨어트린 일이라든지, 내가 신고 온 짝짝이 양말을 보고 저편에서 친구들이 키득거리며 조롱하던 순간 같은, 여전히 마음 한편을 아주 세게 짓누르는 일들. 떠올리고자 하면 아득한 곳에서부터 쏟아져 내려 내 머리를 울리는, 그때 그 시절 나를 향한 폭언과 비웃음들. 떠올린다 한들 그때 받은 상처는 여전히 아물지 않았음만 확인하는 꼴이었기에 웬만해서는 다시 기억하려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그 시절도 결국엔 끝이 났고, 이후로 나는 퍽 잘 살아 왔으니까.


다만 그때 생긴 트라우마는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기에, 그 시절이 끝나도 나의 원래 모습으로 회복되기까지 정말 긴 시간이 걸렸다. 어떤 부분에선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지금은 아무렇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이 글을 작성하기 위해 지난 나날의 모든 아픔을 떠올리는 동안 가슴께가 욱신거리는 것을 수차례 느껴야 했기 때문이다. 단지 과거와 달리 현재는 나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줄 알게 되었고, 그렇기에 나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을 뿐이다.


“미친년.”


집단 따돌림의 시작을 알리는 발언이었다. 그때 받았던 충격은 여전히 강렬하게 남아 있고, 내가 당시에 고개를 돌려 그 단어를 내뱉은 아이의 얼굴을 쳐다보았는지, 아니면 내가 들고 있던 종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확실한 건, 나는 그 자리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같은 반 아이들이 나를 싫어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어떤 일 처리가 불공정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생각을 품고 있다가 그것을 공개적인 장소에서 미성숙한 방식으로 내보인 게 화근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친하게 지내던 학급 내 거의 모든 친구들에게 배척당했고, 수개월 동안 수천 번의 치욕을 경험해야만 했다. 나름 가깝다고 생각했던 친구들이 등돌리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졌고, 내 말이 무시당하거나 나의 얼굴, 성적이 폄하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잘못한 것이 없어도 먼저 사과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고 쉬는 시간과 체육 시간은 견딜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시간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던 나는 어느새 투명 인간이 되었고, 말수가 적어졌으며, 서서히, 그러나 아주 세밀하게 망가져 갔다.


따돌림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으레 다루는 신체적 폭력이 없어도, 언어 폭력과 사회적 폭력에서 기인되는 정신적 폭력만으로도 충분히, 정신을 말살할 수 있는 것. 그게 따돌림이다. 우리 반을 제외한 모든 학급에 친한 친구들이 있었지만, 나의 이야기를 듣고도 따돌림 주동자들과 친하게 지내는 그들을 보며 나는 더 이상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줄 수 없었다. 그들이 잘못됐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위로가 필요할 때 적당한 위로를 건네주는 것만이 그들의 최선이었으리라. 나 역시 그보다 더 몇 년 전, 누군가가 괴롭힘을 당하고 있을 때 그 아이와 적당히 어울려 주면서 중요한 순간에는 방관하기를 선택했었으니까. 나도 학교 폭력의 그늘에서 떳떳하지만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완전한 피해자라고 절대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지금 이 기억을 갖고 돌아갈 수 있다면, 그때 그 아이의 옆에 서 있을 것을 매우 확신한다. 어떻게 확신하냐고 묻는다면, 이제는 더 이상 내 앞에서 누군가가 곤란에 처해 있는 걸 결코 모른 체할 수 없어졌기 때문이다. 여전히 입 밖으로 소리를 내기까지, 아니 그러고 나서도 계속 심장이 벌렁거리지만, 적어도 하고 싶은 말은 똑바로 할 수 있게 되었다. 상대가 누가 되었든, 잘못된 건 잘못되었다고, 적당히 하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집단의 미움을 산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는지라 오랜 시간이 지나도 남의 눈치를 보는 습관은 쉽사리 고쳐지지 않았다.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표정을 살폈고, 나를 향한 시선이 조금이라도 싸늘해 보이면 심장이 쿵 내려앉고 혹시 내가 잘못한 거라도 있나 하며 다급히 과거를 되짚어 보다 내가 따돌림 당했었던 것을 알게 된 건 아닐까 하며 불안에 떨었다. 언제나 무리에 잘 섞여 들었던 과거는 마치 전생이라도 된 듯, 그 이후로 호주를 떠나기 전까지 단체 모임에 끼는 것을 늘 어려워했다. 아무리 친한 친구들이어도 여럿이서 보는 것에 결코 익숙해지지 않았다. 내게 향하던 애정의 눈길이 경멸로 변하는 것을 여러 번 봐온 터라 더는 쉽게 마음이 열리지 않았다. 또한 타인이 내게 주는 상처보다 내가 타인에게 주는 상처에 더 크게 마음 다쳤고, 소중한 인연에게 실수했다는 생각은 매번 그 인연으로부터 멀어지는 계기를 만들었다. 지금에서 돌이켜보면 애초에 나를 소중히 여기지 않은 상대의 잘못도 있었는데 너무 내 탓으로만 치부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를 아는 이가 거의 없는 고등학교에 우연히 진학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학교 전체의 학구열이 대단한 분위기 덕분에 따돌림을 당하던 시절을 버티게 해 준 역사뿐만 아니라 다른 과목들에도 열중할 수 있었고, 국어와 역사를 제하면 늘 하위권이던 나는 어느 시점부터 중상위권에 머물렀다. 학교 교육 외에도 학교에서 진행하는 다양한 프로그램 및 대회와 동아리에 열심히 참여해 나만의 이야기를 착실히 만들어 갔고, 학교를 졸업할 때쯤엔 나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충분했고, 자랑스러운 친구들도 많이 생겼다. 그러니까, 소외되고 움츠러드는 것이 일상이었던 열다섯 살의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아마 이야기가 거기서 끝이 났다면 이 글은 쓰이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 그때의 내가 내 안에 죽어 없어졌다면, 그 시절을 회상할 때마다 우는 일도 없었을 테고, 나를 탓하며 나를 또 상처 입게 하는 일도 없었을 테다. 그저 인생을 살아가면서 잠깐 일어났던 가벼운 해프닝 정도로 취급했겠지.


그런데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이었을까? 상처가 정말 너무 크게 나서, 아무르기를 가만히 기다리지 못하고 고통을 지우기 위해 자발적으로 다른 곳에 생채기를 내게 하는데 이걸 어찌 멈출 수 있었단 말인가? 불안과 두려움에 잠식되어 그 자체가 되어 버렸던 그 시절의 나를 대관절 어떻게 머릿속에서 지워 버릴 수 있단 말인가? 열다섯 살의 아이는 내게 없던 기억이 될 수 없다. 그건 평생에 걸쳐 성립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 한들 그때 고통에 몸부림치던 내가 만들어 낸 증오와 분노를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상을 잘 살아가다가도 그때가 불현듯이 떠오르면 내 안의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그것에 데이는 것은 매번 나였다. 통제 불가능의 영역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그것은 내 이성과 감정을 금방 장악했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정확히는 현재를 살아가기 위해, 이글거리는 분노를 잠재우려는 노력을 숱하게 해야 했다.


내가 호주행을 결심하게 된 데에도 그 영향이 미쳤다. 보통의 경우 해외 취업을 위한 사전의 해외 경험을 위해 호주로 워홀을 가게 됐었다고 사람들에게 설명하지만, 이 글은 온전히 당신과 나만을 위해 마련된 비밀스러운 자리니까. 내가 어떤 사실과 거짓을 뇌까리든 당신에게는 그저 잠시 스쳐 지나가는 한 사람의 얘기밖에는 되지 않을 터이다. 그러니 나는 내가 지금껏 내보였고 앞으로 내보일 그 어떤 진심 앞에서도 떳떳하다. 나는 지금에야 비로소, 나를 완전히 받아들이게 되었으니까. 이 말은, 앞으로 듣게 될 이야기로 하여금 차차 이해될 것이다.


곧 비행기에 올라탈 예정이다.

내 삶의 궤적을 함께 밟아 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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