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의 개수가 80벌 이하로 내려가면서 비움을 잠시 멈추었다. 여전히 옷장의 밀도는 아쉬웠지만 이제는 내가 좋아하고 설레는 옷들로만 채워졌기에 섣불리 선별해서 비워내면 후회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옷의 개수를 강제로 제한하는 건 나의 정체성을 꾸역꾸역 미니멀리즘의 틀에 맞추려는 것에 불과하다는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그 무렵, 우연히 하나의 영상을 보게 된다.
유튜브 홈 화면에 나타난 썸네일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가늠할 수도 없는 양의 옷들이 사막에 버려져 있었고, 너무나도 참혹한 나머지 속이 울렁거리는 기분마저 들었다.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영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영상을 재생하기까지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침을 꿀꺽 삼키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영상의 시작과 함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옷으로 뒤덮인 칠레의 한 사막이었다. 그 곳은 형형색색의 옷들로 가득 차, 하늘과 맞닿은 모래 언덕이 그 끝을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옷 무덤으로 변해있었다.
칠레는 남미에서 가장 큰 중고 의류 수입국으로, 연간 6만 톤의 헌 옷이 이곳에 모인다고 한다. 하지만 중고로 거래되는 건 약 15%에 불과하며, 남는 옷들의 상당수는 그대로 버려지고 있다. 시 당국은 법 개정을 통해 수입업자들에게 섬유 폐기물에 대한 책임을 묻기 시작했지만, 절반 이상이 불법 매립될 만큼 실효성을 갖지는 못한 상황이다.
일부는 소각되기도 하는데, 이로 인해 발생하는 공해는 오롯이 주민들이 감당해야 하는 몫이며 매년 큰 화재가 발생한다는 내용도 전해졌다.
칠레 사막 알고리즘은 가나의 수도 아크라의 강으로 연결되었다. 전 세계 사람들이 버린 옷으로 메워진 강 위에서 소들은 풀 대신 옷을 뜯어먹으며 살고 있었다. 바다로 흘러들어 간 양도 상당해서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옷뭉치들이 딸려 들어와 해안가 또한 몸살을 앓고 있는 실정이다.
유행이 빨리빨리 교체되는 패스트 패션이 성행하면서 의류 생산량과 폐기물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연간 의류 생산량은 1000억 개에 달하며, 같은 기간 330억 개의 옷이 버려지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우리가 관심을 두지 않는 지구 어딘가를 뒤덮으며 생태계를 파괴하고, 지역 주민들의 건강과 생활을 위협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고심하고 있지만 규제만으로 그 속도를 따라잡기엔 역부족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옷은 쌓이고 있다.
수년 전 옷들이 들어차기 시작한 드레스룸이 떠올랐다. 당장 사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아서, 수량이 얼마 남지 않아서, 가격이 싸니까, 내가 원했던 디자인이라서 등등 갖가지 이유를 붙여 옷을 사재 끼던 날들이었다.
쇼핑 앱을 켜면 늘씬하고 멋진 모델들은 새 옷을 입고 환하게 웃고 있었고, 나는 혹여 내가 그 옷을 입으면 모델처럼 근사해 보일까 하는 마음에 망설이 없이 장바구니에 담았다. 3만 원, 5만 원이 결코 적은 돈은 아니지만, 나를 위한 투자이자 스트레스 해소용이라는 그럴 사한 이유가 붙자 대수롭지 않게 보였다. "마음에 안 들면 반품하면 된다"라는 얄팍한 마음으로 결제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입는 속도는 사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물건은 물건을 끌어당긴다는 말처럼, 새로 산 옷과 어울릴만한 또 다른 옷을 찾아 쇼핑 사이트를 뒤지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러는 사이 한번 입어 보고는 어딘가 석연치 않아 내팽개쳐지는 옷들은 한쪽 구석에 쌓이기 시작했고, 충동적으로 구매한 탓에 기존 옷들과 매치하기 어렵거나,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한 옷들도 공간을 메워갔다. 어떤 옷은 평생 입지 않게 될 것이 뻔한데도 귀찮아서 미루다 반품 기간을 놓쳤고, 그렇게 증식한 옷들은 무덤을 이루었다.
이렇게 살다 가는 평생을 옷 무덤 안에서 허우적대는 삶을 살게 될 것 같아 비움을 시작했고, 그 과정은 흡사 지옥과 같았으나 포기하지 않은 덕에 무덤은 사라졌다.
그리고 이제 내가 버린 옷은 그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던 지구 반대 편의 어딘가로 옮겨져 또다시 옷 무덤을 이루고 있다.
상태가 양호한옷들은 판매나 나눔을 했고 헌 옷 수거함으로 들어간 옷들 중 일부는 중고로 거래되었을 가능성도 있기에, 필요한 누군가에게 전달되었을 거라며 위안을 삼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찜찜한 마음은 쉬이 가시질 않는다. 한 때는 가벼워진 옷장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훨훨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그만큼 지구가 무거워졌다 생각하니 날개가 생겼다 해도 날고 싶지 않다.
옷 무덤과 옷 강을 접한 이후, 더더욱 남겨진 옷의 수량에 집착하지 않게 되었다. 다른 미니멀리스트들은 30벌, 50벌로도 일 년 열두 달을 난다는데 나는 80벌이나 가지고 간소하고 단출하게 산다는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지금 갖고 있는 옷들을 모두 소중히 하는 마음만 있다면 수량의 많고 적음은 중요하지 않은 것 아닐까?게다가 내가 가벼워지기 위해 그 무게를 다른 곳으로 전가하는 일은 다시 나를 무겁게 만들 수 있다.
이제 더 중요한 것은 비움 자체가 아닌 더 이상 사지 않는 생활이다.
하지만 쇼핑을 멈춘다는 결심은 비움보다 더 큰 의지를 필요로 할지도 모른다. 발길이 닿거나 눈길이 가는 곳마다 쇼핑의 유혹은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오가는 길의 매장에 걸려 있는 옷들을 보면 자꾸만 눈길이 가고, 계절의 변화를 알리는 신상들을 볼 때면 한번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예능이나 드라마에 출연한 배우의 옷이 너무 예뻐서 나도 저런 스타일의 옷을 갖고 싶다는 욕망에 빠지는 날도 있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이름 모를 사람의 스타일에 관심이 생기기도 하고, 거리를 걷는 타인의 코디가 근사해 보이기도 한다. 금전적으로 궁색하지 않다는 가정하에, 약간의 시간에 약간의 의지만 있다면 뭐든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세상이니, 까딱하다가는 유혹에 넘어가기 십상이다.
나도 모르게 세일광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순간, 사막의 옷 무덤과 강가를 뒤덮은 옷들을 떠올려 본다. 물건을 욕망할 때에도 비움을 먼저 생각하려 한다. 비움이 무거움으로 되돌아오지 않으려면, 물건을 늘리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지금내가 할 수 있는 일은내 옷장에 있는 옷들을 더 오래 소중히 다루는 것 뿐이다.
* 좌충우돌 실패 투성이의 옷장 비움, 그리고 초보 미니멀리스트로의 성장기를 다룬 매거진입니다. 관련 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