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비비, 당비비. 내 근무표다. 24시간의 당직 이후 첫 번째 비번과 두 번째 비번, 난 이렇게 매일 흘러간다. 당직을 마치고 첫 번째 비번 날 오전에 수영을 마치면 집으로 가는 길에 마트를 들러 냉동 닭가슴살 1kg을 구입한다. 귀가하면 곧장 식소다를 넣은 물에 담가 하루 동안 해동한다. 그러면 알칼리성인 물에 침지한 닭가슴살이 부드러워진다. 그렇게 다음날 삶을 닭가슴살을 준비해 놓고 밥을 안친다. 밥물은 대강 맞춘다. 처음엔 선을 맞추고 개량했지만, 지금은 그냥 눈대중으로 물 높이를 본다. 밥이 질면 진대로, 꼬들꼬들하면 그런대로 먹는다. 사실 혼자 먹는 밥은 그렇게 밥맛이 중요하지 않다.
이렇게 하면 첫 비번 루틴 첫 번째 관문 통과다. 두 번째 관문은 비정기적으로 찾아오는 집안일 차례다. 보통 집 청소가 대부분인데, 난이도가 상이하다. 가장 높은 난이도는 주방 후드 기름때를 제거하거나 누렇게 변색한 흰옷에 과탄산소다를 넣어 새하얀 본래의 색을 찾도록 하는 것, 욕실 타일 사이 줄눈 물때 제거 등이다. 높은 난이도의 집안일을 해야 할 때는 첫 번째 비번을 모조리 투자하고 그날 저녁 치킨을 시켜 먹는다. 이 정도는 먹을 만큼 일했다는 당위성을 곁들이면서. 그 외엔 분리수거, 빨래. 이 두 가지 일은 귀찮지만, 막상 하면 사실 30분도 걸리지 않는다. 후다닥 해치우면 두 번째 관문 통과.
세 번째 관문은 운동이다. 근래 살을 열심히 빼는 중이다. 구조대에 오기 전, 그러니까 2달 전만 해도 82kg이었다. 여기서 8kg을 감량했다. 살을 빼고 나니 다시 이전으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 살이 찌면 첫째로 몸이 무겁고, 둘째로 거울 볼 때 기분이 나쁘고, 세 번째 난 직업적으로 몸을 가꿔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웬만하면 나가서 뛰고 온다. 진해루 한 바퀴면 5km 정도 된다. 동네 보안관 마냥 길냥이를 둘러보고, 낚시하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진해루에서 손잡고 걷는 연인들을 지나치다. 보면 어느새 상의가 땀으로 흠뻑 젖어있다. 이러면 첫 번째 비번의 모든 임무 완수다.
두 번째 비번 날은 비교적 편안하다. 첫날에 집안일을 해놓았으니까. 오전에 일어나 닭가슴살을 삶고 냉장고에 보관해 두고 뛰고 온다. 아침에 일어나는 건 죽기보다 싫지만 일단 뛰고 오면 숙제가 끝난다. 그렇게 되면 오후가 모조리 내 것이 된다. 이렇게 획득한 오후엔 책을 읽거나 유튜브를 보고 낮잠을 자거나 그냥 쉰다. 요즘엔 친구에게 스피커를 선물 받은 뒤로 음악감상 취미가 생겨 방 안에 누워 노래를 듣는다. 장르 불문, 성별 불문, 그냥 모두 듣는다. 선선해진 밤공기 사이로 음표들이 내 방을 굴러다닌다. 커피 한 잔 내리고 가만히 누워 노래를 들으며 저번 당직 때 나갔던 출동 생각도 하고, 다음 주 할 일이 뭐 있었나 미리 생각도 하고, 내년엔 뭘 해볼지 계획해 보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해가 지고, 난 늘 이 시간을 보내기 아쉬워 OTT를 실행시킨다. 볼 영화를 이리저리 찾아다니다 결국 켜는 것은 유튜브지만.
어물쩍 시간을 보낸다고 보면 어느덧 바깥의 채도는 더 짙어진다. 오후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밤으로 바뀐다. 이쯤 되면 난 하루를 놓아줄 준비를 하고 일기장을 편다. 내용은 별거 없다. 오늘 이런 생각을 했다, 이걸 해볼까 한다, 저번에 이런 적이 있었는데. 이렇게 현재와 과거와 미래를 놀이터처럼 넘어 다니다 보면 여러 문장들로 흰 종이가 빼곡히 채워진다. 이렇게 보면 삶은 숙제의 연속이다. 끊임없이 선택하고, 선택의 책임을 져야 한다. 책임이라고 하니 꽤 무겁게 느껴지지만 그렇진 않다. 빨래로 예를 들자면 이렇다. 첫 번째 비번 때 빨래하지 않으면 두 번째 비번 날 모조리 내가 해야 할 일이 된다. 해야 할 일에는 굳이 많은 대답을 하지 않는 게 합리적이라는 걸 깨닫는다. 어차피 할 거면 일찍 끝내는 게 상책이다. 숙제로 채워진 오늘 하루도 끝났고, 난 후련한 마음으로 오늘의 책장을 덮는다.
벌써 올해의 책장엔 수많은 페이지가 넘겨져 있다. 어느 페이지는 새까맣게 가득 채워져 있고 어느 페이지는 새하얀 것이 꼭 새것 같다. 이제 남은 페이지는 구십 페이지 남짓. 엄지와 검지에 잡힐 듯 적게 남은 페이지 수를 보며 오늘처럼만 같길 바란다. 오늘 쉬고 내일 뛰는 게 아닌, 오늘도 내일도 천천히 걷는 그런 삶. 그래서 난 매일 내게 이렇게 얘기한다. "어디 가시죠, 숙제하셔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