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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은새 Oct 20. 2024

도시와 고양이

241020

“안녕”
“야옹”

구석진 차 밑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던 고양이 한 마리가 황급히 자리를 떴다. 난 괜히 머쓱한 마음에 달아나는 녀석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녀석은 이내 저 멀리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진해엔 길에서 사는 고양이, 일명 길냥이가 많이 서식한다. 우리 동네에서도 길을 걷다 보면 심심찮게 길냥이를 마주치곤 한다. 동네 이웃인 셈이다. 녀석들은 담벼락 위에 몸을 웅크리고 있거나 지붕 위에서 사람들 얘기로 일명 ‘식빵을 굽는’ 자세로 엎드려 지나가는 나를 쳐다본다. 인간을 관망하고 풍경을 즐기며 선비처럼 유유자적하게 자리를 지키는 녀석들을 보면 나도 덩달아 마음이 편안해지곤 한다.
 
이렇게 귀여운 이웃사촌이지만 반갑지만은 않다. 녀석들을 눈에 담을 때마다 오히려 마음 한편이 시리다. 며칠 전 내가 사는 길 너머 집에선 두 사람이 언성을 높이며 설전을 벌였다. 언쟁을 벌이는 두 사람 사이엔 나무판자로 만들어진 사료통이 있었다. 해지고 너저분한 나무 사료통, 그것이 그날 다툼의 불씨였다.
 
사실 길냥이 급식소에 대한 논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사료가 아니라면 하루 종일 굶을 길 위의 소중한 생명에 대한 연민도, 불가피한 영역 다툼의 동물이기에 밤새 울어대는 불협화음에 대한 이웃 주민의 근심도 이해한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 고통받는 것은 늘 길냥이다. 태어나보니 길바닥이었던 이 생명의 잘못은 무엇이길래 손가락질받는 걸까. 생명의 잉태에 죄를 묻는다면 그것은 상식적인 세상일까.
 
난 눈으론 보이지 않는 너와 내 세계의 간극을 마음으로 느낀다. 사료를 주고 너의 오늘 하루를 풍족하게 해주는 것, 그것으로 우리 사이가 좁혀질까. 난 고개를 젓는다. 내가 가져다준 식량으로 연명하던 네가 아이를 갖게 되면, 그리고 그 아이가 다시 길 위의 삶을 반복한다면 과연 내 선의가 바람직했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엔 현재 100만 마리 이상의 고양이가 도심 속을 배회한다. 매년 2만 마리 이상의 유기묘가 길거리로 나오고, 어미 길냥이가 낳은 새끼 다섯 마리 중 단 한 마리만 성묘가 되어 길 위의 아슬아슬한 삶을 이어간다. 길냥이에게 도시는 가혹하다.

작년 겨울에 추위를 피해 보닛에 들어간 길냥이가 팬벨트에 끼어있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했다. 다행히 녀석을 구조했지만 이미 심하게 상처 입었던 길냥이는 얼마 뒤 고양이 별로 떠났다. 난 녀석의 시체를 수습하며 예견했다. 음울한 길냥이의 삶을 목도하는 게 오늘이 끝이 아닐 거라고.
 
도시는 필요악이다. 인간 문명엔 뗄 수 없는 요소지만, 우리가 만든 도시 사회는 인간을 제외한 모든 생명을 병들게 한다. 인간은 편리를 취하고, 말 못 하는 짐승은 희생을 강요받는다.

“야옹” 길냥이가 나지막이 운다. 난 그 뜻을 헤아리려 다가가지만 너는 멀어진다. 여전히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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