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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고와디디 Sep 24. 2021

딸의 (조용한) 복수

첼로 입문기 <이 나이에 기어이 첼로를 하겠다고>

바이올린이나 첼로 초보자가 활로 현을 그어 내는 소리를 아주 가까이에서 직접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그 소리가 어떤 소리인지 알지 못한다. 그 소리를 글로 묘사해보자면 심장의 혈관 사이에 막대기를 두 개 끼워 주리를 트는 느낌이랄까, 고막을 찢어발기는 느낌이랄까, 아무튼 사람을 의자에 묶어 놓고 귀에 대고 켜면 고문 도구로도 충분히 활용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한 시간 두 시간을 깨워도 일어나지 못하는 우리 딸 귓가에 대고 내가 첼로 한 곡을 연주하기 시작하면 두 마디가 끝나기 전에 애가 벌떡 일어나 도망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그래서 첼로를 알람시계로 활용하고 있다.)


초보가 내는 현악기 소리가 듣기 힘들다는 건, 우리 딸이 초1 때 바이올린을 시작하면서 터득했다. 자식이 뭘 하면 앞구르기 뒤구르기만 해도 기특한 법인데 아이가 10만 원짜리 중국산 바이올린을 장만해서 연습을 한답시고 켜대는데 정말 참기 어려웠다. 그나마 방에 들어가서 하면 가만히 문이라도 닫을 수 있지만, 어떤 날은 한껏 필을 받아 엄마도 좀 들어보라며 내 앞에 서서 자랑스럽게 켜기 시작하는데 그 앞에서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아 상처를 줄 수도 없는 노릇. 그러면 나는 얼굴로는 필사적으로 흐뭇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머릿속으로는 두 귀를 오려내어 우리 아파트 15층 베란다 문을 열어젖혀 멀리 던져버리거나, 오려낸 귀를 3중 밀폐 용기에 담아 심연 아래 가라앉히는 상상을 하며 아이의 연주가 끝나길 기다리곤 했다. 하지만 그런 유체이탈만으로도 도저히 현실의 고막을 찢어발기는 고통을 참을 수 없는 날도 있었다. 편두통이 오거나 일을 하는 중일 때는 ‘이제 그만 방에 들어가서 하면 안 되겠니?’ 하는 식으로 ‘도저히 못 듣고 있겠다.’는 표현을 기어이 하고야 말았고, 아이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상처 받은 얼굴로 방에 들어갔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조언했다. 웬만하면 애들한테 현악기는 시키지 말라고. 자식에 대한 사랑을 시험에 들게 하지 말라고.     


그랬는데 상황이 역전되어 이제 십 년 차인 아이는 바이올린을 능수능란하게 연주하게 됐고 나는 생짜 첼로 초보자가 된 것이다. 그런 자의 연습 소리를 매일 견뎌야 하는 괴로움을 익히 아는 나는 딸에게 미안했다. 그래서 연습은 늘 사과로 시작해서 사과로 끝난다.

“미안해, 엄마 연습 좀 할게.”

“응, 괜찮아.”     

(내가 듣기에도 고통스러운 소리 이어짐.)     

“힘들지? 조금만 더하고 오늘은 그만할게.”

“아니야, 괜찮아, 하고 싶은 만큼 해.”     

(연습을 할수록 소리가 나아져야 하는데 몸에 있는 대로 힘이 들어가고 팔다리가 아프기 시작하면 점점 더 고역스러운 소리가 난다.)     

“이제 진짜 5분만 하고 그만 할게. 나도 힘들어서 못 하겠다.”

“아냐, 괜찮아. 첨엔 다 그래.”

“어, 그래.”     


딸은 고통스러운 나의 첼로 소리를 의외로 담담히 감내하며 제법 격려까지 해주어서 나는 속으로 엄청 고마웠더랬다.      

그런데 어느 날 편의점에 들러 이런저런 군것질거릴 사고 계산을 하는데 아이가 계산대 위에 주황색 조그마한 물체를 탁, 올려놓았다.

“이게 뭐야?”

“응, 귀마개.”     


나중에 그 일을 단골 카페 사장님께 말씀드렸더니 이렇게 한 마디 하셨다.

“아, 따님이 조용히 멕이는 스타일이네요.”     

그랬다.

아주 조용하고 무표정한, 강한 한 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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