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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리천 Oct 05. 2023

상사라는 죄인罪人

오피스빌런은 없다(3)

          

해외 주재원 생활을 하다 입국해 갓 부장을 단 나꼰대씨. 그는 요즘 달라진 직장 문화에 적응하느라 진땀을 흘린다. 4년 만에 확 바뀐 한국 사회. 10여 년 전 잠깐 연수 나갔다 왔을 때도 갑작스러운 막걸리 열풍에 깜짝 놀랐던 적이 있었다.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어느새 엠지 세대가 장악해 버린 듯한 한국 사회. 어디를 가든 모두가 엠지 엠지 타령이다. 엠지가 대체 어쨌다고. 그런 호들갑이 영 어색하고 낯설다.  

    

 가장 적응이 안되는게 회식문화다. 한국을 떠나기 전만 해도 시도 때도 없었던 게 회식이다. 퇴근 전 부서장이 한잔하고 갈까 하면 그게 끝이었다. 약속 취소하고, 집에 연락하고,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그리고 밤새 부어라 마셔라. 그런데 이제 완전히 바뀌었다. 바뀐 정도가 아니라 사라져 가는 문화라고나 할까. 바야흐로 회식의 멸종이다.        


 그의 부서만 해도 반 년동안 딱 한번 회식했다. 나꼰대 부장 인사 발령 직후였다. 첫인사니 만큼 전체 직원들이 모두 모였다. 모두 즐겁게 마시고 헤어졌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그다음이 없었다. 이유가 있다. 이런 일이 있었다. 부서 회식을 가진후 얼마안돼 다시 회식을 제안한 일이 있었다. 마침 점심 약속이 없어 “식사약속 없으면 같이 밥이나 먹으러 갈까”라고 말한 것이다. 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싸늘해진 분위기. 부서 단톡방에서는 폭풍 같은 톡의 전송이 시작했다. 밥을 같이 먹자고? 지금 이 시간에? 회식하자는 거임? 아씨. 나 약속 있는데. 제정신 나간 거 아님? 점심 직전에 저런 얘길? 아메리카서 온 줄 알았더니 헬조선 출신? 완전 꼰대 아님?     


 갑분싸(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진다는 뜻의 축약어)에 놀란 나꼰대 부장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변하려는 순간, ‘오랜 심복’ 나소심 차장은 잽싸게 그의 손을 잡고 사무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아직도 어리둥절해하는 나 부장에게 최대한 예의를 갖춰 지난 4년간 달라진 사무실 문화에 대해 집중 교육을 시작했다. ‘흥분 가라앉히고 이제부터 잘 들어라’는 식으로 흠흠하는 헛기침과 함께. 이날 나소심 차장이 점심 메뉴인 닭 한 마리 정식과 소주를 앞에 두고 장장 2시간 가까이 열변을 토했다는 ‘슬기로운 직장생활 가이드’의 내용은 대충 이렇다.      


 회식은 전처럼 갑가지 제안하면 안 된다. 최대한 부하 직원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게 좋다. 최소 한 달 전 공지가 정석이다. 모두 일정을 맞출 여유를 줘야 한다. 날짜 잡기가 힘들면 그냥 깔끔하게 포기하는 게 낫다. 무리하게 추진하다 갑질 또는 직장 내 괴롭힘으로 투서 들어가기 딱 좋다. 그래도 정 회식을 하고 싶다면 부 전체 회식보다 팀별 삼삼오오 회식이 좋다. 저녁보다는 점심이 낫고, 회식을 시작하면 메뉴는 정하지 말고 막내에게 맡겨라. 그리고 불가피하게 저녁을 하게 되면 9시 전에 끝. 2차는 금지. 만약 2차를 가더라도 부장은 빠지고 법카를 주는 것으로 끝내야 한다. 그 정도는 해줘야 부서 분위기 신경 쓰는 부서장으로 인정받게 된다.      


 나꼰대 부장은 점심때마다 부장에게 끌려 다니며 같은 메뉴를 토할 때까지 먹었던 초년병 시절을 생각하며 눈물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나소심 차장의 교육은 그러나 끝없이 계속됐다. 이번엔 식후 커피 에티켓.      


 밥 먹은 후 커피는 먹을 수도 안 먹을 수도 있다. 그러나 먹는다면 커피숍에 앉아서 먹지 말고 ‘테이크 아웃’을 하는 게 좋다. 몇몇 ‘몰지각’(나 차장은 그렇게 표현하지 않았지만 그런 뉘앙스를 듬뿍 묻혀 얘기했다)한 부장들이 식사 때 줄기장창 혼자 떠들다 또 커피 마시자며 일어서는 만행을 저지르곤 한다. 이런 일이 알려지면 어떻게 될까. 사내에서 기피대상 1호라는 라떼르가 바로 붙게 되는 것이다.      


 커피 에티켓 하나 더. 테이크아웃 커피를 받아 들었더라도 곧바로 회사로 들어가는 것은 삼가는 게 좋다. 개념 없다는 소리를 듣기 딱 좋다. 부하 직원들끼리 좀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시간을 내주는 게 부서장의 센스다. 할 일 없으면 그냥 커피 들고 회사 주위 산책이라도 하라.  부장이 들어가자마자 갑자기 분위기 싸늘해지는 걸 알고 있지 않나.      


 나소심의 지적질은 끊기줄을 모르고 계속된다. 오랜만에 선배를 앉혀놓고 가르치는 게 흥이 나서인지, 끝도 없이 이어진다. 이번엔 퇴근 시간에 대한 강의.      


 퇴근도 되도록 빨리 나가는 게 좋다. 부하 직원들이 눈치 보지 않고 퇴근할 수 있게 부장이 알아서 처신해줘야 한다. 만약 일찍 퇴근하기 어려울 때는 방법이 있다. ‘저녁약속 있어 나가니 알아서들 퇴근하세요’라고 자리를 비켜준다. 사실 저녁약속 없어 구내식당에서 혼밥을 먹더라도 퇴근시간 자리를 비켜주는 게 상사의 센스다. 그러나 예외도 있다. 요즘 들어온 엠지 직원들은 상사들의 퇴근 시간에 상관없이 시간 되면 ‘칼퇴’한다. 심지어는 인사도 안 한다. 그런 사무실이라면 굳이 부장이 구내식당서 혼밥 먹을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이쯤 되니 나꼰대 부장은 내친김에 궁금한 점도 확인하고 싶다. 슬기로운 직장생활을 주제로 부서장과 부차장간 대화는 이제 학술대회처럼 진지하고 심도 있는 경지에 다다른다. 


 -좋아. 그런 정도라면 얼마든지 눈치껏 해줄 수 있다. 꼭 필요하다면 말이야. 그런데 요즘 밑에 얘들 이해하려 해도 이해 안 될 때가 있어. 일을 시켰는데 못하겠다고 하잖아. 이게 말이 되나. 

  “아, 부장님 말씀 무슨 소린지 압니다. 정말 문제죠. 요즘 얘들 정말. 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살살 달래서 일을 하게 만드는 수밖에. 아무리 근거가 있더라도 받아들이는 쪽에서 부당한 지시로 받아버리면 부장님만 손해예요. 그래서 중요한 게 말투예요. 전처럼 ‘누구 씨 이거 언제까지 해와’라는 식은 안 돼요. 절대로. 대신 의견을 묻는 식으로. "00 씨. 이거 이런저런 이유로 필요한데 언제까지 해줄 수 있겠어" 이런 식이면 나중에 토를 달기 힘들죠. 하나 더. 부장님 모르시겠지만 부장님 사무실에서 하는 얘기는 모두 전 부서로 생중계된다고 보면 돼요. 얘들이 숨소리까지 아마 카톡으로 실어 나를 걸요. 위압적인 말투, 정말 위험합니다.”

-흠, 그 정도란 말이지? 그럼 그렇게 공손하게 얘기했는데도 못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지. 그제 있었던 일 기억나지? 막내가 ‘지금도 일 많아서 힘들겠다’고 딱 잘라 얘기한 것. 

 “네. 그럼요. 기억하지요. 아마 그 일도 사내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퍼졌을 겁니다. 어제는 ‘너네 부서 왜 그러냐’는 얘기까지 들었어요. 아무튼, 요즘 얘들 문제입니다. 일 시키기가 무서워요. 새로운 일은 고사하고, 맡은 일조차 제대로 해보려는 얘가 없어요. 하기사 그동안 집에서 금이야 옥이야 키웠으니. 먹고살기도 아쉬운 게 없고. 그러니 문제가 생기면 부모에게 쪼르르 달려가 얘기하기나 하고…. 우리 부서는 아니지만 옆 부서에서는 부서 막내 어머니가 사장님한테 직접 전화했다잖아요. 학부모 상담하듯 자기 아들 잘 부탁했다고 합니다. 내참. 요즘 애들이 이래요. 일을 시켜서 안되면 참고 계시다가 다음 인사 때 조용히 평가하시거나 전출시키면 됩니다. 그리고 그제 말하신 일은 제가 일단 김착해 대리에게 얘기해서 처리하는 쪽으로 정리했습니다.”     


 두 사람 간 사내 문화 대토론은 점심시간이 다 끝나가는 대도 끝날 줄을 모른다. 나꼰대 부장은 들으면 들을수록 과연 이 회사가 20년 넘게 뼈를 묻었던 그 조직 맞나 싶을 정도다. 일부는 바람직한 것 같지만 일부는 얼토당토 하지 않다. 조직 발전에 도움은커녕 암세포가 이식된 것 같은 느낌까지 든다. 나 부장은 혀를 차면서도, 앞으로 참고를 위해 필기라도 해야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다음은 나소심 차장이 전한 엠지 관련 황당 에피소드들.      


 좀이뻐 과장은 외모뿐 아니라 성격도 좋은 직원이다. 12년 차로 일도 잘하고, 위아래로 다 관계가 원만하다. 엠지들도 그녀를 곧잘 따른다. 그런 그녀도 요즘은 ‘엠지 피로증후군’을 호소한다. 이런 일이 있었다. 이제 입사 4개월 차인 나뻔뻔은 평소 코맹맹이 소리로 귀염을 떤다. 항상 밝고 명랑해 이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요즘은 해도 너무한다고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뻔뻔씨, 지금 뭐 해. 나 좀 도와줄 수 있어”하면 “아 좀이뻐 과장님, 저 지금 놀고 있어요. 일하기 싫어요. 쉿, 비밀이에요”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한다.(물론 톡이다. 엠지세대와의 대화는 무조건 톡이 기본이니까). 장난하는 건가 싶어 좀 뭐라 해줘야겠다고 생각하고 큰 소리로 한마디 한다. “뻔뻔씨, 할 일 없는 것 같은데 이리 좀 와볼래요”라고 하면 “엇 과장님 왜 이러세요. 큰 소리로 말하지 마세요!!”라고 한다. 거기까지도 그럭저럭 넘어간다. 더 황당한 것은 “과장님, 이리 와 보세요. 이거 정말 너무 웃겨요”라며 같이 놀자고 보채기까지 한다. 그뿐 아니다. 좀 손이 가는 일을 시키면 “저 이거 못하겠어요. 히잉. 과장님이 도와주세요”라고 일을 떠넘기기까지 한다. 이게 회사인지 집인지, 귀엽다고 봐주는 것도 한도가 있지. 마냥 이쁘다고 오냐오냐 할 수도 없고, 대체 어디까지 어린양을 받아줘야 할지 난감하다는 게 좀이뻐 과장의 고민이다.     


 그래도 나뻔뻔의 경우는 좀 귀엽기나 하지, 무서운 막가파식 엠지들도 많다. 과거 운동권 정부가 오냐오냐하며 10년 넘게 학생권리 운운하며 아이들을 감싸서 인지, 직장에 들어와서도 똥인지 된장인지 모르고 근로자의 권리를 외치며 회사를 협박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인사팀에 있는 박원칙 과장은 최근 노조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노조에 한 젊은 조합원이 와 있는데 그가 원하는 것을 지금 당장 들어주지 않으면 큰일이 나게 생겼다는 것이다. 젊은 조합원의 주장은 이랬다. 며칠 전 부서 선배들과 저녁에 술을 한잔 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는 길에 가만 생각해 보니 기분이 나쁘더라는 것이다. 선배가 ‘네가 여자라서 잘 모르는 모양인데….’라며 부부생활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웃기는 에피소드여서 모두가 웃고 끝났다. 그런데 집에 오는 길에 생각해 보니 기분이 영 찝찝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일을 다른 여자 동료들과 얘기했더니, 요즘 그런 성차별적 인식을 갖고 있는 남자가 어디 있느냐며 분개하더라는 것. 결국 그 일은 입에 입을 거치며 일파만파 커져 노조로까지 올라갔다. 해당 여직원은 그날 아침 노동청 고발장을 팩스 앞에 놓고 사측과 해당자의 사과를 요구했다. 안 들어주면 곧바로 전송 버튼을 누르겠다고 협박까지 하면서 말이다. 결국 해당 선배와 인사팀장이 가서 싹싹 빌고 사과하는 선에서 일이 마무리됐다.      

 나꼰대 부장은 숨이 턱 막히는 걸 느꼈다. 곳곳이 이렇게 지뢰밭인지 몰랐다. 위아래 모두 언제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 폭탄들로 꽉 차있다. 항상 폭발 대기인 임원들, 언제 어떻게 들고일어날지 모르는 부하 직원들, 특히 SNS와 신고 정신으로 똘똘 뭉쳐 있는 시한폭탄 엠지 세대까지. 하루라도 조용히 지나가기를 바라며 조심조심, 돌다리도 두드리며 지날 수밖에 없는 게 요즘 회사 생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뿐 아니다. 나꼰대 부장처럼 일찍 승진해 선임 선배들까지 한 부서에서 모셔야 하는 경우는 어려움이 가중된다. 한 번은 “네가 부장 되더니 뵈는 게 없냐. 내가 코흘리개일 때부터 너를 업어 키웠어. 자식아. 그런 네가 나를 무시해”라며 한판 뜨자고 술자리 테이블에 올라간 선배도 있었다. 그래도 대놓고 덤비는 선배는 나은 편이다. 조용히 여기저기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며 나꼰대 뒷담화를 하는 비겁한 선배들이 한 둘이 아니다.      


 회사 일이 힘든 게 아니다. 일은 어떻게든 되게 돼 있다. 잘할 수도,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은 다르다. 나쁜 사람, 되바라진 사람, 독한 사람, 엉뚱한 사람들과의 조직 생활은 악몽 그 자체다. 그렇다고 지금이 특별한 것도 아니다. 과거에도 그런 사람들은 늘 있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그런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졌다는 것이다. 이제 그런 사람들이 위아래, 앞뒤 가리지 않고 떠들고 다닌다. 조금만 비위가 상하고 맘에 안 들면 여기저기 쑤시고 다닌다. 없는 문제도 만들어낸다. 개중에는 노조에 들어가 상사들을 공격하는 경우도 있다. 과거 숨도 못 쉬던 인간들이 이제 통제 불가한 막강한 존재들이 돼 버린 것이다. 그런 불합리와 모순을 오롯이 온몸으로 견뎌야 하는 게 나꼰대 같은 중간 간부들의 몫이다.       


 나꼰대 부장은 출근할 때마다 다짐한다. 그냥 이 순간부터 간 쓸게 자존심 다 버리자고. 인간 나꼰대는 없다고. 퇴근하는 시간까지는 나는 내가 아니라고. 나는 상사도 부장도 아니라고. 그냥 위아래에 끼인 세대, 회사의 죄인일 뿐이라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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