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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고와디디 Sep 27. 2021

막 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첼로 입문기 <이 나이에 기어이 첼로를 하겠다고>

제주의 새 학원에서 만난 새 선생님은 방목 형 선생님이었다. 가장 중요한 자세와 큰 틀을 그어준 다음 그 안에서 악보를 읽어나가며 혼자 연주 해나가게 독려하는 스타일. 이런 가르침의 장점이라면 자유롭게 이런저런 시도를 해볼 수 있고, 세부적인 것들, 예를 들면 음정이나 박자에 신경 쓰느라 연주의 가장 기본인 자세와 활 잡는 방법, 왼손의 모양 등에 소홀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음정, 박자를 꼼꼼하게 챙기지 않고 진행한다고 해도 악보를 읽으면서 왼손으로 현의 올바른 위치를 눌러 주면서 오른쪽 어깨의 힘을 빼고 활을 알맞은 각도로 쓴다는 것, 이 모든 걸 한꺼번에 해야 한다는 것은 내겐 이미 벅찬 일이었다.


하루는 선생님이 강조하신 기본기를 계속 틀려댔고 선생님께선 그때마다 ‘다시!’를 외치셨다. 하지만 이미 대혼란에 빠진 나는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 내가 어떻게 하고 있고 어떻게 해야 옳은 건지 판단 능력을 잃고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내가 한 번 활을 제대로 다 켜기도 전에 계속 ‘다시!’를 외치셨고 나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되는대로 이렇게도 해봤다가 다시 ‘다시!’를 외치시면 저렇게도 해봤다가 하며 제발 이 순간이 지나가기만 하라는 마음으로 앉아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나이를 먹고 나니 이런 걸 배울 때도 (예전보단) 뻔뻔해진다는 거다. 그날 선생님이 폭풍같이 나를 몰아붙이던 날에도 당황하긴 했지만 무척 주눅이 든다거나 수치심으로 죽을 것 같거나 하진 않았다. 그냥 속으로 ‘아, 내가 십 대였으면 이 타이밍쯤에서 어흑, 하고 뛰쳐나갔겠구나. 아, 내가 이십 대였으면 이쯤에서 파르르 떨며 불쾌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뿐이었다. 그러나 내가 누구인가. 나는 질풍노도의 십 대와 사회생활로 단련된 20대, 남과 가족을 이루어가는 30대를 모두 통과한 아줌마가 아닌가!

내가 배우고 싶은 악기를 배우며 선생님에게 이 정도 담금질을 당한다고 자존심이 상할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 들기까지 했다. 어린 학생도, 입시를 준비하는 전공자도 아닌데 누가 이렇게 열정을 가지고 아줌마 취미 반을 가르쳐준단 말인가.

그러나 감사하다고 혼날 때 기분이 좋을 순 없다. 선생님이 또 한 번 다시를 외쳤을 땐, 약간 빈정이 상했다. 정도라는 게 있는 거 아닌가. 나는 정신없이 밀려오는 이 ‘다시’의 파도를 한 번 끊어줘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니면 그냥 한 번 시비를 걸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활을 틱 들어 올려 악보를 (약간 불량하게) 가리키며, ‘어디요, 여기요?’하고 물었다. 한데, 그 과정에서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활을 틱 들어 올리다가 그만 옆에 놓여 있던 선생님의 첼로를, 나의 중국산 첼로 값의 일백 배가 넘는 값(나중에 알고 보니 삼백 배)의 첼로를 활로 딱 때린 것. 순간 1초, 2초, 3초의 정적. 그리고 나는 ‘어머어어어 어떡해!!!! 죄송해요!!!’라고 난리(?)를 떨었고, 선생님은 이런 일은 처음인지 놀라서 한동안 가만히 계시다가 ‘지금 저는 못 때리고 제 악길 때리신 거예요?’ 하셨다. 나는 ‘아니에요, 아니에요.... 악보를 가리키려다가...’ 하고 허둥댔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선생님이 먼저 호탕하게 웃으셨고, 나도 따라 웃었다. (웃는다고 귀여워서 봐줄 나이도 아니지만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음.)

    

 나이 들어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의 좋은 점은, ‘혼내주는 것’에도 감사한 마음이 든다는 거다. 아무래도 어린 학생들보다 육신도 사고도 유연하지도 않고, 판단력도 빠르지 않은 중년의 학생을 야단을 쳐야 할 때 야단을 치기도 부담스러울 텐데. 그래도 어린 학생들을 가르칠 때와 똑같이 차별 없이(?) 가르쳐주시는 것이 참 고맙단 생각이다.      


더불어 이 자리를 빌려 말씀드리고 싶다.

‘선생님의 첼로를 활로 때린 거, 그건 정말 실수였어요.’           

믿어주실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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