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비관주의자다. 이것의 근원을 찾으려 뒤돌아 발자국을 따라가 보니 고신대학교 병원 앞이었다. 아빠는 너만 보면 눈치가 보인다. 그러는 나도 이렇게 하루종일 병간호 하는 게 좋은 줄 알아요? 두 남자가 언성을 높인다. 오히려 다투지 않는 게 이상했다. 그해 여름은 우리 가족의 소중한 것을 앗아가고 무겁고 아픈 것만 건넸으니까. 까닭은 없었다. 그래서 화살을 돌렸다. 원인을 추궁할 무언가가 필요했고 분노할 대상을 찾았다. 안타깝게도 화살의 머리는 가장 소중한 대상의 심장을 향했다.
아버지는 당시 몸과 마음이 아팠다. 사고로 성치 못한 몸이었다. 회복이 되고 있었지만 더뎠다. 시간은 대가 없이 많은 부분을 치유해 주지만 언제가 마지막일지 얘기해주지 않는다. 아버지는 막막한 동공으로 달력을 응시했을 것이다. 나와 누나는 거동이 어려운 아버지를 간호하기 위해 서로 당직을 섰다. 닭장처럼 비좁은 6인실 간이침대에 몸을 누우면 두 다리가 비죽 튀어나왔다. 옆자리 아저씨의 코 고는 소리, 매일 새벽 간호사가 회진을 돌며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듣다 보면 아침이 왔다. 난 곤죽이 된 채로 눈을 비비며 일어나 세숫물을 가져오고, 아침 식사를 도왔다. 끼니마다 아버지의 밥상엔 잘게 썰린 붕장어가 올라왔다. 아나고라 불리는 붕장어가 뼈를 붙이는 데 탁월하다는 얘기를 들은 뒤로 어머니가 매일 누나와 내게 당부했던 반찬이었다. 난 그때 이후로 붕장어를 보면 코에서 시큼한 병원 소독약 냄새가 난다.
6시 이후 병원에 외래환자 발길이 끊기면 1층 정형외과엔 널찍한 공간이 생겼다. 하얀 백열등 아래 색 바랜 소파에 앉아 잠시 앉아 지친 몸을 뉘었다. 음료수 자판기 팬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그걸 베개 삼아 잠시 눈을 감곤 했다. 당시 마지막 학기였던 난 이곳에서 졸업논문을 썼는데, 노트북을 펼칠 때마다 억울하고 분해서 눈물이 났다. 왜 우리 가족에게 이런 일이 생긴 건지 묻다 지쳐 아버지에게 성을 냈다. 그러면 괄괄한 우리 아버지는 걸어오는 싸움을 피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차라리 그게 속 시원했다. 미안하다고 얘기했다면 내 가슴이 찢어졌을 것이다.
내 비관주의의 시작은 이 시점이었던 것 같다. 세상에 존재하는 희망을 차단하고 지독한 우울을 받아들였다. 그게 편했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으니까. 일종의 방어기제였던 셈이다. 당시 내게 무언가 나아질 거란 기대는 사치였고 닿기 힘든 목표였다. 갖고 있으면 뜨거워 손이 델 것 같았고, 들고 있으면 무거워 팔이 빠질 것 같았다. 마음이 연탄처럼 시커메지긴 했지만, 차라리 그게 편했다.
그러던 내가 요즘 계절의 변화를 느낀다. 마음속에 훈훈한 바람이 분다. 변화의 시작은 책과 음악, 그리고 사람이다. 이들이 딱딱하게 언 내 몸을 따스하게 적시면, 난 몸을 녹이고 기꺼이 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몸을 맡긴다. 중구난방인 모습이 우습지만, 나쁘지만은 않다. 요즘 난 세상을 자세하게 사랑하는 방법을 알아가는 중이다. 서툴지만 뜻깊고, 어색하지만 웃음이 난다. 내게 실망해도 좋다. 바람이 차도 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