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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황해볼게요 Sep 12. 2024

우린 안 되는 게 없어

Day28 Camino de Santiago

 사과와 토르티야를 먹으며 길을 시작한다. 아무래도 가장 완벽한 아침메뉴인 것 같다. 이제는 요령이 생겨 도구 없이 토르티야 먹기쯤은 쉽다.


 채 200km도 남지 않은 순례길을 걸으며 뿌듯하고 벌써 끝나간다는 것에 작은 아쉬움도 품어본다. 이른 아침에 길을 걷기 시작하면 좋은 건 하루의 시작에서 날이 밝아오고 해가 떠오르는 순간을 온전히 함께 할 수 있다는 거다. 오늘도 붉은빛으로 조금씩 물들기 시작하는 하늘을 보며 걸음을 내딛는다.


 요샌 집 없는 달팽이를 자주 마주친다. 한국에선 본 적이 없는데, 색도 완전히 검은 게 독특한 아우라를 뿜어낸다. 길이 평탄한 곳에선 땅을 잘 보지 않고 걷는 탓에 밟을 뻔한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때마다 누나가 조심하라고 알려주었다. 누나는 동물이나 식물을 눈에 더 잘 담는 것 같다. 나는 주로 자동차나 상점, 하늘이나 먼 풍경을 보며 걷는 순간이 많은 것과는 반대되어서 좋다. 대화를 하거나 같이 걷다 보면 누나가 보고 있는 것에 자연스레 관심을 갖게 되고 그것이 시야를 넓혀주는 게 느껴진다.


 노란 페인트로 칠해진 집을 지나친다. 작은 화분이 여러 개 꽃 피우고 있고 그 뒤로 테이블 하나와 마주 보고 있는 의자가 있다. 순례길을 걸으며 그리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모습의 집인지라 특별하다고 생각하진 않으며 지나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에서 이런 집을 쉽게 찾을 수 있는가 물으면 그렇다고 답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머릿속에 찾아들고서 다시 보니 그것이 더 아름다워 보였다. 자신의 개성을 담아내고 작게나마 여유를 즐겨볼 수 있는 공간을 가진 집에, 나는 그런 곳에 살겠노라 다짐했다.


 순례길을 따라 걷다 지나게 되는 마트가 있었다. 박스가 여러 개 쌓여있었다. 유독 쉽게 읽히기에 잘 보니 한국 제품들이었다. 순례길을 걷는 한국인들이 많지만, 이 먼 땅에서 한국 제품들을 파는 상점을 마주할 때면 신기하고 반가운 마음이 든다.


 어제 산 오렌지주스를 얼려 들고 길을 걸었다. 적당히 녹았을 때쯤 마구 흔들어 슬러시를 만들었다. 그냥 먹었을 때보다 훨씬 맛있었다. 어릴 때 집에서 주스를 얼려 막대기를 꽂고 아이스크림처럼 먹곤 했던 기억이 떠오르더라.


 오늘도 감탄할 만큼 이쁜 올드카를 두대나 마주했다. 각진 디자인에 독특한 눈매가 마음에 들었다. 이런 차들이 현역으로 도로를 달린다는 게 신기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이쁘게 가꾸어지거나 애지중지하는 느낌보단 '넌 여전히 강력해, 일해야지.' 하는 느낌으로 관리되는 것 같아서 더 마음에 들었다.


 원래 머무르고자 했던 알베르게가 이미 가득 찬 상태여서 다른 선택지 없이 다음 마을로 이동하게 되었다. 우연히 머무르게 된 오늘의 알베르게는 지금까지의 순례길 중 단연코 가장 아름다운 곳이었다. 흰 장발을 한 호스트는 아우라를 풍겼다. 내부에는 독특한 인테리어 장식이 많이 있었고 건물의 안팎으로 그림이 많이 그려져 있었다. 호스트는 알베르게를 소개하며 페인트 많이 있으니 그림 그리라고 여러 번 이야기했다. 순례자들이 남긴 흔적이 그곳의 정체성이 된다는 게 아름다웠다.

 야외공간 뒤로 작은 냇가가 흐르고 있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물에 몸을 던졌다. 먼저 발만 담가보았을 때는 얼음처럼 차가웠던 그것이 몸을 던지니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짜릿함과 극단적인 쾌감 웃음 짓는다.


 저녁 먹기 전, 맥주를 한 병씩 나눠 들고 앉았다. 이 우연함에 대해 이야기했다. 원래 가려던 알베르게에 자리가 없었고 다른 선택지 없이 오게 된 이곳에서 마주한 아름다움이 좋다고 했다. 순례길을 걸으며 늘 습관처럼 "우린 안 되는 게 없어!", "어떻게 다 잘 되는 거지!"라고 외친다. 그렇게 말하다 보니 정말 그렇게 되고 있다.


 저녁은 알베르게에서 호스트가 직접 요리해 준 음식을 먹었다. 채식주의자인 호스트는 토마토수프와 채소파스타, 사과로 만든 디저트를 내어주었다. 파스타가 생각보다 맛있어서 놀라웠다. 하나하나 잘 구워낸 채소가 내는 풍미와 식감이 좋았다.


 식사를 마치고서 야외공간에 앉아있었는데 호스트가 키우는 고양이가 다가왔다. 사람을 경계하지 않는 듯했다. 처음으로 고양이를 만져보았다. 보기보다는 털의 힘이 강했고 피부가 말랑말랑했다.


 8시가 되어 게스트들이 한 공간에 모여서 명상을 했다. 향을 피워두고서 눕거나 앉은, 저마다의 자세로 호스트의 설명에 따라 호흡하는 시간을 가졌다.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호스트는 본인만의 세계를 가진 인물인 것 같았다. 누워서 호흡하다 자연스레 잠에 들었다. 누나가 손을 주물러주기에 잠에서 깼다. 편안했다.


 벽에 그려진 달팽이에 정감이 갔다. 요새 들어 걷는 동안 달팽이를 자주 마주해서 그러한가. 플라잉요가 장비가 있길래 처음으로 몸을 맡겨보았다. 폭 감싸져 있는 게 여간 포근했다.


28일차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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