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티즈가 왼쪽 깜빡이를 켜며 도로로 진입한다. 저녁 8시 8분. 금요일의 중앙고속도로 하행선엔 차가 많지 않다. 가끔 버스나 트럭이 지날 뿐이다.
운전대를 잡은 여자의 손이 떨린다. 질주에 집중할 수가 없다. 벤츠, 맘만 먹으면 작은 마티즈를 집어삼킬 수 있는 검은 두려움. 어딘가에서 벤츠가 이빨을 드러내며 튀어나올 것만 같다.
세상에는 사랑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어릴 때는 사랑을 모르고, 젊을 때는 사랑밖에 모르고. 나이가 들면 사랑을 잊어버린다.
준희… 준희 아빠…… 사랑해.
우리가 저 담쟁이만큼 살 수 있을까? 여자가 남편에게 물었었다. 담쟁이덩굴이 벽을 뒤덮고 있는 아주 오래된 성당에서였다. 담쟁이만큼은 아니더라도 손자 손녀는 볼 수 있을 거야,라고 여자의 남편이 말했었다. 남편의 말에 여자의 볼이 달아올랐었다. 그들은 신혼여행 중이었으니까.
아침에 여자는 남편한테 말했다. 일찍 들어오라고. 준희 선물 잊지 말라고. 여자는 궁금하다. 남편이 준희 선물로 뭘 샀을지.
인형을 샀을까?
준희…… 준희 보고 싶어.
난, 왜…….
벤츠다.
여자가 핸들을 움켜잡는다. 다시 시작된 것이다. 벤츠는 갓길에 정차되어 있다. 널 기다렸어,라고 말하는 것 같다.핸들을 움켜쥔 손바닥과 손가락 사이로 땀이 비어져 나온다. 검은 짐승처럼 포복하고 있던 벤츠가 음산한 웅크림을 풀지 않는다. 뒷골이 얼어붙는 긴장감을 느끼며 마티즈가 서서히 속력을 높인다. 뒤이어 벤츠가 급발진을 한다.
도대체 니가 원하는 게 뭐야?
맹렬한 속도로 접근해 오는 벤츠를 향해 소리라도 지르고 싶다. 마티즈가 급가속 페달을 밟는다.
니가 도망친다면 쫓아가 주지!
벤츠가 하이 빔을 쏘며 마티즈의 꽁무니를 압박한다.
마티즈는 이제 땀을 흘리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않는다. 120 - 130km……. 마티즈가 어금니를 깨문다. 마티즈의 핸들에 이제 흔들림 따위는 없다. 하지만 벤츠의 압박은 점점 더 노골적이 되어 간다.
백미러 속 벤츠 안, 운전석과 조수석에 도사리고 있는 두 개의 그림자엔 움직임이 없다. 왼쪽 사이드미러 속 300미터 후방에서 차 한 대가 달려오고 있다. 맹렬한 속도로.
마티즈의 브레이크 등이 두세 번 깜빡인다. 벤츠가 비웃듯이 굉음을 내더니 시뻘겋게 달궈진 돌기를 치켜들며 마티즈를 몰아붙인다. 금방이라도 뒤집힐 듯, 마티즈가 휘청거리며 차선을 바꾼다. 또 한 번의 급가속 140km. 다시 따라붙는 벤츠. 헐떡이며 재차 차선을 바꾸는 마티즈. 가드레일을 스치며 날아가는 왼쪽 사이드미러. 귀 양쪽이 떨어져 나간 불구의 마티즈를 덮치려는 벤츠. 휘청거리며 비명을 지르는 마티즈. 붉게 달궈진 벤츠가 하얗게 질린 마티즈 꽁무니에 아가리를 들이미는 순간, 급가속한 마티즈가 핸들을 꺾어 갓길로 빠지며 브레이크를 밟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