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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고와디디 Sep 29. 2021

알맹이보다껍질

첼로 입문기 <이 나이에 기어이 첼로를 하겠다고>


첼로를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급히 가장 저렴한 악기를 구입한 것까진 좋았다. 문제는 내가 내려가 지내고 있는 지역이 제주도라는 것. 6월부터 시작되는 제주의 습기는 악명 높다. 바람, 여자, 돌이 많아 삼다도라 한다는데 내가 느끼기엔 그 세 가지를 다 합한 것보다 더 강력한 것이 습기다. 한 여름엔 습도가 97퍼센트, 98퍼센트까지 육박하니 이건 뭐, 체감 상으론 거의 물속을 걸어 다니는 수준이라 하겠다. 더구나 내가 사는 지역은 곶자왈(숲을 뜻하는 ‘곶’과 덤불을 뜻하는 ‘자왈’이라는 고유 제주어의 합성어) 바로 옆이라 제주도 중에서도 습기가 남다르다. 한 번은 집 안에서 도마뱀이 기어 다니는 걸 발견한 적도 있고, 화장실에서 딸이 괴성을 지르며 뛰쳐나와서 무슨 일인가 했더니 화장실에서 지네가 나온 거였다. 아마존 밀림 수준까진 안 되지만 집안에서 도마뱀과 지네가 나올 정도이니 습도가 어느 정도인지는 짐작에 맡기겠다.

현악기는 온습도에 아주 민감하다. 첼로라는 게 아주 간단히 생각하면 나무틀에 줄을 걸어놓은 것이니 습도에 나무는 뒤틀리고 줄은 있는 대로 늘어져 일단 레슨을 시작하려면 대대적인 튜닝부터 해야 했다. 하루는 레슨 전에 내가 까만 자루, 아니 커버를 바나나 껍질 벗기듯 주섬주섬 벗겨내는 걸 지켜보던 선생님이 조심스럽게 말씀하셨다.

“케이스를 하나 장만하시면 어떨까요?”

“네? 첼로가 싸구련데,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선생님 말씀으론 좋은 첼로 케이스는 온습도로부터 악기를 보호해준다고 했다. 무엇보다 악기는 늘어가는 연주 실력에 따라 조금씩 업그레이드를 하지만 케이스는 좋은 것으로 장만하면 평생(?) 사용할 수 있다는 거였다. 그리고 악기를 중도 포기하게 되더라도 좋은 첼로 케이스는 중고 시장에 내놓기 무섭게 팔린다고 했다. 케이스는 악기만큼 까다롭게 고를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결국 선생님의 조언에 따라 큰맘 먹고 좋은 첼로 케이스를 장만했다.

첼로 값의 2배가 넘는 값의 첼로 케이스를 샀다고 하면 입 가진 사람들은 다들 한 마디씩 한다. ‘악기보다 케이스가 비싸다고?’ 친한 사람들은 대놓고 ‘그게 뭐야?’라고 하고, 예의를 차리는 사이에선 속으로 진짜 웃긴다고 한다. (이 나이쯤 되면 그런 건,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

 하지만 모르는 말씀이다. 이 케이스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튜닝이 거의 필요 없게 됐다. 마치 저온에 보관해야 상하지 않는 음식을 냉장고에 넣어 보관하듯 이 케이스에 첼로를 넣어두면 지독한 제주 습기로부터 악기가 보호됐다. 뜨거운 뙤약볕이나 영하의 날씨에 차에 잠깐 두는 정도론 예전처럼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평생 속이 꽉 차야 하는 거라고, 알맹이가 중요한 거라고만 생각하고 살았는데, 웬걸. 껍질이 중요한 경우도 있다. 아니, 생각보다 많다.

튼튼하고, 제 기능을 다 하는 껍질은 소중한 알맹이를 잘 지키고 보호해준다.        

그리하여 나는 내 실력에 비해 매우 과분한 (첼로) 케이스를 등에 모시고 첼로를 배우러 다닌다. 솔직히 까만 자루에 넣고 다닐 때보단 기분도 좀 더 난다. 음악인에 +1 정도 가까워진 기분이랄까. 그리고 속 빈 강정이 되지 않기 위해서 연습을 더 열심히, 하리라 다짐한다.

그러니까, 가자, 연습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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