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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고와디디 Sep 22. 2021

운명이 밀어주는 대로

첼로 입문기 <이 나이에 기어이 첼로를 하겠다고>

  

첼로 학원에 다니기 시작하고 한 달이 지난 후, 개인 사정으로 제주에 내려가 살게 됐다. 급히 알아본 바 내가 살 지역에선 악기를 대여해주는 학원이 없었다. 동네의 유일한 악기 학원에서 얘기한 조건은 ‘개인 악기 지참’. 초기 비용을 들이지 않고 첼로가 내게 맞는 악기인지 알아볼 수 있어서 덜컥 시작했는데! 마치 이제 손만 겨우 잡았는데 결혼할지 헤어질지 당장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20년을 벼르다 어렵게 시작한 만큼 이대로 밀고 나가야 했다.  별로 오래 고민하지 않고 최저가 첼로(그래도 60만 원씩이나 하는)를 구입해서 제주로 내려가기로 했다. 60만 원짜리 연습용 첼로는 중국 공장에서 찍어내는 악기이기 때문에 현을 조금 나은 걸로 교체하는 게 좋겠다는 선생님 말씀에,

악기 값 60만 원 + 야가 현 8만 원, 총 68만 원이 들어갈 예정이었다. 그리고 악기점에서 잠깐 고민했다. 기왕 쓰는 거, 악기 케이스도 하나 사? 폼 나게?

60만 원짜리 악기는 검은색 자루 같은 것에 담아 주는데, 조금 과장해서 마치 시체를 담아 유기할 때나 쓸법한 바디 백처럼 생겼다. 나오는 길에 늠름하게 줄지어 선 악기 케이스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가격을 물어보니 쓸 만한 건 100만 원이라고 했다.  

네? 악기가 60만 원인데 케이스가 100만 원이라고요?      


바로 접었고요...

그리하여,

악기 값 60만 원 + 야가 현 8만 원 + 케이스 (30만 원?) 정도 생각했던 내 예산 대신,

악기 값 60만 원 + 야가 현 8만 원 + 케이스 (100만 원) + 시체 바디 백 0원으로 계산을 끝내고 내 시체를, 아니, 첼로를 매고 매장을 나섰다.

그랬다.

이제는 빼박이었다.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아무리 때려치우고 싶은 순간이 찾아와도,

들인 본전 때문에라도 나는 첼로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본전 생각하면 못 할 게 없는 것이 아줌마 정신 이리니. 역시 아줌마가 된 다음에 시작하길 잘했다,라고 갖다 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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