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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황해볼게요 Aug 07. 2024

기억하고 싶은 건

 순례길을 걸으며 사진을 많이 남기지 않는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글을 써낼 때면 그 글을 더 직관적으로 이해시켜 줄 수 있는 사진을 담아내지 못하는 게 아쉬운 마음이 든다. 그럼에도 아름다운 순간에 바보상자를 꺼내 들지 않는 건 그 순간을 오롯이 즐기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서다. 핸드폰의 저장공간을 채워내는 일로서 나의 기억에 유효기간을 늘려낼 수 있겠지만 이 길 위에서는 바보상자의 눈 말고 나의 눈으로서 기억했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길을 걷다 어디로 가야 하나 헷갈리는 곳이 있었다. 걷는 사람의 그림 위로 붉은 사선이 그어져 있다. 누나가 저걸 보고서 유독 웃겨하기에 시선을 머물러본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아니 언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해도 저 그림은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심지어 전 세계 어느 곳에 가도 어느 곳에 놓여있어도 어색하지 않은 그런 표식. 얇은 기둥에 매달린 작은 철판에 그려진 세 가지 색 페인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시간을 아껴주었을까. 그들이 길을 잃지 않게 해 줌으로써 세이브한 에너지의 총량은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을 했다.

 짧고도 강하고 힘 있는 글을 동경하는 내가 그 끝에 추구해야 할 것은 가장 단순하고도 직관적이면서 그 뜻을 모두에게 이해시킬 수 있는 무엇이어야 하지 않나 생각했다.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공간을 마주한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라 가늠하기 어려운 곳이라 공간이라는 표현이 어색하지만 그곳이 내게 주는 느낌을 담아내려면 공간이라는 표현을 빌려야 하지 않나 싶다. 길을 걷다 우연히 우측으로 돌려낸 시선에 담기는 짙은 청록빛의 물, 그 위로 비치는 나무들. 성글게 내리쬐는 볕이 한 시선에 담길 때 내게 훅 다가오는 감탄스럽지는 않은 신비로움.


 순례 걸으며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종종 찾아드는 불편한 생각들이 있다. 그 생각들은 나의 몇 가지 회로를 거친다. 첫 번째로 5년 뒤에도 내게 중요한가. 두 번째는 내가 고민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가. 세 번째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대부분의 생각은 첫 단계에서 외면당하고 만다. 2단계를 넘고 3단계에 도달한 이들은 나와 친구가 되곤 한다. 종종 무료한 시간들을 가득 채워주기도 하고 희로애락을 같이한다.


 순례길을 걸으며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종종 찾아드는 불편한 생각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은 없다. 종교는 가져본 적 없고 신은 부정한다. 내가 부정한다 할지언정 어딘가에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은 당신을 부정하는 나조차 감싸 안을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종교는 없지만 순례길에 오르며 그 길의 끝에 내게 주어질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 거라며 추상적인 바람을 가져보곤 했다. 이제 고작 3일째 걸어냈지만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그게 아쉽지 않을 만큼 나를 잘 비워낼 수 있게 해주고 있다. 하루에 대여섯 시간씩을 내리 걸어내며 아침엔 유독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낸다. 끼니를 챙기고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내 몸에 귀 기울이고 아름다운 풍경에 시선을 가져다 대고 길을 마무리하면서는 몸을 깨끗이 씻어낸다. 하루를 마무리하면서는 글을 눌러 담고 몸을 주물러댄다. 그렇게 채워지는 나의 시간들과 그렇게 비워지는 나의 불편함들이 좋다.


 유럽여행을 하며 프랑스에서부터 복숭아를 많이 먹기 시작했다. 심각하게 맛있다는 말들을 많이 들어본 탓에 큰 기대를 갖고 먹었던 납작 복숭아는 기대 그 이하였다. 대단히 달지 않다. 적당히 아삭하고 기분 좋은 향긋함이 있는 복숭아다. 그래서 매일 함께하고 있다. 너무 달지 않아 부담스럽지 않고 아삭한 데다 향긋해서 순례길을 걷다가 간식으로 자주 먹는다.


 미리 씻어서 봉투에 담아 가기도 하고 씻지 않은 채 가지고 걷다가 수돗가를 만나면 씻어먹기도 한다. 두어 시간을 내리 쉬지 않고 걷다가 배고픔을 핑계 삼아 신발을 벗고 자리를 잡는다. 어제 먹은 파스타의 소스가 담겨있던 통에 아침을 먹으며 만든 계란찜을 담아왔다. 누나가 한국에서부터 챙겨 온 수저를 소중히 꺼내 들고서 한 숟갈씩 갈라먹는다. 그리 많지 않은 양에 금세 바닥을 드러낸다. 영 부족한 양에 떨어져 가는 에너지를 붙잡아가며 수돗가가 보이면 복숭아 먹고 갈래를 외친다.


 우리는 주로 흥미로워 보이는 것들을 여러 가지 사보는 편이다. 스페인어는 읽지 못하는 연유로 품종의 이름은 여전히 알지 못하지만 그래서 흥미롭다. 오늘로 두 번째 만난 품종의 복숭아이다. 망고 같은 속살의 색감을 가졌고 식감은 망고와 청도복숭아의 중간정도. 상큼한 플로럴 같은 향을 가진다는 게 가장 큰 특징이다. 젤리에서 느껴질 법한 인공적인 향의 뉘앙스를 가지는 게 완벽하게 마음에 든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는 포인트다. 다만 순례길 위에서 먹는 복숭아, 새로운 시도를 하며 느낄 수 있는 그 즐거움은 소중하다. 항상 완벽하게 마음에 들기만 하면 오히려 흥미를 금세 잃게 되지 않을까.


 너무 덥다며 에너지가 떨어진다며 어제 먹었던 아이스크림이 너무 맛있었다며 까르푸로 발을 들인다. 4개입 한 박스가 낱개 2개보다 저렴한 탓에 한 박스를 품에 안고 나온다. 누나와 하나씩 금세 해치운다. 필요한 에너지 그 이상의 단맛에 더 먹지는 못하겠는데 어찌하나 고민한다. 버릴까 하다가 누군가에게 나누면 어떨까 하다가 고개를 뒤로 돌린다. 운동화를 신고 운동복을 입고 가방을 둘러메고 씩씩하게 걷는 두 사람. 물을 것도 없이 순례객이다. 혹시 아이스크림 먹지 않겠냐며 우리가 4개를 구매했는데 너무 많다며 나누어드린다. 고맙다는 인사를 여러 번 듣고서 어찌해야 할지 몰라 나눈 그 아이스크림이 누군가에게 달콤했을 거라는 생각에 뿌듯해한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은 유럽여행. 프랑스에 머무는 동안 프랑스버터라는 새로운 세계에 빠져 그것을 너무 사랑하게 돼버린 탓일까. 요새 유독 맵거나 시원한 국물음식이 당기곤 한다. 누나가 피곤에 절여진 표정을 하고서도 나를 이끌고 간 중국마트. 이 먼 땅에서 마주한 라면에게 고맙다는 마음마저 든다. 뉴질랜드를 떠나기 이틀 전에 마라를 먹고 싶다며 고민하다 결국 구매하지 않은 그 마라소스가 우연히 눈에 들어온다. 누나가 뭘 고민해?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사자! 이럴 때 명쾌한 누나가 좋다. 소엔 라면은 무조건 인당 하나씩인 누나가 오늘은 배가 많이 고팠나 보다. 라면을 두 개만 집어 들었더니 이걸로 될까? 하길래 옳구나 하고서 얼른 하나 더 집어든다.


 숙소를 찾으며 걸어가다가 누나가 저거 정육점인가 하기에 바라보니 하몽을 판매하고 있었다. 발이 생각의 허락을 받지 않고 먼저 움직여버린다. 스페인에선 하몽을 등급별로 세분화해 판매한다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실제로 보니 놀라웠다.


 하몽이 들어간 샌드위치를 구매해서 나왔다. 재료는 바게트와 하몽이 전부다. 저 얇은 하몽 한 장으로 짠맛과 풍미를 모두 채워낸다는 게 신기하다. 단 두 가지 재료로 샌드위치라는 표현이 무색하지 않게 만드는 건 그 재료가 갖는 파워풀함이었다.


 여행을 할 때면 그 지역의 마트를 구경하는 것을 좋아한다. 함께 가면 내가 편하게 구경하지 못할 거라며 있을 테니 혼자 다녀오라기에 발걸음을 향한다. 맥주와 와인이 저렴하고 고기는 한국의 3분의 1 가격쯤 되는 것 같다. 햄의 종류는 100가지쯤 보이고 사보고 싶은 올리브오일만 5가지는 넘는다. 모든 게 흥미로워 보이는 그곳에서 시간만 허락한다면 하루는 족히 놀아내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쉽게도 6시간 뒤에 끝날 오늘은 한정되어 있고 그 시간 동안에 내게 남은 숙제들을 생각하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처음 보는 크림 같은 질감의 치즈, 프레시 모렐라, 에담치즈, 잠봉, 초리조, 양상추, 달걀을 사서 숙소로 향한다. 새로운 식재료나 익숙하지만 너무 저렴한 음식들을 보며 온갖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흥미가 돋는다. 스페인에서 40일은 더 보내게 될 거라며 아쉬워하는 스스로를 위로한다.

 숙소에 오니 누나가 여전히 자고 있기에 곁에 다가가 조용히 깨우다 조용히 대화한다. 마트에서 어떤 게 있었고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떤 게 흥미롭고 어떤 걸 사야 하는지 고민했고 아쉬워하다 돌아왔고 하는 것들을 설명해 주니 누나가 흥미롭다며 그런 내가 신기하다고 말해준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같이 좋아해 주는 누나에게 자주 고맙다는 마음이 든다.


 저녁으로 라면을 끓인다. 농심의 쇠고기면, 처음 먹어본다. 뜨거운 물을 받고 스프를 먼저 몽땅 털어 넣는다. 간을 보고서 물을 조금 더 넣고 마라소스를 한 스푼 넣는다. 맛을 본다. 조금 심심하기에 반스푼 더하니 완벽하다. 면을 넣고 끓이다 풀어질 때쯤 계란을 넣는다. 넣고 또 넣는다. 오늘 머무르는 알베르게는 환기시설이 그리 잘 되어있지 않아서 고기를 굽기에는 무리일 거라며 대신 달걀을 구매해 왔다. 누나에게 달걀은 내 마음껏 넣겠다며 6개를 깨 넣었다.


 속이 풀리는 것 같다며, 배부름과는 다른 가득 참이 있다며 맛있다며 연신 들이킨다. 유럽에 와서 며칠 지내며 고향의 맛이라 표현할 수 있는 범위가 한중일로 넓어졌다. 큰 마트에 가도 그 흔한 신라면, 불닭볶음면조차 찾기 어려운 이곳에서 동, 마라탕 같은 일본이나 중국의 음식을 먹어도 한국의 그것과 비슷한 만족감을 느낄 것 같다는 감각.


 건더기를 모두 건져먹고서 국물만 들이키다 누나에게 계란 하나만 달라고 부탁했다. 누나가 감탄한다. 나는 무엇을 할지 말하지 않았다. 누나는 기왕 할 거 두 개 하라며 건네준다. 그릇에 달걀을 깨고 포크로 대충 휘젓다가 남은 라면국물을 더한다. 대충 휘젓는다. 대충이 포인트다. 계란찜에서 채 풀어지지 않은 흰자가 주는 식감을 좋아한다. 렌지에 익혀낸다.

 국물을 충분히 넣지 않았던 탓에 내가 좋아하는 식감만큼 부드러워지지 못했지만 윗부분이 유부 같은 식감을 내주어 좋았다. 남은 국물을 더 부어 함께 떠먹는다. 누나를 바라보며, "우리 너무 잘 먹는다."


 3일 차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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