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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황해볼게요 Aug 05. 2024

그 시작은

 고대했다는 말이 어울리는 순간. 어느 겨울밤에, 길의 끝에 행복이 기다릴 거라는 책을 읽으며 가슴 뛰던 순간.


 산티아고 순례길에 오른다. 5시에 눈을 뜨고서 끼니를 챙기고 길을 나선다. 고대하던 시간의 시작은 설렘으로 가득하다. 5시간이 채 안되게 자고서 떠나는 순례길. 여전히 세상이 빛을 돌려받지 못한 이른 아침에 나의 오랜 바람이 시작된다.


 순례길에 대한 정보는 거의 찾아보지 않았다. 어떤 표식을 따라가야 하는지 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길을 걷는다. 운동복을 입고 운동화를 신고 크거나 작은 저대로의 가방을 메고서 걸음을 꼭꼭 밟아나가는 이들의 뒤를 따른다. 하늘이 밝아오기 시작하면서 이 길의 시작을 온전히 담아내고 싶은 마음에 안경을 꺼내든다. 안경의 얇은 테가 그 풍경과 함께 눈에 담기는 것조차 아쉽게만 느껴진다. 길의 가운데 앉는다. 렌즈로 바꾸어낸다.


 잔뜩 찌푸리고 있던 하늘이 조금씩 푸르름을 내비치기 시작하고서 그 사이로 해가 고개를 내밀면서부터 초록빛 나무와 잔디는 제 아름다움을 찾아간다. 길을 온통 감싸고 있는 잔디 위로 염소, 양, 소, 말이 잔디를 뜯어먹는다. 잠을 자고 물을 마시고 뛰논다. 한국에서 마주한 그것들은 주로 철창 속에 울고 있었다. 이곳에서 마주한 그들은 그저 자유로웠다. 그들을 관리하는 이가 있겠지만 내가 길을 걸어내는 동안 그들을 통제하는 그 어떤 인간도 눈에 담지 못했다. 그들은 울지 않았고 종종 달렸으며 푸른 잔디가 그들의 입으로써 뜯겨나가는 소리를 귀에 담을 수 있게 해 주었다. 그 어떤 인위적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저 나의 발소리, 곁에 있는 이들의 발소리, 물 흐르는 소리, 바람에 부딪히는 나뭇잎소리, 동물의 목에 매달린 종소리, 그들이 풀 뜯는 소리 정도를 귀에 담을 수 있었다.


 인간이 만들어낸 인공적인 소리에서 벗어났을 때 느낄 수 있는 자유로움이 있다. 며칠 전 보르도의 밤거리를 걸으며 우리가 유독 끌림을 느꼈던 거리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대화하고 있었고 음식을 앞에 두고 있었다. 서너 군데의 식당이 있었다. 유럽의 여름 밤거리에 주황빛 조명아래서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 부딪히는 잔, 의자가 움직이는 소리만으로 가득 차는 순간이 있었다. 어느 노랫소리, 음악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누나는 그 거리에 아무 음악이 존재하지 않았음을 내게 일깨워주었다. 새로운 앎이었다. 인위적인 소리 없이 오직 사람으로서 만들어지는 소리만이 채워지는 순간을 그 공간에서 느낄 수 있는 자유로움이 있음을.


 길을 걸으며 소를 유독 가까이서 마주한 순간이 있었다. 소의 근육이 그리도 선명할 수 있음을 그 순간 알았다. 한국에서 만난 소들은 근육의 나뉨을 알게 허락하지 않았다. 이곳의 그것은 우리에게 근육의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신기했다. 소라는 동물이 그리 체지방이 낮을 수 있는지, 그리 선명한 근육을 가질 수 있는지 신기했다.


 소리보다 소보다 내게 가장 큰 감동을 주었던 건 민둥산이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겠다고 마음먹고서 가장 기대했던 것은 단연 피레네 산맥이었다. 민둥산을 좋아한다.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그것을 좋아한다. 종종 그것을 마주할 때면 느낄 수 있는 평온함을 좋아한다. 바람이 불어도 흔들림을 드러내지 않는 그것을 좋아한다. 흐린 날의 그것을 좋아하고 맑은 날의 그것을 더 좋아한다.


 구름이 가득하다가, 모든 구름이 발아래로 내려가고서, 어느 순간 모두 사라졌다. 고도가 높아지고서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새파란 배경 앞에 자리 잡은 민둥산은 감탄을 자아내기에 한치의 모자람이 없었다. 한참을 오르고서 지구 반대편에서 고이 들고 온 돗자리를 펴내고 머리를 댄다. 둘이서 딱 맞게 몸을 뉘일 수 있는 돗자리 위에 모자를 얼굴에 올리고서 낮잠을 청한다.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는 산 위에서 청하는 낮잠이 그리도 달콤했다.


 25km를 걸어내고서 오늘 밤 몸을 뉘일 알베르게에 도착한다. 론세스바예스의 알베르게 앞에 흐르는 작은 냇가에 발을 담가본다. 얼음장처럼 차갑다. 다리로 온통 몰려있던 피로감이 흩어지는 느낌이 든다. 잔뜩 무거워진 몸을 찬물에 담글 때 느낄 수 있는 짜릿함이 좋다.


 걷고 씻고 빨래하고 밥 먹으러 향하는 길. 순례자의 전형적인 하루, 그중 첫날이다. 오늘은 알베르게에서의 저녁식사를 한다. 메뉴는 에피타이저로 토마토파스타/야채스프, 메인으로 돼지고기/생선 중에 선택할 수 있었다. 스프와 생선을 선택했다. 야채스프는 건강한 맛이었다. 조미료나 크림을 강하게 사용하지 않은 부드럽고 건강한 맛, 브로콜리의 향이 강했다. 생선은 처음 보는 종이었다. 특별한 향이나 맛, 식감이 있지는 않았다. 그저 부드러운 생선, 지극히 평범했다.


 음식은 특별할 것 하나 없었지만, 그곳에 모여 함께 식사하는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다양한 국가에서 저마다의 이유를 가지고 하루하루를 걸어내러 이곳에 온 사람들과 시끌벅적하게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좋았다.


 1일 차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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