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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라미 Oct 09. 2023

아빠가 남기고 간 옷들의 가치

공수래공수거

"야, 죽는 게 그렇게 쉽냐? 안 죽어. 안 죽어."

내가 볼멘소리를 할 때마다 남편이 하는 말이다.


맞다. 그까짓 일 좀 더 했다고, 잠 좀 덜 잤다고 죽지는 않는다.


"사람 참 쉽게 죽더라."

엄마는 젓가락으로 고구마순 볶음을 뒤적거리며 말했다. 아빠가 좋아했던 반찬.


맞다. 아빠는 늘 하던 대로 야구를 봤고, 늘 하던 대로 엄마에게 잔소리를 했다. 그리고는 다음날 새벽 거짓말처럼 세상과 이별했다.


'아, 누구의 말이 맞는 걸까?'


나 역시 쉽게 죽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아직 생의 한가운데에 있으니 끝에 다다르는 것을 미리 두려워하거나 준비하지는 않아도 된다고 여겼다. 하지만 아빠의 마지막을 본 후부터 생각이 달라졌다. 이르기 전까지는 그 무엇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도 죽음을 생각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끝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다.


마지막이 쉽게 올지 아닐지는 결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언제"가 될지 모른다는 점이며, 더욱 확실한 하나는 사람이 죽을 확률은 100%라는 것이다. 이는 곧 우리는 늘 죽음을 곁에 두고 사는 운명임을 시사한다. 삶은 계속 변화하고 요동치기에 한가운데라 여겼던 지점은 하루아침에 끝이 될 수도 있다. 즉,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이 "생의 한가운데"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미다.



아빠 장례식이 끝나고 엄마는 당신의 옷부터 정리했다. 행여 엄마가 하나씩 개키면서 추억이 서린 옷들을 붙잡고 오열할까 봐 걱정했는데, 엄마는 옷에는 별 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다.


대신 엄마는 아빠의 시계, 안경, 그리고 현금 2만 5천원과 맞춰보지 못한 로또가 들어 있는 지갑을 안방 수납장 위에 올려두었다. 이 물건들만 있다면 아빠의 숨결을 느끼기에 충분하다고 했다. 마루에 걸린 가족사진 속에서 아빠가 환하게 웃고 있으니 이 정도면 되었다고 했다.


필요가 없어진 아빠 유품의 대부분은 옷과 신발이었고, 큰 봉지에 나누어 담으니 작은 방에 꽉 들어 찼다. 엄마는 이 무겁고 짐스러운 물건들을 빨리 집밖으로 내보내고 싶어 했다. 상실로 뻥 뚫린 마음에 슬픔이라는 돌덩이가 들어앉았는데, 아빠의 옷들까지 얹어지는 것이 갑갑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다음날 기사님이 오셔서 모두 수거해 가셨고, 엄마는 제야 나아진 듯 보였다.


그날이었을까? 나는 죽음 이후 세상에 남겨질 옷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를 대변하고 드러내주던 옷은 내가 소멸한 이후 그 쓸모를 잃게 된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의 옷은 무게와 부피만으로도 상실의 아픔을 더 무겁게 만들 수 있다. 남겨진 이들이 떠나간 사람의 숨결을 느끼는 건 서랍을 가득 메운 옷이 아니다. 언제든 눈앞에 둘 수 있는 더 작고 가벼운 물건, 고인이 늘 곁에 두고 숨을 불어넣던 것들을 훨씬 더 가치롭게 여긴다.


가치가 소멸되는 것은 옷뿐만이 아닐 것이다. 사은품으로 받은 각종 기기나 도구들, 저렴하다는 이유로 생각 없이 구매했던 생활 용품들, 버리지 못하고 쌓아두었던 각종 서류들, 사두고 읽지도 않은 책들에 이르기까지 남겨진 사람들 곁에 전혀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이 고스란히 머문다. 이는, 어쩌면 나에게조차 필요하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아빠와의 이별은 잠시 비움에 느슨해져 있던 마음을 다잡아주었다. 만약 내가 끝까지 옷들에 파묻혀 살다가 세상과 작별한다면 내 옷들은 방 하나로는 어림 없었을 것이다. 마루를 메우고도 부족해서 발 디딜 틈도 없이 온 집안을 꽉 차게 할지도 몰랐다.


죽을 때는 내 몸뚱이조차 가지고 갈 수 없는 것이 잔인한 인생사다. 자연으로 돌아갈 때, 우리는 옷은커녕 열심히 벌어놓은 돈조차 가지고 갈 수 없다. 몸에 걸친 것, 손에 쥔 것 하나 없이 우주먼지로 흩어진다.

깃털처럼 훌훌 날아가버릴 거면서 남겨진 이들에게 내 물건을 정리할 임무를 맡기는 것은 아무래도 너무 미안할 같다. 상실감으로 꽉 막혀버린 가슴에 "정리해야 한다"는 돌덩이까지 얹어주다니.


그때가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가볍게 떠나고 싶어졌다.


하지만 "나중에 하지 뭐"라고 미루었다간, 큰코다칠 것이 뻔했다. 내일로 넘긴다 해서 내일의 내가 갑자기 정신을 바짝 차릴 리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변화하지 않는 한 그런 내일은 결코 오지 않으니, 미루는 오늘만이 되풀이될 뿐이었다. 방법은 심플했다. 지금 당장 가볍게 사는 것.


가볍게 살기 위해 다시 물건의 양을 줄이는 데 몰두하기 시작했다. 차츰차츰 비워나가다 보니 스스로 감당 가능한 정도를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절대적인 수량 기준을 떠나, 소유한 옷들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 정도라면 딱 좋았다. 더 이상 옷을 고르는 데에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게 되었다. 이처럼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라면 물건에 잡아먹힐 일도 휘둘릴 일도 없다.


더 이상 설레지 않고, 라이프 스타일에 맞지 않으며, 불편한 옷들은 과감하게 비워냈다. 그 과정에서 환경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오히려 긍정적인 자극으로 여기기로 했다.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 남겨진 물건을 더욱 소중히 해야겠다는 의지가 강해졌기 때문이다. 이는 구매에 대한 절제로도 이어졌다.


옷과 옷 사이에 생긴 여백으로 선선한 바람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숨통이 트인 옷장은 마치 살아 있는 듯 활기가 넘친다. 비움이 곧 삶으로 연결된 것이다.  


이 순간 나는 삶의 테두리 안에 있다. 살아 있기에 내 손길이 닿는 물건들에 대한 주도권을 쥐고 있으며, 이들을 죽이고 살리는 결정권 또한 내게 귀속된다. 그리고 나는 기어코 살리는 쪽을 선택했다.  


죽일 놈인 줄만 알았던 옷장이 다시 살아났다. 내가 사는 동안 옷장도 줄곧 살아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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