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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리천 Oct 08. 2023

엠지, 승진을 쟁취하다③끝

오피스빌런은 없다(4)


왕빛나가 예고 없이 사무실로 들어서자 나기우는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무슨 일이에요”라고 깍뜻하게 존대하는 것은 예전과 같았지만 약간 쉰소리가 섞여 있다. 평정심을 잃었다는 증거였다. 미간에도 언뜻 살짝 주름이 잡히는 것 같다. 예의가 아닌 것에, 예상치 못한 일에, 사내에 쓸데없는 풍파를 불러올 행동에 짜증이 난 것이다.  


 왕빛나가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흥분이 좀처럼 가라앉은 채로. 눈빛은 흥분과 절망, 의혹과 의문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복잡한 심정을 최대한 억누르고 침착한 톤으로 말했다. “인사 명단에 실수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러나 목소리는 이미 누가 들어도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일단 연기는 실패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나기우의 눈빛. 왕빛나의 그것을 피하는 것 같았다. “일단, 거기 앉아요”라고 했지만 눈은 딴 곳을 향해 있었다. 왕빛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실수가 아니라는 것을, 승진자 명단은 나기우가 제대로 검토하고 서명한 결과라는 것을, S전자에서 행정 착오를 기대하는 것은 왕빛나 자신이 갑자기 사장 인사 발령을 받는 것만큼이나 터무니없는 기대라는 것을. 왕빛나의 눈빛이 일순 무너져 내렸다. 어떻게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거지요, 대답해보세요, 그 많은 달콤했던 말과 속삭임들은 무엇이었나요. 저에게 약속했던 승진 인사는 어떻게 된 거지요. 왕빛나는 그러나 가슴속에서 터져 나오는 그런 성난 목소리들을 꾹꾹 눌러 삼켰다.   


 그때 왕빛나는 예기치 못한 감정의 반전을 경험했다. 막상 뒤바뀔 수 없는 현실을 인식하자 나기우에 대한 분노보다는 자신에 대한 실망이 커진 것이다. 왜 이렇게 경솔하게 행동했을까. 한번 참았더라면, 나기우에게 다시 생각할 기회를 줬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더라면 그와의 좋은 관계도 유지하면서 내가 원하는 것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왜 경솔하게 사장실로 밀고 들어와서 관계를 어그러뜨린 것일까. 그동안 쌓아놓은 수많은 것들을 왜 한꺼번에 무너뜨린 것일까.      


 그러면서도 다시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정말 한 번만 참았더라면 과거로 돌아갈 수 있었을까. 나기우를 믿고 기다렸다면 모든 게 순조롭게 풀렸을까. 아니다. 저 눈빛, 나기우의 저 비겁한 눈빛을 보라. 그의 눈은 말하고 있다. ‘미안하다’ ‘나도 어쩔 수 없다’라고 변명하고 있다. 차라리 그가 아무 일 아니라는 듯 나를 꾸짖거나 무시했다면 그냥 순순히 발길을 돌렸을지 모른다. “뭔가 오해가 있었다”라고 말했다면 나기우를 믿고 기다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저 눈은 흔들릴 수 없는 진실을 말하고 있다. 승진 탈락은 절대 뒤바뀌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의 배신은 이미 계획됐다는 사실을.      


 왕빛나는 새삼 새벽처럼 맑은 정신으로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그동안 어렴풋하던 그녀 앞에서 빛나던 장밋빛 세상이 일순 무너지고, 그 자리에는 어느새 온갖 비열한 군상들이 더러운 구더기처럼 꿈틀대고 있는 세상이 펼쳐져 있다. 그녀가 한때 완벽남이라 칭송해 마지않던 한 남자가, 신神처럼 숭배하고 사랑했던 한 남자가 온갖 사탕발림으로 여자를 농락해 온 쓰레기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런 현실을 인정해야 하는 것 자체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서울광장을 뛰는 것보다 더 수치스럽게 느껴졌다.     


 왕빛나가 결국 침묵을 깨고 질문한다. 묻지 않을 수 없는 질문. “그러실 거면서 왜 그러셨어요” 다시 침묵. 나기우가 헛기침을 한다. 그리고 예의 그 구슬 굴러가는 중저음 보이스로 말한다. 


 그래. 솔직히 말할게. 거짓말하고 싶지 않아. 네가 좋았어. 젊고 예쁘고 똑똑하고 당당한 네가 좋았어. 처음엔 괜찮은 여직원으로, 그러다 여자로 좋아진 거지. 그러나 널 안을 수 없었어. 잘못하면 내가 가진 모든 걸 빼앗길 수 있기에. 그래서 스스로를 속이기로 한 거야. 나 자신을 속일 명분이 필요했지. 너를 좋아하거나 사랑한 게 아니라 그저 한때 함께 놀았던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한 거지. 그럴만한 명분이 필요했어. 너와의 거래. 승진을 대가로 한 너와의 거래를 생각해 낸 거지. 그러면 우리 관계는 사랑이 아니라 그렇고 그런 평범한 직장인들 간의 불륜이 되는 거잖아. 그랬더니 용기가 생기더군. 너에게 다가갈 용기, 너를 만질 용기, 너를 느낄 용기 말이야. 좋았어. 참을 수 없을 만큼. 내 인생에서 가장 짜릿한 뭔가를 느꼈어. 그러면서 나를 속였지.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이것은 거래라고. 난 결코 비이성적인 감정에 휩쓸려 일을 망칠 바보는 아니라고. 그렇게 나 스스로를 속였지. 그럴수록 괴로웠어. 사랑을 부인할수록 상실감이 컸지. 어쨌거나 그런 상태도 오래가지 못했어. 얼마 전 경고를 받았어. 이사회 멤버로부터. 자중하라는 메시지였지. 밖에서 안 좋은 얘기가 들린다고 했어. 정신이 번쩍 들었지. 네게 했던 그 모든 행동들, 내 경솔했던 약속들이 모두 후회됐어. 사랑에 눈이 멀어 정신이 없었던 나를 자책했지. 내 잘못이야. 처음부터. 내 사랑이, 내 과도한 집착이 일을 이렇게 만든 거야. 너에게도, 가족에게도, 나를 응원해 준 많은 사람들에게도 모두 큰 실망을 줬지. 네가 나를 뭐라고 비난하고 원망해도 할 말이 없어.      


 예기치 못한 나기우의 고백. 왕빛나는 또다시 혼란스러운 감정의 소용돌이를 경험한다. 응당 분노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애틋하고 가련한 감정이 솟아오르는 걸 느낀다. 한때 추앙하고, 사랑하고, 존경했던 남자의 연약한 모습에 마음이 흔들린다. 한 번도 일탈해 본 적 없는 바른생활 사나이, 최고에 올랐지만 가장 기본적인 감정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어설픈 완벽남의 실체. 그런 모습을 볼 때의 허탈감과 그런 남자를 본능적으로 보호해주고 싶은 모성애의 모순적 대치. 왕빛나는 결국 자신의 마음이 후자 쪽으로 기우는 것을 발견한다. 그래서 말한다. 그렇게 나를 사랑하고 원했다면 그냥 말하지 그랬어요. 전 조건 없이 당신을 사랑할 준비가 돼 있었는데. 당신에게 모든 걸 감사하게 드리고 싶었는데. 저도 당신을 안고 싶어 얼마나 애태웠는데. 그런데 왜 그런 마음에도 없는 짓을 한 건가요. 그러나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다. 이제와 그런 얘길 한 들 다 무슨 소용인가.      


 그러나 그런 종잡을 수 없는 생각의 흐름 끝에서 분노와 경멸을 발견한다. 배신감이라고나 해야 할까. 여자를 사랑하기 위해 자신을 속일 수밖에 없었다는 말도 안 되는 궤변, 그 이유가 자신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은 막기 위해서였다는 구차한 변명, 결국 자신이 얻는 것을 갖기 위해 연약한 상대를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자신에겐 미리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줬다는 용서할 수 없는 이기주의적 행동. 그녀는 특히 나기우가 ‘한때 함께 놀았던’이라는 표현을 쓴 데 대해 치유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어쨌거나 이미 돌아갈 수 없는 길을 떠난 두 사람. 나기우는 왕빛나를 배신했고, 왕빛나는 나기우라는 사내를 더 이상 신뢰할 수 없게 됐다. 이제 남은 것은 어느 쪽으로 상황을 정리하느냐는 문제뿐. 왕빛나는 자신이 칼자루를 쥐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둘 다 벼랑으로 떨어질지, 아니면 그나마 서로 가장 상처받지 않는 쪽으로 상황을 정리할지, 두 사람의 운명을 어느 쪽으로 보낼지는 오직 그녀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사실 나기우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다. 그처럼 성공한 중년들에겐 평판이 생명보다 중요하다. 나기우는 ‘S전자 내 경영진 관련 불미스러운 소문’ ‘나모 사장 사내 여직원과의 불륜설’ 등 몇 줄만 인터넷 언론과 SNS에 떠도 치명상을 입을 수밖에 없다. 나기우 같은 유명인이나 셀럽에겐 팩트나 진실이 중요하지 않다. 대중적 인식과 이미지가 더 중요한 법이다. 그런 소문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주변 관리가 안된다는 반증이다. 탈락감이라는 얘기다.     


 그렇다고 아무나 몇 자 긁는다고 나기우를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는 게 아니다. 나기우의 경우는 아직 설만 분분할 뿐 확인된 게 없다. 그동안 나기우의 경쟁자들이 섣불리 의혹을 가지고 공격하지 못한 이유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일은 안 하고 정치만 한다’는 역풍을 맞을 수 있다. 그러나 왕빛나가 직접 나선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나기우는 왕빛나의 한마디 만으로 돌이킬 수 없는 치명타를 입고 업계서 쫓겨날 것이다. 물론 왕빛나도 S전자를 포기해야 하는 희생이 뒤따르겠지만.     


 왕빛나는 그런 시나리오를 진지하게 생각할 만큼 바보가 아니다. 나기우의 배신에 치가 떨리지만 그렇다고 논개처럼 적장을 끌어안고 포요투강抱腰投江(허리를 끌어안고 강에 투신함)할 생각은 전혀 없다. 사실 그럴 필요도 없다는 게 점차 명확해져 간다. 왕빛나만 입을 다문다면 모든 게 최선의 시나리오로 변할 가능성이 커졌다. 사건을 이쯤에서 묻는다면, 나기우는 잠시 미색에 빠져 정신 못 차리다 제자리로 돌아간 능력 있는 CEO로 남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일은 망각의 강 속으로 사라져 버리기 마련이므로. 언제나처럼. 왕빛나 역시 그간의 구설수만 견딘다면 입을 다문 대가로 S전자에서 승승장구하게 될 것이다. 기사회생한 나기우의 보호를 받으면서.      


 뭘 믿고 그렇게 확신하냐고. 나기우가 또 배신한다면? 그런 염문 자체를 부인한다면? 왕빛나를 상사를 꼬신 꽃뱀으로 몬다면? 왕빛나를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면? 그러나 그녀는 알고 있다. 나기우가 결코 다시는 자신을 배신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스마트워치. 필승의 카드가 그녀 손안에 있는 한 이제 배신은 바로 죽음이라는 사실을. 그렇다. 왕빛나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나기우의 방에 들어간 첫날부터 녹음을 시작했던 것이다. 거기엔 그와 함께 했던 모든 시간들이 고스란히 녹취돼 있다. 나기우가 승진 얘기를 꺼내면서 육체관계를 유도한 그날의 일부터 왕빛나에 대한 감정을 고백한 오늘 내용까지 모두. 이제 그녀의 스마트워치는 S전자에서 가장 파워풀한, 가장 든든한 승진 담보물이 된 것이다.          


 왕빛나는 나기우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사라진 마음 한편에 성공에 대한 야망이 꾸물꾸물 들어차는 걸 느낀다. 나기우의 고백은 의외였고 다소 기분 나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승진과 성공으로 가는 가장 확실한 지름길을 열어준 셈이 됐다. 생각이 그에 미치자 왕빛나의 얼굴에 비로소 미소가 퍼진다. 그녀는 생각한다. 승진은 이제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을’ 인생 탈출도 마찬가지이고. 서두를 필요도 없다고. 시간은 그녀 편이라고. 그러기 위해선 나기우가 계속 사장직을 유지해야 한다고. 그가 아니라 그녀를 위해.     


 왕빛나는 조용히 나기우를 응시한다. 나기우는 그 침묵의 의미가 궁금하다. 왕빛나가 드디어 입을 뗀다. 마치 승리를 선포하는 전쟁의 여신처럼. 자신의 시계를 두드리면서.      


앞으로는 제가 올라오고 싶을 때 올라올게요. 기다리세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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