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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라미 Aug 08. 2023

옷은 마법을 부리지 않아

나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면

몇 년 전, 이직한 지 3달 가까이 지난 무렵이었다.


"하아, 이 뒤에는 볼 것도 없네. 월요일까지 다시 해오세요."


야근 후 집에 돌아오는 길, 한숨과 울분이 섞인 마음을 달래려 쇼핑 앱을 켰다. 팍팍한 현실을 잊는 데에는 이만한 특효약이 없었다. 늘씬한 모델들이 입은 신상을 볼 때마다 이상형을 만난 듯 가슴이 콩닥콩닥 거렸고, 관심 제품에 세일 표시가 붙는 날이면 로또라도 맞은 듯 기뻤다. 무거웠던 마음은 언제 그랬냐는 듯 가벼워졌다.


야근을 반복하다 보니 제대로 휴식을 취할 시간이 없는 데다 긴장이 극에 달하고 신경을 너무 써서 두통도 생겼다. 쇼핑 앱들은 이런 내 마음을 어찌 그리 잘 아는지 절묘한 타이밍에 세일이나 신상 알림 문자를 보내주었다. 옷들을 구경하다 보면 머리도 말끔해졌다. 결제 버튼을 누를 때마다 성취함을 느꼈다. 택배가 도착하는 날이면 소중한 손님이라도 찾아온 듯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힘들게 돈 버는데 아껴서 뭐 해? 이렇게 나를 위해 쓰는 게 현명한 거야. 내가 좋아하는 걸 하면서 살자고.'

회사 생활이 버겁고 힘에 겨울 수록 옷에 대한 집착은 커져갔다.


주말이면 두 세 시간 가량은 드레스룸에 처박혀 지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일에는 택배를 풀어볼 시간이 없어 드레스룸 한쪽에 쌓아둘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택배 상자를 뜯어 하나하나 입어보고 옷걸이에 걸고 코디를 생각하고 맞춰 보는 데 시간을 몽땅 써버렸다. 사이즈나 디자인 미스의 옷들을 반품 상자에 다시 담는 일도 다반사였다. 옷을 일일이 입어보고 분류하는 것만으로도 에너지가 사용되기에, 이미 하루에 쓸 힘을 다 소진한 듯 기진맥진하고 어지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그때마다 도대체 이 짓을 왜 하고 있는 거냐? 는 현타가 오다가도 습관처럼 쇼핑 앱을 켰고, 영롱한 신상들과 예쁜 모델들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지금 결제하지 않으면 영영 만나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에 결제 버튼부터 눌렀다. 평일 드레스룸 한편에 택배 상자가 차곡차곡 쌓였다.


평가 시즌이 되었다. 팀장은 이 팀에서 나의 성장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이라고 말했다. 특유의 조곤조곤한 어조였으나 단호했다. 


'아, 나가라는 소리구나.'


그리고, 그날 퇴근 길에 깨달았다.


'꽃무늬 원피스를 검색할 시간에 업계 동향을 살펴보고, 블라우스를 찾아 다니는 대신 경력이 부족한 영역을 공부했어야 했으며, 드레스룸에 처박혀서 주말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도서관에 가서 업무 관련 책들을 읽었어야 했던 거구나.'


참치집에서 회식한 날 샤랄라 원피스로 한 껏 멋을 내고는 신나게 떠들었던 그때, 팀장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결코 웃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진작 눈치챘어야 했다.


중식집에서 코스 요리를 먹으며 하얀 블라우스에 뭐 하나라도 튈까 봐 조심했던 그때, 탕수육 소스가 아닌 이 팀에서의 생존에 더 전전긍긍했어야 했던 것이다.


직장 생활 16년차라는 사회적 경험이 무색하게도, 이직의 무게를 가볍게 여긴 결과였다. 새로운 장소,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출발이라는 "설렘"에 도취되어 근사한 이미지로 새로고침하는 데에만 신경을 썼으니, 부족한 실력이 드러나는 건 시간 문제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멋지고 예쁜 옷을 휘감아도 나는 빛나지 않았고, 제 아무리 신상이라도 옷들은 마법을 부리지 못했다. 근사하다고 생각한 건 스스로의 착각이었을 뿐, 실패한 나는 작고 초라했다.


p.s. 그럼에도 불구하고, 옷에 대한 탐욕은 막을 내리지 못했어요. 아마 이때 멈췄다면 최소 수백만원의 돈을 아껴서 더 부자가 되고?!, 충분한 수면 시간을 확보해서 더 건강했을 지도 모르겠네요?! ㅎㅎ

이후에도 장장 4년에 걸쳐 질기고도 지긋지긋한 옷과의 사랑과 전쟁을 거듭하게 됩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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