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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리천 Oct 03. 2023

만년필이 무슨 죄

오피스빌런은 없다(1)

           

“엄마야!”  


 갑작스러운 외마디 비명에 눈을 돌린 한가오 부장은 숨이 떨어지는 듯했다. 애지중지 아끼던 ‘끝이 만년설봉 디자인’인 고급 만년필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게 아닌가. 만년필 촉 끝이 땅에 부딪혀 완전히 휘어진 채로. 한마디로 망가져 못쓰게 된 것이다. 오 마이갓, 이런 일이. 참사 중 대참사가 아닐 수 없다. 대체 저게 어떤 만년필인데. 자신의 영문자 이름이 겉면에 금박으로 새겨진 고급 만년필. 그것도 아내가 그의 재기를 기원하며 거금 1백20만 원을 들여 마련해 준, 그래서 신줏단지처럼 모셔온 만년필 아니던가. 한가오는 처음 만년필을 받았을 당시의 감동이 떠올라 새삼 더 가슴이 쓰라렸다.     


 한가오의 직장생활은 부침이 적지 않았다. 회사 대표이사와 같은 대학교 동문인 데다 입사 성적도 좋아 초반 승진이 빨랐다. 동기들과 선배들을 제치고 대리, 과장으로 초고속 승진했다. 주목과 질시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초식 불길이라고 했던가. 잘 나가던 그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술자리와 입이 화근이었다. 동기들과 술을 먹다 승진 얘기 끝에 취한 그가 “좃도 일도 못하는 것들이…” “좃나 말들도 많아” 등 막말을 뱉었고, 결국 동기들과의 주먹다짐으로 이어졌다. 욱하는 성질을 참지 못하고 후배들에게 인격 모독적인 욕과 지적을 할 때도 적지 않았다. 거기다 술값을 놓고 동료 선후배들과 벌인 낯부끄러운 설화까지. 한가오에 대한 평판은 걷잡을 수 없이 추락했다. 학교 선배인 대표이사가 어떻게 그냥 뭉개고 넘어가 보려 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악화된 사내 평판에 결국 한직 부서로 쫓겨났고, 3년 넘게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절치부심 切齒腐心, 와신상담 臥薪嘗膽 해야 했다.     


 긴 유배 생활을 마치고 다시 기존 부서로 돌아가게 됐을 때 그의 아내가 거금을 들여 해 준 선물이 바로 부러진 ‘끝이 만년설봉 디자인’인 만년필이었다. 아내는 새 부서 출근을 앞둔 그에게 만년필 선물을 내놓으며 “이제 흔들리지 말고 정상만 바라보고 올라가세요”라고 응원했다. 검은 광택 표면에 날렵한 바디, 캡의 끝을 장식한 만년설봉 디자인, 그 밑에 아로새겨진 금박 영문이름 이니셜. 한가오는 그 만년설봉이 그가 앞으로 올라야 할 정상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만년필을 볼 때마다 그 같은 목표를 잊지 않겠다고, 만년필을 직장생활의 나침반으로 삼겠다고 다짐했었다.      


 실제로 그랬다. 괴로운 일이 있을 때나 힘든 순간에 부딪혔을 때 ‘끝이 만년설봉 디자인’인 그 만년필을 보고, 선물을 받았을 때의 울컥했던 감정을 떠올렸다. 경거망동했던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더 조신하고 신중하게 생활하겠다고 스스로를 다잡았다. 말 수를 줄이고, 내뱉는 한 음절 한마디 한 문장 모두 다 신경 썼다. ‘한가오가 좀 이상해졌어’ ‘물먹더니 사람이 좀 진중해진 것 같아’라는 얘기가 돌기 시작했고, 조금씩 사내 평판도 회복됐다. 한가오는 그게 다 ‘끝이 만년설봉 디자인’인 만년필의 덕인 마냥 더 아끼고 조심해 다뤘던 것이다.     


 그런 만년필이 이렇게 망가지다니. 생각할수록 속상하고 언짢다. 참사의 범인은 같은 사무실의 나지송 대리. 만년필을 망가뜨린 후 평소 ‘쌀뜨물처럼 허연’ 그의 얼굴은 만년설봉보다 더 하얗게 질려 있었다. 망가진 만년필을 쥐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이를 어쩌지요”라며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한가오는 짜증이 나면서도 문득 측은한 생각도 들었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나지송을 탓할 일만도 아니다. 처음부터 ‘끝이 만년설봉 디자인’인 만년필을 책상 위에 그대로 둔 자신의 잘못이 컸다. 안 쓸 때는 필기구 통에 꽂아 두거나 서랍에 넣어 뒀어야 했다. 여태까지 그렇게 해왔다. 그런데 왜 하필 오늘은 안 그랬을까. 이유는 하나다. 그럴 정신이 아니었다. 화상회의 시간이 다 돼 한가오의 컴퓨터가 문제가 생겼고, 나지송이 자진해서 컴퓨터를 봐주겠다며 그의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천천히 해도 된다고 나지송을 달래도 됐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그래 빨리 해봐’라고 재촉했고, 그 바람에 더 허겁지겁하던 나지송의 소매에 만년필이 걸려 바닥에 떨어졌던 것이다. 나지송 잘못도 있지만 만년필을 치우지 않고 일을 더 재촉했던 자신의 잘못도 컸다.      


 아무리 바빠도 만년필은 챙겨놨어야 했는데. 한가오는 새삼 사람 바뀌기 쉽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3년 유배 후 그는 급하고 성마른 성격을 최대한 누르고 살았다. 뭐를 하든 항상 전보다 반 박자 늦추고, 필요 없는 말은 절대 하지 않는다는 자세를 견지했다. 그리고 신중 또 신중. ‘돌다리도 두드리고’ ‘식은 죽도 불어 먹는’는 습관을 만들었다. 그런 자세로 여태 잘해왔다. 그래서 자신이 그렇게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급한 일 앞에 정신없고, 호들갑 떨고, 신중하지 못한 것은 여전했다. 그러나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버스는 떠난 뒤다.     


 그러나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려 해도 괘씸한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사정이 어찌 됐던 조심 했어야지 덜렁대다가 상사의 만년필을 저 지경으로 만들어 놓다니. 생각할수록 나지송에 대해 화가 난다. 그러나 대뜸 버럭 화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금 부서로 옮겨 온 지 몇 달 되지도 않았다. 이럴 때일수록 짐짓 의연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벌컥 화내고 날뛰었다가는 어렵사리 눌러놓은 성격 파탄자 평판을 다시 불러일으킬 수 있다. 기분은 언짢지만 전략적으로 행동해야 할 때다. 그리고 위기는 기회라고 하지 않았던가. 잘하면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보여줄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래, 이럴 때일수록 침착하게, 전략적으로. 그는 ‘세상 쿨한’ 상사가 되기로 작정했다.         


“비싼 만년필처럼 보이는데 어쩌지요.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꼭 고쳐드리겠습니다.”

“허허. 뭘 그런 걸로. 다 도와주려다 그런 건데. 신경 쓰지 마.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아니 그래도 비싼 만년필인데요.”

“어허 괜찮대도 그러네. 걱정하지 마. 앞으로 일이나 열심히 해줘.”     


 한가오는 예상보다 훨씬 더 그럴싸하게 ‘쿨내 나는’ 연기를 해내는 자신이 대견하다고 생각했다. 어쩔 줄 몰라하며 쩔쩔매는 나지송의 모습이 그런 자신의 의연함을 돋보이게 하는 것 같아 기분이 더 좋았다. 솔직히 속이 쓰리긴 하지만 나름 이런 장면이 연출된 것도 그렇고, 나중에 소문이 밖으로 퍼진 후 기대되는 이미지 개선 효과를 생각하면 오히려 뿌듯한 생각마저 드는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 물들어 올 때 노 젖는다고. 이럴 때 바짝 점수를 더 따놓는 게 상책이다. 한가오는 “죄송하다” “어쩌지요”라며 아직도 어쩔 줄 몰라하는 나지송의 어깨를 감싸 안고 함께 사무실 방문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나지송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괜찮대도 그러네, 다 잘해보려다 그런 건데 뭐. 걱정하지 마, 걱정하지 마”라고 세상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랜다. 마치 귀 있는 사무실 직원들은 다 들으라는 듯이.     


 그러나 인품 좋은 상사 연기도 잠깐. 방으로 돌아와 망가진 ‘끝이 만년설봉 디자인’인 만년필을 보자마자 다시 언짢고 기분이 상하는 걸 어쩔 수 없다. 고장 난 것을 고칠 수 있을 지도 의문이고, 고칠 수 있다 해도 수리비가 만만찮을 터였다. 만년필 수리를 위해 몇 곳 전화를 해 본 후엔 더 기분이 상했다. 만년필의 상태를 사진으로 찍어 보냈더니 ‘야매’로 수리해 준다는 곳은 20만 원, 정식 매장에서는 40만 원 넘는 수리비 견적서를 보내왔다.       


 한가오는 만만찮은 수리비 앞에서 오만 생각이 다 든다. 이를 어쩐다. 아내한테서 받은 의미 있는 선물을 그냥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 많은 비용을 들여 고치자니 그것도 쉽지 않고. 이러기도 저러기도 마뜩잖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신경 쓰지 말고 일이나 열심히 하라고 한 나지송에게 고쳐 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결론은 비싼 수리비를 떠안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생각하면 할수록 억울하기 짝이 없다.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그냥 떠안는다 해도 한두 푼도 아니고. 너무 수리비가 많이 나왔으니 반씩 부담하자고 제안해 볼까? 그러면 좋긴 한데, 그렇게 해도 될까. 남들 앞에서는 세상 쿨한 척 다 해놓고 뒤돌아서서 쪼잔하게 수리비 ‘반띵’ 하자고 말하는 게 말이 되느냐 말이다.      


 한가오는 문뜩 떠오른 소싯적 생각에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다. 그가 한창 잘 나가던 시절, 거래처에서 만년필 선물을 받은 적이 있었다. 지금 쓰고 있는 ‘끝이 만년설봉 디자인’인 만년필과 같은 브랜드지만 레벨이 한두 단계 더 높은 플레티넘 금장 만년필이었다. 개당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명품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너무 어렸다. 명품을 알아볼 안목이 없었다. 만년필이 그렇게 비싸고 좋은지 몰랐다. 술자리에서 친구들에게 그냥 가위바위보해서 이기는 놈이 가져가라고 했다. 그때 이긴 친구 녀석의 얼굴이 새삼 떠오른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진짜냐” “물리기 없기다”라고 거듭 확인한 후 “그럼 오늘 술값은 내가 낼게”라고 환호했다. 그때까지도 아무것도 모르고 ‘모지리 자식’하며 친구를 비웃었던 게 자신이었다.     


 한가오는 생각 한다. 시간을 그때로 다시 돌릴 수만 있다면, 그 녀석에게 다시 돌려달라고 할 수만 있다면, 돼지 양념갈비 몇 인분 사고 그냥 받을 선물이 아니니 되돌려주는 게 맞다고 항의할 수 있다면, 그래서 그 만년필을 다시 돌려받을 수만 있다면, 무슨 욕을 먹더라도 돌려받고 싶다고. 그러나 다 부질없는 생각일 뿐이다.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지금 당장 어떻게 할 것인가를 정하는 게 급선무다.      


 골치가 지끈지끈해진 한가오는 친구 몇 명에게 전화를 걸어본다. 짐짓 남의 일 인양 사정을 설명하고 의견을 물어본다. 회사 부장 중에 이런 사람이 있어 고민하고 있는데 너희들이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답이 제각각이다. 올 초 회사에서 임원이 된 친구는 “뭐냐. 상사가 쪼잔하게. 그냥 수리비 내고 말지”라고 단칼에 무 자르 듯한다. 마치 한가오가 그런 고민을 하는 걸 알고 책망이라도 하듯이. 맞는 얘기여서 뭐라 토를 달기도 거시기하다. 


 그러나 최근 승진 인사에서 물먹고 의기소침해하는 친구의 의견은 달랐다. “그건 인성 문제 아냐. 정신 제대로 박힌 놈이라면 소리 없이 고쳐다 주지 않겠어. 안 그러고 그냥 입 씻는 놈이라면 인간성 종 쳤다고 봐야지. 그런 놈이라면 다음 인사 때 본 때를 보여줘.” 마치 자신이 그런 사례의 반면교사나 되는 것처럼 흥분까지 한다. 완전히 다른 의견이지만 듣고 보니 그것도 맞는 얘기다.      


 그러나 한가오와 같은 동네서 나고 자란 불알친구는 또 다른 의견이다. 그의 속내를 꿰뚫고 있는 듯했다. “야, 뭘 고민하냐. 그냥 쿨하게 얘기해. 가서 고쳐오라고. 상사들은 무슨 땅 파먹고 사냐. 그리고 왜 니들은 직장생활을 그렇게 어렵게 해. 부하들한테 무슨 잘못한 거라도 있어. 매사에 절절 기고 말이야. 어깨 좀 펴고 살아라.”


 모두 일리 있는 얘기다. 그냥 아무 말없이 수리비를 부담하든, 아니면 나지송에게 고쳐오라고 시키든 다 얘기가 된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수리비를 ‘반띵’하는 것이다. 자신이 책상 위에 만년필을 놓아둔 잘못도 있고, 나지송이 실수로 만년필을 떨어뜨린 잘못도 있다. 반씩 부담하는 게 옳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지금이라도 그렇게 하자고 제안하고 싶다. 그러나 이미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큰소리친 마당이다. 그래놓고 이제와 무슨 딴소리를 하겠다는 건가. 거기다 한가오에겐 내놓고 말 못 할 ‘흑역사’까지 있었다. 반띵은 애초 불가능한 시나리오였던 것이다.      


 때는 7년 전. 그가 한직 부서로 밀려나기 직전이었다. 그때만 해도 한가오는 뵈는 게 없었다. 실적도 좋았고 승진도 빨랐다. 세상이 다 제 발아래처럼 느껴졌다. 술로 날을 샜다. 그날은 특히 그랬다. 2차를 마치고 뒤따라 온 후배 3명을 룸살롱으로 데려갔다. 마음 놓고 마시라고 큰소리쳤다. 아가씨들도 붙여줬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깨보니 호텔 방. 손에 쥔 것은 수백만 원의 술값이 적힌 영수증이었다.      


 아차 싶었다. 눈앞이 깜깜했다. 도저히 혼자서는 수습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대책이 서질 않았다. 아내가 보기 전에 해결해야 했다. 이를 악물었다. ‘가오’가 말이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후배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술값이 너무 많이 나왔다. 미안하지만 n분의 1로 나눠야겠다”라고 했다.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그런 법이 어딨냐” “술 먹으러 가자고 데려가더니 이제와 술값을 내라는 게 말이 되느냐”며 불만이 터져 나왔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일단 살고 봐야 했다. 그렇게 갖은 욕을 먹어가며 겨우 사태를 해결했다. 그러나 부작용이 심각했다. 한가오는 어느새 사내에서 ‘절대 술 같이 먹으면 안 되는 1인’ ‘후배에게 술값 덤터기 씌우는 몰상식한 선배’ ‘사상 최악의 n빵러’라는 라벨이 붙었다. 그렇게 회사에서, 선후배 동료들 사이에서 웃음거리가 됐고, 기나긴 나락의 시간이 찾아왔던 것이다.       


 그래,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그깟 돈 40만 원.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생기는 법. 쪽 팔린 짓 하지 말고 눈 딱 감고 그냥 덤터기 쓰자. 한가오는 그렇게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 점심시간에 백화점으로 향했다. ‘끝이 만년설봉 디자인’인 만년필이 가득한 가게. 반듯한 정장차림의 직원은 만년필 촉을 교환하고, 바디 광택을 내고, 금박 이니셜까지 손봐주겠다고 했다. 그래, 하는 김에 완전히 새것처럼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런데 직원이 묻지도 않은 수리비에 대해 못을 박는다. 한 푼도 깎을 수 없다고. 40만 원이라고. 결재는 후불, 한 달 후에 찾으러 오라고.       


 한가오는 적지 않은 수리비에 속이 쓰렸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상사란 모름지기 때론 손해를 봐야 하는 거야. 이렇게 쿨 하게 손해를 떠안아줘야 후배들도 고마움을 느끼고, 선배 곁으로 모이는 법이지. 그는 직원이 내미는 비용 청구서에 눈도 깜빡하지 않고 바로 사인하고 일어섰다. 마치 내가 이깟 돈 몇 푼에 고민하는 사람으로 보이느냐고 항의하듯.      


 그러나 가게를 나서자마자 다시 속내는 복잡해진다. 부하 직원에게 그렇게 좋게 얘기하고 손해를 떠안는 게 뭔가 ‘가오’가 사는 것 같다는 뿌듯하다. 그러나 난데없이 거금이 깨져 속이 쓰린 것을 어쩔 수 없다. 아니야. 이럴 때 표정 관리 잘해야 해. 생색내거나 표시내면 안돼. 제발 그냥 지나가자.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이럴 때 희생을 감수하는 상사의 모습을 보이자. 그래야 면도 살고, 탈도 없다. 그래야 진짜 상사고 사나이다. 그는 그렇게 날뛰는 생색내기와 본전생각을 누르며 겨우 사무실에 도착했다.      


 아, 그러나 이게 무슨 간교한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사무실로 들어서면서 여직원들과 커피를 마시며 웃고 있는 나지송을 보는 순간, 한가오의 마음은 다시 좋은 상사 코스프레가 웬 말이냐는 식으로 한순간에 변하고 말았다. 생돈 40만 원을 뜯기게 생겼는데, 사건을 일으킨 당사자는 아무 일 없다는 듯 태연하게 여직원들과 희희낙락 있다니. 그것도 저렇게 세상 해맑은 웃음을 지으면서, 예쁜 여직원들에게 둘러싸여 행복해하면서 말이다.      


 한가오는 순간 영화 ‘밀양’의 대사가 떠올랐다. “어떻게 용서를 해요. 하느님이 벌써 용서했다는데….”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하겠다고 큰맘 먹고 찾아간 교도소에서 범인으로부터 ‘이미 하느님의 용서를 받고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는 말을 듣고 절규하던 전도연, 그녀는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하느님이 무슨 자격으로 나를 대신해 범인을 먼저 용서할 수 있느냐며 하늘을 향해 부르짖었다. 그래서 교회 부흥회를 찾아가 행사를 방해하고, 동네 교인을 유혹하는 등 하느님을 향한 도발을 계속했던 것이다.       


 한가오는 전도연을 120% 공감할 수 있다고 느꼈다. 폼나게 말로는 용서한다고 했지만, 진짜 마음의 평안을 얻은 것 같은 모습 앞에 갑작스레 혼란스러워진 것이나, 용서한다고 말했으나 용서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해 끝까지 번민하는 것이나 그녀와 다를 게 뭐냐고 느꼈다. 그리고 자신이 전도연의 도발을 따라 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돈 40만 원에 턱도 없이 거창한 질문과 깨달음이라고 비난받을 수 있겠으나 나지송을 보는 순간, 참을 수 없는 불편함과 함께 ‘본전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이대로 그냥 지날 수 없다는 오기. “너는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라고 했던 ‘달콤의 인생’의 김영철처럼, “미친년, 받은 만큼 돌려주겠어”라고 했던 ‘사이코지만 괜찮아’의 서예지처럼 분노했다. 그는 어느새 10년 전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유배 3년간의 깨달음도, 지난 7년간 이를 악물고 새로 만든 이미지가 얼마나 귀하고 값나가는 것인지도 다 잊은 채.      


 끙하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한가오는 나지송을 불렀다. 나 대리 잠깐 나 좀 보지. 그리고 급할 것도 없는 업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지시를 하기 시작했다. 책상에는 만년필 숍에서 가져온 수리 요청서를 보란 듯이 펴 놓은 채로 말이다. 청구서엔 수리비용 가격이 빨간 글씨로 밑줄까지 그어져 있다. 수리비가 얼마인지 보지 않을 내야 보지 않을 재간이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한가오는 아무것도 모른 척 컴퓨터 모니터에서 고개를 떼지 않은 채 설명을 이어갔다. 이거는 이러고, 저거는 저런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하나 마나 한 질문을 계속했다. 그러다 문득 어깨너머로 나지송의 얼굴을 힐끗 쳐다봤다.       


 다시 만년설봉 보다 더 하얗게 질려 있는 나지송의 얼굴.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다. 한가오는 그때서야 짐짓 놀라는 척하며 수리 요청서를 서랍 안으로 서둘러 집어넣었다. 아, 이게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이거 아무것도 아냐. 신경 쓰지 마. 내가 알아서 처리할 게,라고 했지만 자신의 계획이 제대로 먹혀들었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한다. 잘됐어. 최소한 나지송에게 수리비용 정도는 알려주고, 생색을 내더라도 내는 게 맞지. 그 정도 미안함을 갖게 하는 것은 양심에 거리 끼는 일도 아니라고, 그 정도는 해야 40만 원이라는 생돈을 써도 아깝지 않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한가오는 그제야 짐짓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 “나 대리, 이제 가봐. 내가 얘기한 것 잘 생각해 보고.”     


 사무실을 나서는 나지송의 얼굴은 이제 터지기 직전의 토마토 마냥 시뻘게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울음보가 터질 것 같았다. 20여 명 남짓한 사무실 직원들이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리고 동시에 분개한다. 누가 감히 우리 지송이를 저렇게 만들었단 말인가. 보기만 해도 아까운, 사무실의 꽃, 회사의 마스코트인 나지송을 말이다. 그렇다. 나지송은 그런 존재였다. 나이 32살의 미혼남, 일 잘하고 착한 데다 집안 학벌에 얼굴까지 하나 빠지는 게 없는 직장 내 여성들의 최애 남이자, 인기절정의 품절남인 것이다. 거기에 월등한 피지컬까지. 178의 호리 한 키에 백옥처럼 하얀 피부, 귀를 덮으면서 부드럽게 컬링 한 머릿결, 뼈까지 들여다보일 정도로 투명한 긴 손가락은 만찢남(만화를 찢고 나온 남자) 그 자체다. 여자는 물론이고 남자들까지 혹하게 만드는 마성의 매력덩어리가 바로 나지송이다. 그런 그가 거의 울 듯한 표정으로 한가오의 사무실에서 나왔던 것이다. 아무리 무슨 일이냐고 물어봐도 입을 꾹 다문 채로 말이다. 사무실 전체가 일순 한가오를 향한 분노로 소리 없이 폭발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나지송이 우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 그는 울보에 가까웠다. 일하다 힘들면 울고, 누가 조금만 서운한 소리를 해도 울었다. 화장실에서도 옥상에서도 심지어는 모두가 퇴근한 사무실 책상 밑에서도 울다가 발견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항상 누군가가 그를 곁을 지켜줬다. 자발적으로. 그에게는 그렇게 모성애를 자극하는 뭔가가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여자들보다 남자들이 더 그를 챙겼다. 아무래도 같은 남자들이 편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지만, 꼭 그렇지 만도 않다는 얘기도 만만찮았다.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나지송이 남자를 더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었다. 하루는 회사 자재품 창고에서 얼굴이 빨개진 채 남자 동료와 나오다 들키기도 하고, 또래 남자 동료와 불 꺼진 사무실 한편에서 키스하다 경비원에 발각돼 경고를 받았다는 얘기도 떠돌았다. 심지어는 최근 대학로에서 열린 LGBT 행진 때 무지개색 가발을 쓴 나지송을 봤다는 목격담까지 돌았다. 나지송과 함께 몰려다니던 남자 동기 중 한 사람이 그와 사귄다는 얘기도 한때 떠돌았던 루머 중 하나였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소문은 소문으로 사그라들었다. 누군가 그런 루머로 나지송을 공격할라치면 어김없이 여론이 그를 보호하고 나섰다. 의혹 제기자의 신상을 까발리고, 도덕적 결함이 있는 문제아로 낙인찍는 식이었다. 그래서 섣불리 나지송을 건드는 이가 없었다. 나지송은 그렇게 사내 직원들의 마스코트로 보호받는 존재였다. 스캔들에 때 묻어서도 안되고, 루머에 휩쓸려서도 안 되는 ‘만인의 연인’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 그래서 나지송의 동성애 편력도 모두가 쉬쉬하는 공공연한 비밀로 남겨졌던 것이다.       


 그런 나지송이 한가오 사무실에서 거의 울먹이며 나온 데다 그다음 날 저녁 동기들과의 술자리에서 대성통곡했다는 소문이 돌자 한가오는 거의 불구대천지 원수, 곧바로 멱을 따고, 생매장해도 시원찮을 공적이 돼가고 있었다. 문제는 한가오가 그런 상황 변화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정확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일이 어떤 파장을 일으키는지 알지 못한 채 나지송을 상대로 ‘지질한’ 보복전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다음날 한가오가 출근했을 때 그의 책상 위에는 편지 봉투 한 개가 놓여있었다. 발신인도 수신인도 없는 하얀 편지 봉투. 그 안에는 10만 원 권 수표 4장과 세 번 접은 한 장의 편지지가 들어 있었으니. 내용은 대강 이러하였다. 


 부장님, 제가 실수로 부장님 아끼시는 만년필을 부러뜨리게 돼서 정말 면목없고 죄송합니다. 당연히 제가 수리해서 갖다 드려야 하는데 생각이 짧았습니다. 뒤늦게나마 수리비용을 동봉하오니 제 무거운 마음을 헤아려주시고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거듭 만년필 건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나지송 올림.


 이런 이런. 이게 무슨 일이래. 이미 내가 부담하기로 한 건데 무슨 돈을 가져와. 한가오는 그렇게 혼잣말을 하면서도 내심으로는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자식이 기생오래비 처럼 생겨서 경우가 없는 줄 알았더니 꽤 생각이 깊구먼. 요즘 얘들답지 않게 싸가지가 있어. 기특하구먼. 그러나 저러나 이 돈을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래도 상사가 가오가 있지. 이걸 어떻게 받아. 한번 신경 쓰지 말라고 했는데 어떻게 말을 뒤집느냐 말이야. 그렇다고 성의껏 가져온 것을 다시 되돌려 줄 수도 없고. 어허 이것 참.      


 그러면서도 한가오는 슬며시 봉투를 서랍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나지송을 불렀다. 나 대리 나 잠깐 볼래. 나지송이 밤새 한숨 못 잔 것 같은 희멀건 얼굴로 사무실로 들어왔다. 그 순간 사무실에 있는 수십 개의 눈과 귀가 나지송의 뒤통수를 따라 다시 움직였다. 일사불란하게. 그리고 분노에 가득 찬 눈빛으로.       


 나 대리. 마음은 고마운데,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걸 이렇게 셈 바르게 돈을 내고 나서면 연장자인 내가 뭐가 되나. 같은 사무실에서 이런 일 저런 일 다 있을 수 있는데, 그때마다 이거는 당신 잘못, 이거는 내 잘못 따지기 그렇잖아. 게다가 나 대리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도와 주려다가 그런 일이 벌어진 거잖아. 오히려 내가 고마워해야 할 일이지. 아무튼 이번 일은 나 대리의 무거운 마음을 헤아려 받겠지만 앞으로 그러면 곤란해. 상사 입장도 헤아려주는 게 부하 직원들의 의무야.     


 한가오는 거듭 머리를 주억거리며 나가는 나지송의 뒤통수를 보면서 파도같이 밀려오는 쾌감에 몸을 떨었다. 전혀 체면을 구기지 않으면서 수리 비용을 받아낸 데다 부하 직원의 의무까지 언급하며 상대를 미안하게 만든 노련함이란. 스스로 생각해도 감탄할 경지다. 역시 연륜과 구력은 무시할 수 없어. 잔밥은 똥꼬로 먹는 게 아니란 말이다. 이런 내공이 쌓였기 때문에 승진도 하고 부서장도 하는 거지. 암, 그니까 한가오지. 한가오, 아직 죽지 않았어. 그는 사무실만 아니라면 벌써 ‘야호’라고 목이 터져라 환호성을 질렀을 것이다. 그러나 겨우 꾹 참았다. 자축은 집에 가서 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저녁 퇴근길. 한가오는 백화점에 들러 5만 원이 넘는 캘리포니아산 나파밸리 와인 한 병을 샀다. 만년필이 망가져 속상해하는 아내의 기분도 풀어줄 겸, 자신의 노련함을 자찬할 겸. 이럴 땐 와인만 한 게 없다고 생각하면서 휘파람을 불면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어떤 태풍이 불어닥칠지 전혀 예상치 못한 채로.       


 다음날 아침은 어느 때와 다를 바 없었다. 정확한 시간에 집을 출발해, 정확히 같은 전철을 타고, 정확히 같은 수위와 인사를 나누고, 정확한 시간에 사무실에 도착했다. 다른 게 있다면, 어제 와인을 마시고 오랜만에 아내의 살 내음을 맡고 잔 탓에 아침 출근길 전철에서 살짝 존 것과 아침 댓바람부터 그동안 소식이 뜸했던 동기가 예고도 없이 찾아온 것뿐이었다. 태풍은 동기가 몰고 왔다. 동기는 출근하는 그를 보자마자 인사도 없이 안 됐다는 표정으로 대뜸 이렇게 물었다.        


“너 또 받았냐?”

“아니 그게 무슨 봉창 두들기는 소리야. 뭘 받아?”     


 한가오의 위아래를 훑어보며 혀를 차던 동기는 아침 출근길에 부서 후배에게 들었다는 얘기를 풀기 시작했다. 나지송에 관한 얘기 했다. 사정은 이랬다. 전날 저녁 나지송과 그의 입사 동기 몇 명이 모임을 가졌다. 매달 갖는 정기 모임이었다. 그 자리에서 귀염둥이 나지송이 내내 의기소침해 있었다. 그러자 동기들, 특히 여자 동기들이 달라붙어 끈질기게 무슨 일이냐고 캐물었다. 백옥 같은 얼굴에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려 여자 동기들의 생가슴을 태우던 나지송은 결국 만년필 얘기를 털어놨다. 여자들보다 남자 동기들이 더 분노했다. 모임은 한가오 성토장으로 변했다.       


 “아 네가 그걸 몰랐구나. 한가오 원래 그런 인간이야. 절대 자기가 손해 보고 넘어갈 그런 인간이 아니지.”

 “전부터 유명했어. 후배들에게 술 산다 하고 했다가 나중에 n빵 하자고 했다잖아. 한두 번이 아니라던데.”

 “그 자식 왜 그래, 처음부터 차라리 수리비 달라고 하지. 왜 은근히 갈구고 날리야. 나쁜 새끼.”

 “야 지송이 너 그런 인간 말종 밑에서 고생이 많다. 그래도 힘내. 우리가 있잖아.”

 “지송아, 혹시 그 인간이 너한테 이상한 짓 하고 그러진 않았지. 정말 나쁜 놈이네.”     


 한가오를 향한 융단폭격식 인신공격은 나지송이 울음을 그칠 때까지 계속됐다고 한다. 한가오가 아내와 기분 좋게 와인을 즐기는 사이, 그는 인민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은 것과 같은 신세가 됐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소문은 날이 새기 전 소식 빠른 몇몇 빅마우스들에게 전해졌다. 그중 하나가 아침에 그를 찾아온 동기였던 것이고.      


 동기가 사태 잘 처리하라고 조언하고 나가자, 한가오는 갑자기 혈압이 오르는 걸 느꼈다. 뒷목이 당기면서 스스로 ‘이러다 큰 일 나는 것 아냐’하는 걱정까지 들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더 참을 수 없는 것은 모멸감이었다. 멘털이 믹서기에 갈린다는 게 바로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일까.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빨리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가오는 생각 했다. 


 아, 이렇게 직장생활이 끝나는 것인가. 이제 이미지를 회복할 방법은 없겠지.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을까. 내가 그렇게 나쁜가.     

 한가오는 생각 할수록 나지송이 괘씸했다. 수리비용을 줬으면 말을 하지 말든지, 말을 할 거면 수리비용을 내지 말든지. 자기가 스스로 비용을 부담하고, 돈 안 준다고 갈군 것처럼 동네방네 소문을 내다니? 한가오는 뻗쳐오르는 화를 제어하지 못한다. 그동안 공들여온 인품관리의 중요성도 새까맣게 잊은 채 고래고래 소리치기 시작했다. 어느새 세상 쿨내 하는 상사는 오고 간데없고, 10년 전 성마른 성격의 잘난 체하는 막말 선배가 돼 있었다.       


 나지송, 이 새끼 어디 있어. 들어와!!

갑자기 얼음처럼 싸늘해진 사무실 분위기. 모두가 침만 꼴깍꼴깍 삼키고 숨을 죽였다. 갑분싸 분위기에 모두가 긴장했다. 그리고 ‘만년설봉 끝 모양’ 만년필보다 더 새하얗게 질린 나지송이 다시 허겁지겁 한가오의 사무실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문이 닫히기 전 들리는 흥분한 한가오의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문 닫고 거기 앉아. 새끼야. 

그 후 나지송이 사무실을 울면서 뛰쳐나갈 때까지 사무실 밖에서 들을 수 있는 얘기는 많지 않았다. 누구나 똑똑히 들었던 이 한 문장만 빼고.      


 내가 언제 너한테 달랬냐.


그리고 그날 오후 사내 게시판엔 이런 내용의 글이 떴다. 게시자 이름은 ‘우리는동기’.      

만년필 수리를 핑계 삼아 후배 돈 뜯어내고, 

육체관계까지 요구한 ‘불가촉상사’ 한가오는 즉각 사퇴하라, 사퇴하라!!     


그 후 회사는 한가오 부장 일로 작대기로 쑤셔놓은 개미굴이 됐다. 여직원들은 일이 터지기 전 007 작전에 버금가는 보안과 민첩함으로 나지송을 피신시키는 데 성공했고, 한가오는 게시판 글을 보자마자 나지송을 찾느라 길길이 뛰었다. 결국 허탕질을 치고 사무실로 돌아간 한가오는 한동안 문을 걸어 잠그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날 오후 납처럼 굳은 얼굴로 사무실을 나선 한가오는 ‘같은 대학출신 선배’ 사장에게 사표를 제출했고, 그 자리에서 사표가 수리됐다는 소문이다. 그 후 한가오가 어떻게 회사를 나갔는지에 대해서는 후문이 분분하다.      


 마지막으로 회사에서 그를 봤다는, 매일 아침 그와 인사를 나누는 사내 최고령 수위의 주장은 이랬다. 그날 오후 지하 4층 주차장 어두운 구석을 한참을 서성이던 그가 종종 손등을 얼굴 쪽으로 가져가는 것으로 보아 울고 있었던 게 분명했고, 그 후 한참을 차 뒤쪽에서 웅크리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러다 갑자기 나머시기와 좃머시기를 외치며 고래고래 소리를 치다가 자신의 차를 타고 나갔다는 것이다. 그의 차가 주차장 차단기를 통과할 때 찍힌 마지막 동영상에는 만년설봉 끝모양 만년필처럼 하얗게 질린 한가오의 얼굴과 그 옆자리에 뒹굴고 있는 노란색 만년필 수리비 청구서만 보일 뿐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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