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 인생’이라고 한다. 30년 공부하고, 30년 일하고, 30년 노후를 즐기는 삶. 25년씩 3번 돌아가는 ‘325 인생’에서 각 단계를 거치는 시간이 조금씩 늘었다. 그런데 일해야 하는 시간은 계속 더 늘어날 것 같다. 저출산 고령화로 늙을 때까지 더 일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고 한다. 그래서 인생 2 모작이네 정년연장이네 하는 얘기가 나온 지 오래다. 이러다가는 죽을 때까지 일해야 할지 모른다는 우스개 소리가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인들은 일을 많이 한다. 정말 쉼 없이 일한다. 죽는지 모르고 밤낮없이 일한다. 죽기 직전까지 일하는 사람도 있다. 곧 죽는다고 선고를 받고도 일을 못 놓는 사람도 있다. 정말 한국인들은 일에 미쳐 산다. 통계로도 세계에서 가장 오래 일하는 축에 든다. ‘선진국 클럽’이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 36개국 중 한국보다 오래 일하는 나라는 멕시코와 코스타리카, 칠레뿐이다. 52시간제 도입으로 근로시간이 조금 줄긴 했다. 소확행 워라밸 욜로 붐으로 일보다 행복을 더 중시 여기는 사람이 늘고 있기도 하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야근을 밥 먹듯하고, 필요하면 주말 근무도 마다하지 않는 게 한국인이다.
한국인들은 그렇게 일을 좋아하면서 직장에서 행복하지 못하다. 둘 중 하나는 “직장생활이 만족스럽지 않다” “행복하지 않다”라고 답한다. 자기 일에 만족하고 몰입하는 사람은 5명 중 한 명에 불과하다는 설문 조사도 있다. 왜 그럴까. 죽어라고 일하는데 왜 행복하지 않을까. 인생에서 가장 활동적이고 빛나는 시간을 직장에 쏟아부으며 일하는 데 말이다.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직장 동료들과 함께 보내며 직장을 집처럼 여기고 일하는 데 말이다. 그런 직장에서 행복하지 못하면 도대체 어디서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이유가 뭘까. 직장이 후져서? 아니면 사람들이 나빠서?
누구나 사회생활 시작할 때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직장에서는 동료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게 좋다고. 필자도 그랬다. 선배와 가족들로부터 그런 얘기를 듣고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직장은 돈 버는 곳이고, 냉혹한 곳이니 너무 마음 주지 말고, 적당히 거리를 두고, 너무 튀지 않게 행동하라는 충고를 들었다. 그래야 사람 좋다는 평가를 받고 오히려 성과도 내고 승진도 잘할 수 있다고. 이리저리 휩쓸리고 어울리는 사람치고 잘되는 사람 없다고.
그래서 직장 동료들과 적당히 거리 두고, 적당히 친절하게 대한다. 일도 적당히 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극소수다. 대부분은 직장과 거리를 둔다.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을 아까워한다. 블라인드와 사내 게시판을 보라. 직장에 대한 불만이 차고 넘친다. 가장 큰 불만은 직장 동료들에 대한 것이다. 인간들이 싫다고 한다. 들볶고, 괴롭히고, 무시해서 짜증 난다고 한다. 그러면서 너도나도 이직移職을 꿈꾼다. 신神의 직장이라는 S전자 직원들도, 그렇게 가기 힘들다는 네카라쿠배처럼 번쩍번쩍하는 빅테크 기업 사원들도, ‘신도 부러워하는 직장’이라는 공공기관과 정부 부처 공무원들도 절 반 가량이 이직을 원한다고 한다.
이쯤 해서 묻지 않을 수 없다. 어딘가 이상하지 않은가하고. 직장에서는 ‘적당히’ 살길 원하면서, 인간적이고 상냥한 동료들과 함께 일하기 위해 이직한다는게 말이다. 또 자신은 적당히 일하길 원하면서 회사가 비전없고, 월급도 짜다며 떠나고 싶어한다는 것도 말이 안된다. 어쩌면 처음부터 직장생활을 대하는 기본 전제가 잘못돼 있었던 것은 아닐까. 가정이나 동창회, 동호회, 친구모임처럼 직장에서도 ‘적당히’가 아니라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협력해야 행복해지는 것은 아닐까. 그래야 죽어라 일하는 직장생활에서 비로소 삶의 의미를 느끼고, 보람을 찾고,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올바른 직장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이러저러해야 한다고 훈계하는 지침서 같은 내용은 아니다. 사실 그런 책들은 밖에 부지기수, 시쳇말로 ‘천지 삐까리’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냥 모든 편견과 선입관, 가이드라인 같은 것을 버리자는 내용이다. 그냥 직장이 돈만 버는 곳이 아니라,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니 그냥 살던 대로 사는 게 옳다는 내용을 담았다. 그렇게 살아가는 수많은 인간 군상群像들을 그려봤다. 특별한 영웅도, 오피스빌런도 없는 그저 보통 사람들이 모여하는 곳의 이야기다. 사람들이 모여 숨 쉬고, 기대고, 부대끼고, 애증 하며 사는 얘기를 써봤다. 직장만의 특별한 성공 원칙이나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금기는 처음부터 없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밖에서 잘하는 사람이 직장에서도 잘 나가고, 가족이나 친구사이, 동창회에서 내놓은 사람은 직장에서 대접받기 힘들다. 사람 사는 게 그렇고, 그게 인생의 법칙이다.
책속의 에피소드는 필자가 직접 경험했거나 전해 듣거나 보고 읽은 얘기들을 정리하고 뒤섞고 손질해서 재구성했다. 일부는 흥미를 위해 약간의 조미료를 첨가했다. 일부는 들은 이야기에서 실명만 빼고 있는 그대로 올렸다. 어떤 에피소드는 기억의 파편을 모아 얼기설기 엮어놓기도 했다. 소설 비슷한 것도 있지만, 수필과 에세이도 있고, 넋두리 같은 것도 있다. 모두 팩션(faction)으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에피소드들이 재밌기도 하고, 허탈· 황당하기도 하고, 분노를 자아내기도 하고, 그저 그렇기도 할 것이다. 그저 특별하지 않은 그냥 사람 사는 이야기들이라고 생각하고 읽어줬으면 고맙겠다. 글을 읽고 ‘아 맞아, 직장이란 원래 이런 곳이었어’ ‘그래, 우리 직장만 특별한 곳이 아니었구나’ ‘사람 사는 곳은 어디든 다 비슷해’라고 생각해 준다면 보람 있을 것 같다. 짠내 나는 인간들의 얘기에 공감하면서 조금이나마 직장생활에서 받은 상처를 위로받는다면 좋겠다. 특히 직장생활을 막 시작하는 젊은 세대들이 이 글을 읽고 직장에 대한 편견을 버릴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다.
오늘도 힘든 직장생활을 감내하고, 살아가고 있는 2200만 직장인들을 응원한다.
2023년 9월 끝자락에서
이리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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