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발로 퇴사해야 할 타이밍이라는 걸 알게 된 후 직전 3개월간 구매했던 약 30벌의 옷을 비워냈다. 하지만 이는 일종의 분풀이와 같은 것이었다.
이직 후 단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던 것에 대한 보복이자 능력 계발이 아닌 패션 계발에 심취한 나 자신에 대한 불만이었으며, 그동안 눈치코치 만렙으로 살아남아 온 내가 이렇게나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있었던 것에 대한 자책이기도 했다.
따라서 결코 과시용 옷의 무용함을 깨달았다거나, 옷 욕심을 덜어낸 결과라 볼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또 다시 어떤 계기로 인해 옷이 다시 불어날 잠재력은 이미 존재했다.
구사일생의 기회로 팀을 옮기게 되었는데, 다행히 적응이 빨랐고 적성에도 잘 맞았다. 상사와의 호흡도 좋았다. 유일한 단점은 업무량이 너무 많았다는 것. 역시나 이로 인한 스트레스와 휴식에 대한 갈증은 다시 쇼핑으로 이어졌다. 계속해서 월급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안정감 때문일까? 응축되었던 보상 심리가 다시금 폭발했다.
다만 이전처럼 화려하고 과감한 디자인의 옷은 들이지 않았다. 유튜브 알고리즘 속 크리에이터들의 조언을 착실히 들은 결과이기도 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옷이 많아도 입을 옷이 없는 이유는 기본템이 없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나도 매일 아침 옷을 고를 때마다 막상 입을 옷이 없어 "내 옷장에는 옷을 잡아먹는 귀신이라도 사는 건가?"라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드디어 해답을 찾았다니.
이를 계기로단정하고 깔끔한 룩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또 다른 컨셉 놀이에 빠져버린 것이다.
흰색 이너는 필수템이기에 셔츠, 반팔티, 긴팔티 등 각 용도별로 구비해 놓았다. 기본 반팔티를 단품으로 입기엔 너무 밋밋해서 레터링이 들어간 반팔티를 한 개 더 들였다. 레드 컬러의 레터링이 더 감각 있게 여겨져서 이것도 샀다. 좀 더 스타일리시하게 느껴지는 품이 넉넉한 디자인도 추가했다.
그런데 티셔츠만 즐비하니 너무 가벼워 보였다. 같은 반팔이라도 블라우스가 필요했다. 블라우스 또한 소재별로 느낌이 달랐다. 옥스퍼드 면은 탄탄한 멋을, 레이온 소재는 야리야리한 멋을 풍겼다. 그 때, 한 개그우먼의 명언이 떠올랐다. "로제 떡볶이와 일반 떡볶이 중에 뭘 먹을지 왜 고민하냐? 둘 다 먹으면 되지. 엄연히 맛이 다른데"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옷도 엄연히 멋이 다른 법! 당당히 두 개 다 취했다.
니트나 스웨터 역시 몸에 꼭 맞는 것과 넉넉한 것을 골고루 갖춰야 안심이 되었고, 소재나 톤도 다양하게 구비해야 활용도를 극대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바지는 두 말할 것도 없었으며, 원피스나 스커트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급기야 재킷과 코트까지 컬러 별로 마련하기 시작했다.
드레스룸에 택배 상자가 쌓일 때마다 공간은 더 좁아지고 발 디딜 틈조차 부족해졌지만 이 모든 과정은 단정하고 깔끔한 룩을 완성하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라 정당화했다.
'기본템 위주로 들이는 거니까 본전 뽑아 먹으면 그게 남는 장사지.'
당시 쇼핑 패턴 - 비슷한 패턴으로 여러 쇼핑 사이트를 전전했음 (일단 다 사고 일부는 반품, 변태 같다 ㅠㅠ)
이렇게 행복 회로를 돌리며 2년 가까이 사들인 옷은 족히 200벌은 되었다. 물론 제대로 세어보진 않았다. 아마 제대로 세어봤다면 그 개수에 놀라고, 부피감에 놀라고, 카드 값에 놀라서 당장 멈췄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세어보지 않은 건 멈추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거다. 200벌이라는 숫자는 그로부터 한참 후 옷과의 전쟁에 돌입했을 때 하나하나 비워내면서 그즈음에 샀던 옷임을 기억하고 대략적으로 세어본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결국 비워냈다는 건 본전을 뽑아 먹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본전을 찾는다는 의미가 엄선한 좋은 품질의 물건을 소중히 다루고 관리하면서 오래도록 곁에 두고 사용할 때 할 수 있는 말이라는 걸 그때는 몰랐다.)
옷은 복리처럼 불어났다. 10년 전에 구입한 옷, 선물로 받은 옷, 힘들게 구한 옷, 비싸서 끌어안고 사는 옷, 언젠가는 입겠지 하며 방치했던 옷들에 새로 구매한 "기본템"들이 더해져 내가 컨트로 할 수 있는 한계치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무슨 옷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최적의 코디는 언감생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