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시 반에 눈을 떠낸다. 내가 뜬 건 아니다. 곁에 있던 바보상자가 본인의 스피커를 열심히 울려대는 걸 듣고서, 5시 반에 일어나자고 했던 약속이 떠올랐을 뿐이다. 그 약속이 나를 눈뜨게 만들었으므로 떠낸다는 표현이 아주 적절할 테다. 어제의 걸음이 오늘 아침의 내게 흔적을 남겼다. 다리가 조금 뻐근했고 아침에 들어 올리는 눈꺼풀이 무거웠다.
씻고 온 누나가 손을 잡아 이끈다. 자신의 안경을 벗어 내게 씌워주곤 창문 앞에 세운다. 하늘이 군청색이다. 검지도 파랗지도 않다. 오묘하게 밝고도 어둡다. 그 하늘에 흰 점들이 빛난다. 신기하게도 그 새벽의 별은 유독 또렷했다. 별을 좋아하는 그녀는 별을 좋아하는 내게 그 풍경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그 마음이 고마웠다.
어제 널어두었던 빨래에 이슬이 맺혀있다. 밤새 빨래를 널어두면 무용지물이구나. 이렇게 몸으로 직접 경험하며 배워내는 게 참 마음에 든다.
스트레칭을 하며 길을 걸을 준비를 한다. 요새 종종 말썽 부리는 무릎이 팜플로나까지만 잘 버텨주길 바라며 길을 걷기 시작한다. 생장에서 지나친 거 아닌가 싶게 구매했던 간식들은 어제 몽땅 소진해 버렸다. 계획 없이 몸으로 부딪히는 게 즐겁다며 어디에서 식사할 수 있는지조차 찾아보지 않은 우리는 결국 끼니를 해결할 곳을 찾지 못하고서 론세스바예스에 도착하기 전 납작 복숭아 5개, 에너지바 6개, 초코 또르티야 7개를 해치웠다. 오늘 먹을 게 없다는 소리다.
해가 채 떠오르기 전 길에 오른다. 나무가 동굴처럼 길게 이어지는 그 길은 어두웠다. 하늘이 밝아오는 것이 보여도 여전히 그 속은 어두웠다. 배는 고프지 않았다.
8시에 문을 여는 첫 식료품점을 지나친다. 다음 마을에서 식료품점을 찾았으나 10시 30분 오픈, 결국 바로 앞에 열린 식당으로 들어간다. 처음 보는 메뉴들이 여러 개 있길래 흥미로운 것을 하나 주문해 본다.
반숙 달걀프라이 아래 자리한 붉은 무언가. 식감은 눅눅해진 튀김부스러기 같았다. 향은 당면순대의 선지 같은 향이 났다. 오묘하고 이상했다. 허기진 속만 얼른 달래고 길을 나선다.
얼마 되지 않는 양에 맛없는 음식이었지만, 뱃속에 자리하는 무언가가 주는 에너지가 있었다. 무언가를 먹고서 그게 에너지로 전환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오늘 깨달았다. 지금까지 에너지가 떨어질 만큼 배고플 때 무언가를 먹으면 배부름이 느껴질 만큼 먹곤 했다. 그 시간이 짧지 않았으므로 다 먹고 나면 힘이 나는 상태였다. 오늘은 양이 적었던 탓에 금방 먹고 자리를 나섰다. 걷기 시작하고 20분쯤 지나고서야 머리가 빨리 돌고 입이 트이고 힘이 난다는 게 느껴졌다. 나에 대한 걸 무언가 깨닫는다는 거, 작은 것이지만 놓치지 않고 그 포인트를 캐치했다는 거, 그 순간이 순례길의 위에 있었다는 게 좋았다.
꽃을 마주한다. 오묘하고 아름다운 색을 가졌다. 매혹적이었다. 그 색감이 카메라에는 담길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누나는 본인의 기억을 위해 사진을 남기겠다고 했다. 동식물에는 큰 관심을 갖지 않는 편인데, 누나와 함께 다니며 종종 흥미를 갖게 되곤 한다. 강아지나 고양이를 보면 늘 감탄하는 누나덕에 종종 무슨 일 있나 하며 시선을 빼앗기곤 한다. 길을 걷다 식물의 이름을 말하는 누나덕에 종종 그 이름도 알게 되고, 본인이 가진 그 식물에 관련된 기억들을 말해줄 때면 늘 귀 기울이고 흥미롭게 듣는다. 고마운 일이다.
다른 마을에 들어서서 충분하지 못했던 아침식사를 덧대고자 식료품점에 들렀다. 햄과 레터스, 요거트, 복숭아와 납작 복숭아, 귤을 사들었다. 유럽을 여행하며 다양한 종류의 햄을 많이 먹었다. 어느 식료품점에 가도 다양한 종류의 생햄을 저렴한 가격에 판매한다. 빵이나 야채와 함께 구매해 간단한 식사를 만들기에 간편한 데다 한국에 없는 종류의 햄들도 많아 재미가 좋다.
마트 앞에 있는 수돗가에서 레터스를 씻고 햄을 뜯고 낮은 담장에 걸터앉는다. 가벼운 식사를 하고 떠날 거라 골라본 지방이 없는 햄. 적당히 짜고 담백한 게 맛이 좋다. 종종 햄과 함께, 주로 레터스만 꼭꼭 씹어낸다. 마땅한 테이블하나 없는 곳에 걸터앉아 야채와 햄만 씹어먹으며 하루에 20km씩 걸어내는 허영과 가식이라곤 모두 버려내야만 하는 내가 좋아하는 여행을 좋아해 주는 누나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행운이었다. 요거트를 하나씩 먹고서 복숭아를 씻어 가방에 넣고 물통을 채워낸다. 스트레칭을 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숨차는 오르막도 무릎 아픈 내리막도 없는 길이 이어진다. 힘든 만큼 아름다운 건지 어제만큼 힘든 순간도 극적인 아름다움도 없었지만 그 덕에 어제보다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누나는 가식과 허세에 알레르기가 있다. 내게는 그런 게 없어서 좋다고 했다. 나는 가장 가까운 이와 가장 먼 이에게 친절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했다. 처음 보는 가게 직원분들께, 매일 보는 누나에게 친절해야 한다고 말했다. 누나는 그게 마음에 든다고 했다. 걸으며 나누는 대화들이 좋았다.
오늘 머물 마을은 주비리. 이름을 여러 번 곱씹었다. 이번 여행에서 지나치는 지역들 중에 이름이 입에 맴도는 곳들이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바욘. 이름에 음을 넣어 부르고 싶은 곳이었다. 바욘↗! 주비리는 담백하게 부르고 싶은 이름이었다. 한국 경남 거창의 마상리. 산티아고 순례길의 주비리.
씻고 빨래를 하고 다시 숙소를 나선다. 장바구니를 메고서 마을을 걷는다. 작은 마을. 작다는 말이 어울리는 아주 작은 마을. 슈퍼에서 저녁에 먹을 파스타와 내일 먹을 시리얼, 아이스크림을 구매한다. 수많은 순례자들이 방문하는 이곳에서도 영어가 통하지 않는 게 신기하다. 영어로 물었는데 당연하게도 그들의 언어로 답하는 이들이 신기하다.
아이스크림을 들고 그늘진 벤치에 앉아 작은 광장을 바라본다. 하루종일 땀 흘리고서 더운 날 먹는 아이스크림이 유독 맛있다. 금방 해치우고서 근처에 있는 다른 식료품점으로 향한다. 누나가 고기를 왕창 먹고 싶다 그런다. 신중하게 고민한다. 가브리살이 크게 붙어있는 등심을 3센치 두께로 2장 구매한다. 누나는 과자를 고르고 복숭아와 납작 복숭아, 사과도 하나씩 구매한다. 마음이 든든해진다.
과자를 먹고 가고 싶다는 누나의 말에 아이스크림 먹던 벤치에 앉았다가 마을을 산책하는 게 어떻겠냐는 말에 따라나선다. 누나가 과자를 한입 먹여주기에 받아먹고선 다시 식료품점으로 향한다. 큰 맥주 한 캔을 얼른 집어 들고 다시 산책에 나선다. 잠봉 맛 감자칩, 마음에 든다. 맥주 들고 하는 산책, 마음에 든다.
돼지등심 스테이크와 토마토 파스타. 영어가 통하지 않는 스페인 정육점에서 번역기로 바디랭귀지로 어렵사리 손에 쥔 돼지등심. 뉴질랜드를 떠난 후로 오랜만에 먹는 고기!스러운 고기가 주는 만족감에 입꼬리를 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