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계일주 Oct 31. 2023

가을을 남기는 일기

일상 13. 유난히 깊고 검은 가을 저녁


2022.10.18. 화요일



점심에 먹은 연어 덮밥이 니글거려 퇴근 후 집에 와서 매운 라면을 끓여 먹었다. 늘 그렇듯이 내게 라면은 먹자마자 후회가 되는 소화가 안 되는 음식 중에 하나이다. 배도 부르고 소화도 시킬 겸 아파트 한 바퀴를 돌기 위해 재활용 쓰레기를 주섬주섬 챙겨서 나왔다.



오늘따라 유난히 깊고 검은 가을 저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는 아파트 단지를 한 바퀴 돌면서 블로그에 들어가 남궁인 작가님이 올리신 글을 읽었기 때문이다. 무수한 타인의 삶 속에 짧지만 깊게 연대하며 살고 계신 응급실 의사 선생님의 글이 그런 생각을 들게 했다.



가을 바깥바람이 차서 아파트 단지를 더 돌지 않고 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을 오르면서 핸드폰으로 남궁인 작가님의 글을 여러 번 읽었다. 8층까지 올라왔는데 숨이 차서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하다가, 잠시 쉬고 다시 계단으로 올라갔다.



글을 읽다 보니 계단 오르면서 숨찬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무심코 오르다 보니 22층이었다. 핸드폰을 끄고 한 층 다시 내려왔다. 계단으로 오르면서 숨이 찬 것인지, 선생님의 글을 여러 번 읽으면서 숨이 찬 것인지, 아무튼 오늘 저녁은 숨이 찰 정도로 심장이 덜컹거렸다.








2022.10.19. 수요일



어제 계단으로 올라간 게 힘들었는데 뭔가 개운해서 하루 더 계단으로 걸어 올라갔다. 어제보다는 수월하게 느껴졌다.





2022.10.20. 목요일



작정한 건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화, 수, 목 삼일 째 계단으로 21층까지 올라갔다. 계단을 오를 때는 핸드폰으로 블로그 글을 읽는다. 오를 때의 힘듦을 잠시 잊을 수 있어서 좋다. 



겨울이는 내일 가을 소풍을 간다고 한껏 들떠있다. 친구들과 도시락은 무얼 싸 올 건지, 돗자리는 누가 가져올 건지, 용인 민속촌 지도를 보여주면서 어디에 가서 구경할게 될지 열심히 내게 설명해 준다. 열한 살 친구들과 첫 소풍이라 마음이 구름처럼 둥둥 떠있나 보다. 소풍 가기 전 날 얼마나 좋을까.



겨울이는 도시락은 참치 김밥이 좋고, 과자는  꼬북칩, 과일은 단감과 귤, 그리고 알로에 음료수를 가져가고 싶다고 했다. 가방은 무얼 매고 갈지, 옷은 어떤 걸 입을지 고민해서 이리저리 해보더니 가방과 옷을 준비하고, 평소보다 일찍 목욕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이들 어린이집 초등학교 소풍 때마다 늘 새벽에 일어나 김밥을 쌌었는데, 이번에는 겨울이 혼자라 누나들과 소풍날이 겹치지도 않으니 김밥 두 줄만 사서 보내기로 했다. 남편은 엄마가 싸줘야지 김밥을 사서 보낸다고 잔소리를 했다. 하지만 가끔은 엄마도 편하고, 겨울이는 더 맛있는 전문가의 김밥을 먹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2022.10.21. 금



겨울이가 가을 소풍을 다녀왔다. 놀이 기구도 세 개나 타고, 공연도 보고, 친구들과 돗자리 깔고 도시락도 먹고, 기념품도 사고, 슬러시도 사 먹고 너무 재미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용인 민속촌에서 기념품으로 사 온 검을 2000원 주고 샀다며 보여주었다. 난 세상에.. 기념품으로 장난감 칼을 사 오다니.. 했는데 이걸 들고 한껏 폼을 잡더니 내가 알지 못할 대사를 중얼거리면서 검을 빼서 허공을 향해 휘둘러댔다. 흑룡검이 멋지다며 다음에 거기에 또 가면 백룡검을 사고 싶다고 했다. 끙. 열한 살이 맞았다. 내심 사서 보낸 김밥이 마음에 걸려 김밥은 어땠는지 물었는데  "엄마, 진짜 맛있었어. 나 또 그 김밥 사줘~!"라고 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전문가의 손길은 달랐다. 









2022.10.22. 토요일



퇴근하고 친구를 만났다.


올해 가을이 가기 전에 꼭 만나려고 했는데 같이 가을을 걸어서 좋았다. 우리의 가을을 남겨서 다행이다. 



2022.10.17~ 2022.10.23 주간 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