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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리천 Oct 06. 2023

엠지, 승진을 쟁취하다①

오피스빌런은 없다(4)


눈물이 멈추질 않는다. 흐느끼던 울음이 이제 꺼이꺼이 하는 통곡소리로 변했다. 얼굴은 눈물 콧물로 온통 범벅이다. 마스카라까지 흘러내려 볼썽사납기 그지없다. 사무실이 ‘도대체 무슨 일이야’라는 소리로 웅성거린다. 옆 자리 선배들이 쫓아온다. “빛나 씨, 왜 그래” “무슨 일 있어”라고 묻는다. 그런 질문에 신경 쓸 틈이 없다. 울음소리가 서러운 감정을 더 복받치게 만든다. 울음소리가 더 커진다. 사내 통신망이 대성통곡하는 3층 신입사원 얘기로 시끄럽다. 모두가 의아해한다. 잘 나가는 왕빛나가 도대체 왜?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왕빛나는 세상 행복한 직원이었다. 첫 직장에서 1년도 안 돼 승진하는 신데렐라 꿈에 부풀어있었다. 남들은 4~5년 걸린다는 첫 승진을 1년만, 아니 10개월 만에 하다니. 왕빛나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런 심정이 티가 났을까. “빛나 씨, 오늘 무슨 일 있어” “오늘 화장이 잘 받은 거 같아” “빛나 씨, 요즘 이상해, 연애하나” 동료들이 모두 한 마디씩 한다. “아, 정말요” “감사합니다” “예쁘게 봐주셔서 고마워요”라고 일일이 공손하게 답한다. 그러면서도 하고 싶은 말을 꾹 참는다. ‘오늘, 진짜 깜짝 놀랄 일이 있거든요. 기대하시라, 두~두둥!!’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기대했던 것과 완전 다르다. 정기인사 승진자 명단에 그녀 이름이 빠진 것이다. 그럴 리가. 몇 번이고 게시판 내용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그래도 없다. 대리 승진자 8명의 명단에 있어야 할 자신의 사번이 없는 것이다. 배신감 모멸감 좌절감이 일시에 그녀를 덮친다. 그리고 눈물샘이 터졌다. 한 번도 제대로 터진 적 없는 그곳에 큰 구멍이 생긴 듯 손 쓸 틈 없이 터져버렸던 것이다. 정확히 왜 그런지는 자신도 모른다. 다만 부끄러웠다. 쥐구멍이 있다면 바로 그리 사라지고 싶었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다 문뜩 드는 생각. 그래, 뭔가 착오가 있는 거겠지. 뭔가 행정상 실수가 있었던 거야. 그래 바로 그거야. 뭔가 잘못돼 있어. 목 놓아 울던 왕빛나가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로 달려갔다. 목적지는 17층. 사장님과 임원들이 있는 로열층이다. 누가 봐도 신입 사원이 마음대로 갈 곳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왕빛나는 거리낌이 없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다는 듯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8개월 전. 나기우 사장과 수습사원들 간담회가 있었다. 이름하여 ‘타운홀 미팅’. 이름이 거창했다. 그러나 이름만 그럴듯하지 내용이나 형식은 이전 간담회와 다른 게 없다. 사장이 임원들 대동하고 와서 먼저 인사말을 하고 몇 가지 질문을 받고, 답하고, 웃으며 다 같이 사진 찍고, 그리고 끝. 직원들 얘기를 듣기 위해 만든 자리가 아니라, 사장 홍보용이다 보니 감동이 있을 리 없다. 이름도 왜 타운홀 미팅인지 알 수 없다. 타운홀 미팅은 본래 미국에서 시장과 시민들이 시청 로비에 모여 앉아 주요 정책을 놓고 피 터지게 토론하고 결정을 내렸던 모임이다. 시장이 주도하는 게 아니라 시민들이 시청에 쳐들어가서 따지는 자리였고, 그래서 무엇보다 수평적이고 민주적인 진행이 특징이었다. 사장이 행사 내용을 언론에 내기 위해 만든 그런 관제 행사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말씀.      


 어쨌거나 왕빛나는 그 타운홀 미팅에서 이름값을 톡톡히 했다. 존재감 뿜뿜, 존잘 대방출이라고나 할까. 50여 명의 수습사원 중 군계일학群鷄一鶴이었다. 그 행사가 사장을 위한 자리가 아니라 왕빛나를 위해 사전 기획된 행사처럼 보일 정도였다. 사장에게 가장 먼저 질문하고, 사장의 질문에 가장 센스 있게 대답한 것도 그녀였다. 이런 식이었다.      


 “사장님께서는 모든 직원들에게 방문이 열려있다고 하셨는데 아예 방 자체를 없애면 어떠실까요. 저커버그처럼 직원들과 같은 책상에 앉아보는 파격을 함 시도해 보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진정한 수평적 대화란 그런 형식의 파괴로부터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희 S전자가 업계를 앞서간다는 이미지를 줄 수도 있고요.”(왕빛나)

“아, 그런가요. 듣고 보니 좋은 생각이네요. 여러분 의견이 그렇다면 검토해 볼게요.”(나기우)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저런 이유로 건배사를 해야 할 때가 있어요. 지금 거래처 사람들과 하는 술자리라고 생각하고 누가 센스 있게 건배사해 볼 사람 있을까요.”(나기우)

“제가 함 해보겠습니다. 제 건배사는 누나언니입니다. 제가 누나 하면 사장님과 여러분은 언니라고 큰소리로 답해주세요. 누나는 누가 나의 편? 언니는 언제나 네 편이라는 뜻입니다. 누나, 언니!!!”(왕빛나)     


 170 가까운 훤칠한 키에 볼륨감 있는 몸매, 뚜렷한 이목구비의 미모, 거기에 톡톡 튀는 센스와 임기응변 능력까지. 왕빛나는 말 그대로 자체 발광했다. 그녀가 나설 때마다 좌중에선 ‘오호’라는 감탄사와 함께 박수가 터져 나왔다. 행사에 배석했던 임원들과 부서장들 사이에서는 “저 똘방진 얘가 누구야?”라는 귓속말이 오고 갔다. 개중에는 ‘오, 물건 하나 들어왔네’ ‘흠, 바로 써먹을 수 있겠는데’ ‘당장 인사팀에 저 아이를 우리 부서로 배치해 달라고 얘기해놔야지’라고 침을 흘리는 부서장이 한 둘이 아니었다. 그중엔 나기우 사장도 끼어 있었다.      


 그날 오후 왕빛나는 사장실에서 전화를 받았다. 잠깐 올라와보라는 호출이었다. 가슴이 뛰었다. 결국 경영진 눈에 든 것이다. 며칠간 시나리오별로 타운홀 미팅을 준비해 온 보람이 있었다. 혼자 들어가는 17층 사장실. 신입 사원으로서는 흔치 않은 경우, 어쩌면 다시 못 올 기회일지 모른다. 게다가 곧 첫 부서 배치도 있다. 확실한 인상을 줘야 한다. 왕빛나는 심호흡을 한 후 사장실로 들어갔다.      


 처음 가까이서 본 나기우 사장. 숨이 막혔다. 그는 국내 최대 정보통신(IT) 기업의 최고경영자다. S대 물리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MIT와 스탠퍼드대에서 컴퓨터사이언스(CS)와 인공지능(AI)으로 석·박사 학위를 한 수재이자, 미국 벨연구소와 한국전자통신연구소(ETRI), L전자 등을 두루 거친 빅테크 업계의 기린아다. 그가 2년 전 S전자로 스카우트되어 자리를 옮길 때 국내 신문방송은 물론이고 일부 해외 언론들까지 업계 린치핀이 바뀌었다며 그를 집중 조명할 정도였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업계의 화젯거리가 됐고, 그가 내린 결정은 회사뿐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에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미쳤다. 나기우를 만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섰고, 그의 초 단위 분 단위 일정에 끼기 위해 한국의 내로라하는 정치인, 관료들도 로비를 펼치고 있다. 그런 나기우가 금싸라기 같은 시간을 쪼개 신입 사원인 자신을 보자고 한 것이다. 왕빛나는 그런 상황 자체가 숨 막힐 정도로 황홀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숨 막힌 게 있었으니. 바로 나기우의 외모였다. 왕빛나는 나기우의 실물을 영접한 후에야 그의 진정한 우월함이 화려한 배경이 아니라 그의 피지컬에서 나오는 아우라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래서 존잘 섹시남, 뇌색남 나기우 나기우 하는구나. 왕빛나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기우는 왕빛나가 집무실로 들어섰을 때 자리에서 일어서 그녀를 맞이했다. 존경받아 마땅한 매너. 그러나 더 눈에 띈 것은 그런 매너에 어울릴만한 완벽한 슈트 핏이었다. 매일 일과 후 1시간 반은 짐에서 땀을 흘린다는 운동 광. 그런 노력이 있기에 50대 초반이라고 믿기 어려운 완벽한 실루엣이 가능하리라. 거기에 츤데레 도시남의 원판 같은 얼굴과 퓨전 올백의 댄디한 헤어 스타일. 그러나 거기서 끝났다면 아무리 나기우라도 그저 그런 멋쟁이 중 한 명에 그쳤을 것이다. 목소리. 그 매혹적인 목소리. 굵은 구슬이 유리판 위를 굴러가는 듯한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는 듣는 이를 어지럽게 만들 정도였다. “자 이쪽으로 편하게 앉아요”라고 속삭이는 목소리에 왕빛나는 하마터면 울 뻔했다. 남자 목소리가 이렇게 섹스 어필할 수 있다니. 그랬다. 나기우는 실력과 재력, 지위와 명예, 외모와 매너 뭐 하나 빠질 게 없는 완벽남이었다.      


 그런 나기우와의 1시간 면담이라니. 가문의 영광 아니겠나. 왕빛나는 수 백 번도 더 연습한 자기소개부터 다시 멋들어지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웬걸. 나기우는 왕빛나에 대해 모르는 게 없었다. 출생지부터 사돈에 팔촌 가족 관계까지 완벽하게 꿰고 있었다. 기본 인적사항은 올 패스. 대신 끈질기게, 그러나 결코 무례하지 않게 질문을 계속했다. 핵심은 ‘내가 너를 신경 쓰고 케어해야 할 이유를 스스로 증명해 보라’는 것이었다. 타운홀 미팅에서 보인 모습이 결코 조작되거나 연출된 모습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네 모습이라는 것을, 왜 우리가 너를 주목해야 하는지 재확인시켜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러나 왕빛나는 알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는 타운홀 미팅 때처럼 튀는 데만 집중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상대가 보고 싶어 하는 것은 뛰어난 자질뿐 아니라 훌륭한 인성人性이라는 것을.      


 왕빛나는 상대가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파악했고, 그렇게 한 시간을 꽉 채웠다. 과장하거나 포장하지 않고 진솔하게 자신을 보여줬다. 결코 쉽지 않았던 28년 인생을 담담히 전달하려 노력했다. 특히 자신의 능력이나 회사에 대한 충성심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사례를 들어 설득력 있게 설명했다. 한 마디로 저를 믿고 써도 된다는 게 요점이었다. 왕빛나는 만족스러웠다. 충분히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면담을 끝내고 방문을 나서는 순간, 깨달았다. 대화의 진정한 승자는 자신이 아니라 나기우라는 사실을. 그랬다. 나기우는 부드러우면서도 유연했고, 유연하면서도 원칙을 지킬 줄 알았다. 시종 어디로 튈지 모르는 왕빛나를 살살 어르고 달래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했다. 그리고 꼭 들어야 하는 부분에서는 왕빛나가 마음 놓고 얘기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줬다. 결국 왕빛나가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얘기하도록 유도했다. 그리고 상대가 스스로 만족할 수 있도록, 편하게 대화 자리를 떠날 수 있게 배려했다. 그 멘트와 눈빛, 그리고 제스처 하나하나. 나기우는 마치 거대한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마에스트로와 같았고, 왕빛나는 이제 갓 합류한 단원, 아니 한 점의 악기에 불과했다. 나기우는 한 시간 동안 왕빛나란 새로운 악기를 자유자재로 연주했던 것이다. 왕빛나는 나기우에 압도됐다. 황홀했다. 이렇게 멋진 남자와 함께 일할 수 있게 되다니.  


 결과는 기대한 대로였다. 나기우는 왕빛나에게 일하고 싶은 부서를 물었고, 원하는 곳으로 보내줬다. 신입 사원의 초임 부서로는 이례적이었다. 동기들이 그녀를 부러워했다. 선임들도 마찬가지였다. 실력 있는 부서에 훌륭한 평가를 받고 있는 부서장까지. 배울게 많은 부서였다. 특히 부서장은 왕빛나를 존중하고, 그녀가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배려해 줬다. 왕빛나는 자신이 나기우의 보호 아래 특별대우받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상황에 만족하지 않았다. 오히려 경계했다. 사장의 특별한 관심 속에 웃자란 꽃이 돼선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자신을 다그쳤다. 사무실엔 제일 먼저 출근했고, 해야 되거나 끝내기로 돼 있는 일들은 기한을 넘기지 않았다. 때론 집에서도 기꺼이 일했다. 퇴근 시간도 너무 빠르거나, 늦지 않게 항상 다른 부서원들과 템포를 맞췄다. 말과 행동도 튀지 않도록 신경 썼다. 주위를 배려한다는 평판이 나올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을 알아주고 챙겨주고 있는 나기우에게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왕빛나는 사장실에서 계속 연락을 받았다. 첫 호출 후 짧게는 주 단위로, 길게는 한 달 단위로 전화를 받았다. 그때마다 1시간 또는 1시간 반 정도 얘기를 나눴다. 대화 주제는 왕빛나의 개인적인 일부터 회사 생활까지 특정되지 않았다. 주로 나기우가 질문했고, 왕빛나가 답했다. 그러다 왕빛나가 질문하는 일이 잦아졌다. 나기우는 질문을 받을 때 쑥스러워했다. 그리고 어느 때보다 많이 웃었다. 그는 웃을 때 소년 같은 웃음을 지었다. 왕빛나는 그런 그가 귀엽다고 생각했다. 둘은 어느새 면담 시간을 기다리고, 그 시간을 즐기고 있는 자신들을 발견했다. 척추를 곧추세우고 대화하던 방식도 어느새 소파에 몸을 묻고 다리를 꼬고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식으로 바뀌었다. 두 사람 간의 거리는 심리적으로 물리적으로 점점 가까워졌다. 서로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대화하기 시작했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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