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출발한 생장까지 667km, 우리의 목적지 산티아고까지는 114km. 순례길을 걸었던 30여 일 중에 가장 일찍 길을 나선다. 여전히 어둠이 가시질 않은 그 새벽에 길을 떠난다.
병을 가져가면 물을 구매할 수 있는 신기한 기계를 보았다. 한국에선 볼 수 없는 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것들을 종종 마주할 때가 있다. 생각보다 가격이 많이 비싸기에 실효성이 있는가 의문을 갖게 했지만, 모든 발전이 처음부터 완벽할 수 없음을 생각했다. 이럴 때면 종종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새벽에 길을 걸었다. 플래시를 손에 들고 바닥을 주시하며 걸어야 했다. 그 길은 즐겁지 않았다. 아무런 아름다움도 즐거움도 감동도 없었다. 다만 고양이가 있었다.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들렸다. 누나가 어디야, 얼른 나와봐 하니 진짜로 눈앞에 나타나 버렸다. 우리가 걸으면 따라 걷다가 뒤를 돌아보면 시선을 돌리며 모른 척했다. 따라오면서도 시크한 척하는 고양이, 귀여웠다.
선크림 한 통을 다 비워냈다. 묘한 성취감 내지 감동이 있었다. 우리가 꽤 오랜 길을 걸어왔음을 간접적으로 체감했다.
탁 트인 풍경에 또 카메라를 들어 보인다. 순례길을 걸으며 그리 어렵지 않게, 자주 마주하지만 늘 기분이 좋다. 순례길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부엔 카미노'에서 오늘 출발한 지역부터 순례자가 많아진다고 했다. 실제로 어제와는 다르게 많은 이들로 조금은 더 분주해진 길을 걸었다. 어제 머문 그 지역에서 순례길을 시작하는 이들이 많이 보였다.
순례길이 100km 남았다는 표식을 마주했다. 감동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누나에게 오늘 길이 재미없다고 말했다. 동이 트기 전 바닥만 바라보며 걸은 길은 지루했다. 늘 순례자들과 마주하면 하던 인사도 하지 않는 이들이 많아졌다. 순례자가 많아진 탓에 예약할 수 있는 마땅한 알베르게가 없어서 새벽 일찍이서부터 걸음을 옮겨야 하는데 그 길마저 즐겁지 않았다. 누나에게 버스 탈래? 하며 웃었다. 누나는 나보다 더 크게 웃어 보였다. 누나는 기분이 째진다고 했다. 다른 이들이 어떻게 하던 정말 우리 마음대로 우리를 위한 선택을 하는 것 같다고.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났다.
어느 카페에 들러 카페 콘 레체와 참치파이를 먹었다. 확실히 잘 가꾸어져 있었고 그만큼 가격이 올랐다. 패키지로 순례길을 걷는 이들도 만날 수 있었다. 가이드를 따라 십 수명이 함께 길을 걷는 사람들, 어제까지는 마주할 수 없던 풍경이라 흥미로웠다. 나는 저게 무슨 재미가 있을지 모르겠다며 이야기했다. 누나는 저런 선택이 필요한 사람들도 있을 거라고 했다. 가령 정보를 찾는 것이 힘이 든다거나 하는 사람들. 다른 관점을 이야기해 주고 그 속에서 긍정을 찾는 사람이라 고마웠다.
24km쯤 걸어서 머물 마을에 도착한다. 마을 초입에서 강을 건너고 오르막을 오른다. 강의 풍경을 내려다보는 게 퍽 아름답다. 푸른 날씨가 크게 도왔다. 여담으로 스페인에 와서 츄러스를 두어 번 먹었는데 마음에 들었던 덕에 오늘도 먹으려 했다. 마을에 츄러스를 먹을 수 있는 곳이 한 군데 있었다. 사진에 보이는 테이블이 놓인 카페였다. 잔뜩 기대하고서 잠시 쉬다 다시 오자고 했다가 카페가 일찍이 문을 닫은 탓에 먹지 못하게 되어 아쉬워했다.
침대에 몸을 뉘이면 눈에 담기는 창밖 풍경이 아름다웠다. 창틀이 프레임 같았고 아주 정교하게 그려진 아름다운 구름 같았다. 날씨가 좋은 덕에, 창가에 자리를 잡은 덕에 한 번 더 미소 지어 볼 수 있었다. 이런 행운을 자주 마주칠 때면 좋은 삶을 살아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32일차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