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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리천 Oct 07. 2023

엠지, 승진을 쟁취하다②

오피스빌런은 없다(4)


회사가 두 사람 일로 술렁거리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잘생기고 유능한 중년 유부남 CEO와 젊고 예쁜 여사원 간의 잦은 만남은 술자리 안주거리와 휴식시간 뒷담화 거리로 안성맞춤이었다. 먼저 나이 지긋한 말년 간부들이 불평을 시작했다. 평생 S전자를 다니면서 CEO와 그렇게 독대한 일은커녕 개인적으로 만난 경우가 드물다고 투덜댔다. 중간 간부들은 “평사원이 왕빛나처럼 CEO를 독대하는 건 꿈에서 죽은 부모를 업고 다니는 꿈을 한 달 정도 꿔야 가능한 일 아니겠냐”라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평사원들의 반응은 좀 더 격렬했다. 여사원들은 “나댈 때부터 그럴 줄 알았다” “보통내기가 아니잖아” “꽃뱀이야 아주”라며 왕빛나를 난도질했고, 또래 젊은 남자 직원들은 “예쁜 꽃이 손을 타기 마련” “사장이 그럴 줄 몰랐다. 개**”라며 자신들의 기회가 강탈한 나기우에 대해 분개했다. 마치 두 사람이 벌써 무슨 일을 벌였거나, 내연관계가 된 것처럼 떠들었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찮았다. “사심이 있다면 회사에서 그렇게 대놓고 만나겠느냐” “딴생각 있다면 저녁에 따로 불렀겠지” “왕빛나가 좀 튀는 아이야. 사장도 엠지 세대 얘기 듣고 싶어 그러시겠지. 괜한 시샘 말고 일이나 하셔” 그래도 두 사람을 둘러싼 소문과 억측은 입과 입을 거치면서 눈덩이처럼 커져갔다. 소문은 이제 S전자라는 담벼락을 넘어 세상으로 흘러나가기 시작했다.      


 그랬거나 어쨌거나 왕빛나는 나기우가 좋았다. 그를 만나면 그녀의 신산했던 삶이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불행 끝, 행복 시작’을 알리는 축포 같다고나 할까. 그랬다. 왕빛나에겐 온몸으로 견뎌냈던 28년의 시간이 있었다. 출발부터 간단치 않았던 그녀의 인생. 왕빛나는 나라가 파산 직전까지 몰렸던 IMF 외환위기 직전(1996년) 태어났다. 그녀가 막 걷기 시작했을 때 구조조정과 실업, 고금리의 태풍이 몰아쳤다. 건설사를 다니며 풍족한 가정을 이끌던 아버지가 갑자기 일자리를 잃을 위기에 몰렸다. 밤마다 부서장과 임원, 사장을 쫓아다니며 충성 맹세를 하고서야 겨우 책상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왕빛나가 중학교에 들어갈 때쯤 글로벌 금융위기가 다시 닥쳤고, 이번엔 회사가 버티지 못했다. 아빠는 직장을 잃었고, 몇 푼 안 되는 퇴직금으로 엄마와 함께 치킨 집을 차렸다.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고, 왕빛나는 독하게 공부했다. 명문 Y대를 들어갔으나 4년 내내 과외와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보태야 했다.      


 그러나 다시 찾아온 위기. 이번엔 졸업하자마자 온 나라, 아니 온 세계가 바이러스 팬데믹으로 셧다운 됐다. 취업 시장도 꽁꽁 얼어붙었다. 방법이 없었다. 선배들을 통해 코딱지만 한 IT개발 프로젝트를 수주하며 근근이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마저도 녹록지 않았다. 세상은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새내기에게 냉혹했다. 일을 시켜놓고 푼돈을 떼먹는 경우도 있었고, 허락도 없이 그의 제품을 다른 곳에 쓰거나 유용하는 일도 있었다. 일자리를 구할 때나, 작품을 팔 때 상대로부터 대놓고 무시당하고, 부당한 지시를 받은 게 일상이었다. 그녀에게 거래를 트는 조건으로 은밀한 관계를 요구하는 남자들도 있었다. 지금이라면 모두 소송감이었으나 그때는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냥 앉아서 당하고 참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런 삶이 그녀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세상에 속고 치이는 과정을 거치면서 절대 ‘을’로 살지 않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면서, 특히 부당한 압력이나 지시에 당하면서 살지 않겠다고 다짐 또 다짐했다. 문제는 ‘어떻게’였다. 어떻게 갑자기 ‘을’ 인생을 갑으로 바꿔놓을 수 있을까. 그녀는 남들과 다른 길, 지름길을 찾기로 했다.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연구했다. 100권이 넘은 자기 계발서를 읽고 유튜브를 보고 전문가 온라인 강의를 들었다. 전문가들은 인생을 바꾸려면 자기 자신부터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말투부터 표정, 손짓과 발짓까지 모두 뜯어고쳤다. 왕빛나는 그걸 마케팅, 포장이라고 생각했다. 콘텐츠가 더 잘 보이게 보기 좋게 포장하는 기술, 자신을 더 돋보이게 하는 대인관계 기술, 주위가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하는 처세술. 그녀는 졸업 후 3년간 그런 내공을 키우는 데 집중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다. S전자 입사 과정에서 갈고닦은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진심이라 하기엔 약간 오글거리고 과하다는 느낌의 멘트와 동작, 표정까지도 자신 있게 연기했다. 효과가 있었다. 그녀는 합격했고, 자신감을 얻었다. 그다음은 직장에서 빨리 승진하는, 성공에 이르는 지름길을 찾는 것이다. 그녀는 나기우를 찍었다. 최고 인사권자인 사장을 곧바로 공략하기로 했다. 마침 타운홀 미팅 일정이 공지됐고, 그녀는 일과 후 열흘 넘게 스피치학원을 다녔다. 다시 모든 멘트와 표정, 그리고 제스처를 손질했다. 전략은 또 성공했다. 나기우는 그녀를 불렀고 갑으로 가는 가장 빠른 패스를 발급했다. 모든 게 너무 환상적이어서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행복하고 황홀했다. 적어도 승진 명단을 보기 몇 시간 전까지는 말이다.          


 왕빛나가 사장실 전화를 받지 않고 바로 올라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나 비서실 직원들 아무도 그녀를 잡지 않았다. 사장이 직접 연락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왕빛나는 상관할 바 아니었다. 그녀가 신경 써야 할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녀는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사장 집무실 문을 열고 노크했다. 언제나처럼. 그러나 이번엔 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바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때 문득 한 달 반전쯤 나기우로부터 처음 승진 얘기를 들었던 때가 떠오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날이 원인이었고, 오늘은 그 결론이 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날 왕빛나는 처음으로 나기우와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나기우가 들어오는 그녀를 자신 옆으로 불러 앉혔다. 어느새 그렇게 나란히 앉는 것도 어색하지 않게 된 두 사람. 그리고 인사 얘기가 나왔다. 곧 승진 인사가 있을 것이라고. 왕빛나 씨 평이 좋다고. 그래서 이번에 승진자 명단에 들어갈 것이라고 했다. 왕빛나는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기쁜 표정을 숨겼다. 그리고 차분하게 “예쁘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나기우가 왕빛나의 손을 바라봤다. 손가락이 길고 예쁘다고 했다. 그 유리구슬 같은 중저음 마약 보이스로. 달콤하고 향긋한 향수 냄새가 풍겨왔다. 중년의 향기. 아찔했다. 그리고 수줍은 애무. 그의 하얗고 긴 손가락이 천천히 왕빛나의 손톱과 손가락, 손등을 타기 시작했다. 왕빛나는 눈을 감았다. 꼼짝 못 했다. 아니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을 오롯이 느끼고 싶었다. 이미 오랫동안 꿈꿔 온 장면이다. 저 남자와의 키스, 섹스는 어떨까. 얼마나 황홀할까. 상상하고 몸부림쳐왔다. 그러나 이렇게 정신이 몽롱해지고 힘이 빠질 줄 몰랐다. 그의 손이 닿을 때마다 마치 전신이 감전된 것처럼 찌릿찌릿했다. 온몸이 떨렸다. 그런 왕빛나의 반응을 나기우는 천천히 음미하는 바라봤다. 왕빛나는 얼굴이 화끈거리고 온몸이 뜨거워졌다. 참을 수 없었다. 그녀의 샘이 촉촉하게 젖어들다 폭발하고 있었다.  


 그다음 주에도 사장실로 올라갔다. 면담 시간이 조금 더 길어졌고 둘 사이는 더 가까워졌다. 나기우의 손이 어느새 허리를 휘감았다. 서로 숨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다. 거부할 수 없는 유혹. 길고 달콤한 키스. 왕빛나는 키스가 그렇게 자극적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남자와의 첫 키스인 데다 상대가 동경해 마지않는 완벽남이어서 더 그랬을 것이다. 왕빛나는 신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리고 하마터면 나기우에게 매달릴 뻔했다. 더 이상 참기 힘들다고. 해달라고. 나기우는 서두르지 않았다. 천천히 부드럽게 그러나 집요하게 여자를 탐닉했다. 왕빛나는 새로운 세상을 맛봤고, 그 달콤한 여정의 끝을 상상했다. 온몸이 그 상상만으로 터져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폭발의 끝에 알 수 없는 후회와 공포, 그리고 두려움이 몰려왔다. 결코 넘봐서는 안 될, 기대해서는 안 될 그 무언가를 원하는 자신을 본 것이다.       


 둘은 긴 만족감으로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가뿐 숨을 내쉬면서. 왕빛나는 섹스가 아니어도 이렇게 큰 쾌감을 맛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녀뿐 아니라 나기우도 쉬이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서로 붉게 상기된 얼굴을 감추기 위해, 달아오른 몸을 식히기 위해 10분 넘게 기다려야 했다. 밖으로 나가야 하는 왕빛나는 곤혹스러웠다. 붉게 상기된 얼굴은 화장으로도 잘 가려지지 않았다. 왕빛나는 최대한 태연한 모습으로 사장실을 나섰다. 오랫동안 갈고닦은 연기력이 효과를 냈다. 그렇게 한 달 가까이가 훌쩍 지났다. 회사 일도, 사장과의 관계도 별 탈 없이 진행돼 가는 듯했다. 이제 승진 소식만 기다리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다 2주 전부터 사장실로부터 연락이 뚝 끊긴 것이다. 그리고 절망적 인사 소식.    

 


3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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