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13. 유난히 깊고 검은 가을 저녁
2022.10.18. 화요일
점심에 먹은 연어 덮밥이 니글거려 퇴근 후 집에 와서 매운 라면을 끓여 먹었다. 늘 그렇듯이 내게 라면은 먹자마자 후회가 되는 소화가 안 되는 음식 중에 하나이다. 배도 부르고 소화도 시킬 겸 아파트 한 바퀴를 돌기 위해 재활용 쓰레기를 주섬주섬 챙겨서 나왔다.
오늘따라 유난히 깊고 검은 가을 저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는 아파트 단지를 한 바퀴 돌면서 블로그에 들어가 남궁인 작가님이 올리신 글을 읽었기 때문이다. 무수한 타인의 삶 속에 짧지만 깊게 연대하며 살고 계신 응급실 의사 선생님의 글이 그런 생각을 들게 했다.
가을 바깥바람이 차서 아파트 단지를 더 돌지 않고 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을 오르면서 핸드폰으로 남궁인 작가님의 글을 여러 번 읽었다. 8층까지 올라왔는데 숨이 차서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하다가, 잠시 쉬고 다시 계단으로 올라갔다.
글을 읽다 보니 계단 오르면서 숨찬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무심코 오르다 보니 22층이었다. 핸드폰을 끄고 한 층 다시 내려왔다. 계단으로 오르면서 숨이 찬 것인지, 선생님의 글을 여러 번 읽으면서 숨이 찬 것인지, 아무튼 오늘 저녁은 숨이 찰 정도로 심장이 덜컹거렸다.
2022.10.19. 수요일
어제 계단으로 올라간 게 힘들었는데 뭔가 개운해서 하루 더 계단으로 걸어 올라갔다. 어제보다는 수월하게 느껴졌다.
2022.10.20. 목요일
작정한 건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화, 수, 목 삼일 째 계단으로 21층까지 올라갔다. 계단을 오를 때는 핸드폰으로 블로그 글을 읽는다. 오를 때의 힘듦을 잠시 잊을 수 있어서 좋다.
겨울이는 내일 가을 소풍을 간다고 한껏 들떠있다. 친구들과 도시락은 무얼 싸 올 건지, 돗자리는 누가 가져올 건지, 용인 민속촌 지도를 보여주면서 어디에 가서 구경할게 될지 열심히 내게 설명해 준다. 열한 살 친구들과 첫 소풍이라 마음이 구름처럼 둥둥 떠있나 보다. 소풍 가기 전 날 얼마나 좋을까.
겨울이는 도시락은 참치 김밥이 좋고, 과자는 꼬북칩, 과일은 단감과 귤, 그리고 알로에 음료수를 가져가고 싶다고 했다. 가방은 무얼 매고 갈지, 옷은 어떤 걸 입을지 고민해서 이리저리 해보더니 가방과 옷을 준비하고, 평소보다 일찍 목욕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이들 어린이집 초등학교 소풍 때마다 늘 새벽에 일어나 김밥을 쌌었는데, 이번에는 겨울이 혼자라 누나들과 소풍날이 겹치지도 않으니 김밥 두 줄만 사서 보내기로 했다. 남편은 엄마가 싸줘야지 김밥을 사서 보낸다고 잔소리를 했다. 하지만 가끔은 엄마도 편하고, 겨울이는 더 맛있는 전문가의 김밥을 먹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2022.10.21. 금
겨울이가 가을 소풍을 다녀왔다. 놀이 기구도 세 개나 타고, 공연도 보고, 친구들과 돗자리 깔고 도시락도 먹고, 기념품도 사고, 슬러시도 사 먹고 너무 재미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용인 민속촌에서 기념품으로 사 온 검을 2000원 주고 샀다며 보여주었다. 난 세상에.. 기념품으로 장난감 칼을 사 오다니.. 했는데 이걸 들고 한껏 폼을 잡더니 내가 알지 못할 대사를 중얼거리면서 검을 빼서 허공을 향해 휘둘러댔다. 흑룡검이 멋지다며 다음에 거기에 또 가면 백룡검을 사고 싶다고 했다. 끙. 열한 살이 맞았다. 내심 사서 보낸 김밥이 마음에 걸려 김밥은 어땠는지 물었는데 "엄마, 진짜 맛있었어. 나 또 그 김밥 사줘~!"라고 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전문가의 손길은 달랐다.
2022.10.22. 토요일
퇴근하고 친구를 만났다.
올해 가을이 가기 전에 꼭 만나려고 했는데 같이 가을을 걸어서 좋았다. 우리의 가을을 남겨서 다행이다.
2022.10.17~ 2022.10.23 주간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