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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은새 Nov 03. 2024

쓰고, 부드럽고, 따뜻한 라테처럼

241103

다정하고 잘 웃는 난 가족에게만큼은 그렇지 못하다. 성인이 되고 누나와는 많이 가까워졌지만, 여전히 어머니와 아버지는 어렵다.

근래 난 삶의 유한함을 자주 목격한다. 난 그 깨달음을 고스란히 내 삶에 투영시킨다. 그러면 세상은 더 이상 예전처럼 푸르거나 싱그럽지 않게 느껴진다. 난 요즘 깊게 팬 아버지의 뺨과 주름진 그의 목덜미를 보며 생각에 잠긴다.

나도 이런 내가 달갑지 않다. 언젠가부터 난 어떤 존재를 바라보면 그것의 끝을 생각하기 시작했고, 이 습관처럼 굳은 행위는 도무지 가시질 않고 날 괴롭힌다. 고백하자면 난 여전히 현재도 그렇고, 미래도 그럴 것이다. 이건 나의 피곤한 습관이고, 더 이상 생명이 주는 따뜻한 추억을 함부로 받지 않겠다는 방어기제이기도 하다.

저번 당직을 마치고 곧장 부산으로 갔다. 피곤하긴 했지만 올해의 바쁜 일정들도 끝났고, 언젠가부터 아버지의 주름살이 눈이 시큰거릴 정도로 보였던 탓이었다. 오랜만에 그와 목욕탕에 갔다. 체중계에 올라갔다 내려오며 한마디 했다. "또 살이 빠졌네." 당연히 등산을 많이 하시니 그렇지 않으냐고 얘기하던 과거의 내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없고, 오늘은 그저 아무 말 없이 함께 목욕탕으로 들어가 한참 동안 얼굴에 물을 맞았다. 세찬 물줄기 뒤로 아까 그 문장이 계속 귓전에 울려 퍼졌다.

목욕을 마치고 집으로 왔다. 본가의 내 방은 내가 방을 마지막으로 떠나왔던 그때로 거의 멈춰있다. 내가 썼던 의자, 책상, 침대, 이불이 그대로다. 나도 여전히 비슷한 것 같은데 집에선 낯선 기운이 맴돈다. 해진 이불처럼 닳은 어떤 얼굴이 보인다. 그의 얼굴이 내방 천장에 떠다닌다.

다음날 어머니 가게에 갔다. 아팠던 몸이 많이 호전된 후 어머니는 다시 일을 시작했다. 아버지와 난 한번 시작하면 끝을 보는 어머니의 성정을 알기에, 일을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 앞에선 '이전처럼 그렇게 열심히 일하지 않을 거다'라는 말이 아무 효력이 없음을 알기에, 극구 말려봤지만, 소용없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아버지는 어머니의 건강을 챙기는 것에 혈안이 됐다. 어머니께선 "너희 아빠는 내가 무거운 것만 들거나 조금만 먼 거리를 걷기라도 하면 큰일 난다"며 얘기했다. 난 배시시 웃는 어머니의 소녀 같은 웃음이 마냥 달갑지만은 않았다.

어머니 가게에 도착한 후 스피커를 설치했다. 가게가 좀 더 세련되었으면 하는 바람에 구입한 스피커였다. 스피커를 설치하고 예전에 사용했던 내 휴대전화를 이용해 음악을 재생시켜 보니 스피커에선 부드러운 음표가 흘러나왔다. "어머, 호텔에 온 것 같네." 어머니가 반색하며 얘기했다. 난 속으로 무척 행복했지만, 괜히 부끄러운 마음에 아무렇지 않은 척 스피커 설명을 계속했다. 이건 이렇게 켜고, 끌 때는 이렇게 끄면 된다며. 스피커 설치를 마무리하고 천장에 화재경보기를 달았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이것저것 시키는 일들을 마무리했다. 내가 하면 하루면 끝난 일들이 그들에게 닿으면 며칠이 걸리곤 한다. 몇 년 전엔 그들이 나의 보호자였지만 이젠 그 상황이 역전되었다. 이럴 때면 마치 내가 그들의 보호자가 된 것 같다.

가게 일을 돕고 난 뒤 카페에 갔다. 사실 어머니와 단둘이 데이트를 해볼까 하는 계획으로 그날 아침 집을 나왔다. 물론 나 혼자만의 계획이긴 했지만, 옷도 예쁘게 입었다. 내 의중을 알 리 없는 어머니는 카페 가는 길에 아버지께 전화했고, 밥을 먹는 중이었던 아버지는 밖으로 나와 합류한 뒤 다 함께 카페로 갔다. 애초에 내가 예상했던 그림과 달라서 조금 실망했지만, 다음에 다시 도전하면 된다고 위로하며 카페로 향했다. 예전에, 이 카페에 왔을 때 어머니가 사진을 찍었다. 커피가 예쁘다며. 커피가 예쁘다고 했다. 그 말이 한동안 마음을 시큰거리게 했다. 무심한 아들내미라 그 흔한 라테아트마저도 아름답게 보여 사진을 찍게 만든 것 같아서.

사실 나만의 '친해지길 바라' 작전은 처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몇 번의 시도마다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특히 아버지와 난 물과 기름 같은 사이였다. 몇 번의 스파크가 튀었다가 작년 여름, 감정의 골이 극에 달한 뒤 난 더 이상 당신에게 실망하지 않겠노라며 단단히 마음의 문을 걸어 잠갔다. 다시는 당신에게 마음을 주지도, 실망도 하지 않겠노라며. 그런데 다시 당신 앞에 마주 앉았다. 오늘은 함께 커피도 홀짝였다. 시간은 대가 없이 많은 것을 해결해 준다. 하얀 우유 거품이 내려가며 목젖이 울컥거렸다. 라테가 쓰다. 하지만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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