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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황해볼게요 Sep 23. 2024

많이 낯선 경험

Day34 Camino de Santiago

 이른 아침에 랜턴을 손에 들고 우비를 꺼내 입고 길을 걸었다. 어제 저녁식사를 함께한 독일 소녀와 같이 걸었다. 순례길을 걸으며 다른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하다 보면 우리의 감각이 주가 되는 대화를 많이 나눈다. 가령 길을 걸으며 무얼 느끼는가 하는 것들. 오늘 나눈 대화는 그와 꽤 달랐다. 그녀는 내가 가진 배경에 대한 질문을 여러 번 던졌다. 해외를 다니며 새로운 사람들을 마주쳤을 때 주로 나누는 대화와 달랐다. 그러다 그녀는 부모님의 직업을 물어왔다. 나는 질문을 옳게 이해한 것인지 의심했다. 낯선 감각이었다. 한국이 아닌 곳에서 단 한 번도 내게 부모님의 직업을 물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근래 들어 부모님의 직업에 대해 물어오는 사람은 한국에서조차 마주한 기억이 없다. 흥미로웠다. 내가 가지고 있는 웨스턴에 대한 이미지는 그저 이미지일 뿐이었나 생각해 볼 계기가 되었다. 우리의 대화는 매끄럽지 못했다. 불편하다는 의사를 조심스레 전하며 따로 걷는 것이 어떻겠냐 말했다. 그렇게 우리는 안녕을 고했다. 신선한 경험이었다.


 가까이 보이는 카페에 들어가 카페 콘 레체를 마셨다. 지금까지는 조금 추워도 옷을 껴입고, 물이 고여있어도 닦아가며 야외테이블을 고집했다. 다만 오늘은 너무 추웠다. 아쉽지만 않은지 채 몇 분이 지나지 않아 실내로 자리를 옮겼다. 추운 날씨에 따듯한 카페 콘 레체 한잔이 괜찮은 만족감을 주었다. 누나와 해외생활의 만족감에 대해 이야기했다. 관계를 맺어감에 있어서 나이나 배경을 중요시하지 않는 거, 타인을 의식하지 않는 전반적인 분위기, 그로서 얻어지는 감정적 자유 내지 편안함이 좋다고 말했다. 우리가 그런 점을 좋아했음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해 준 그녀에게 고마운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파스텔톤의 잎을 가진 나무가 아름다웠다. 순례길 초반에 종종 마주할 수 있었던 나무인 것 같은데 길의 후반부에 다시 마주쳤다. 늘 경사진 곳에 심어져 있었다. 실물에 대한 지식이 얕은 탓에 저것이 어떤 나무인지 어떤 특성을 갖는지 알지 못한다. 그것의 잎이 정말 파스텔톤을 가진 것인지 흐린 날씨 덕에 멀리서 보면 그렇게 보이는 것인지 조차 알지 못한다. 가까이 가서 잎을 살펴보지 조차 않았지만 그저 나의 시각이 받아들이는 이미지 속의 저 나무가 참 마음에 든다.


비가 계속 내렸다. 이끼나 잎에 안겨있는 나무줄기가 흐린 날씨와 어울려 무게감 있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오늘의 아침도 어김없이 토르티야였다. 먹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참 좋은 음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포만감 있고 건강한 재료로 만들어진다. 자주 먹어도 쉽게 질리지도 않고 들고 다니기도 편하며 걸으면서 먹기에도 좋다. 순례길의 고마운 친구다.


 잠시 카페에 들러 음료를 한 잔 마셨다. 팬시한 숙소를 함께 운영하는 곳인 것 같았다. 아침보단 기온이 오른 덕에 야외에 자리 잡고 앉았다.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고 있는 게 꽤나 낭만적이었다. 순례길을 걷자고 마음먹을 때, 걷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곳에서 찾을 수 있는 작은 낭만이나 행복을 소홀히 하지 말자고 했다. 그 약속을 잘 지키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나무에 폭 감싸져 길을 었다. 흐렸고 비가 계속 왔다. 마을에 들어서 오늘 머물 알베르게가 눈에 들어온다. 매일매일 스스로와 챌린지하는 느낌이 든다. 그날 걸을 길을 정해두고 그 길을 다 걷고 나면 성취감을 느낀다. 끼니를 잘 챙기는 것도, 하루 동안 힘써준 몸을 씻어내는 것도, 그날 입은 옷을 매일매일 손으로 빨아내는 것도 스스로에게 내는 숙제 같고 이루고 나면 성취감을 보상으로 받는다.


 숙소에 도착해서 가방만 내려두고 며칠 전에 사서 아껴두었던 중국라면을 끓였다. 비가 계속 오고 꽤나 추위를 느낀 그 하루에 내게 해줄 수 있는 근사한 선물 같았다. 그럭저럭 괜찮은 맛이었지만 기분이 되게 괜찮았다.


 비가 오기에 씻기 전에 마트에 다녀왔다. 저녁으로 무얼 먹을까 고민하다가 냉동코너에서 조개가 보이기에 담았다. 시원한 국물이 그리웠다. 탕을 끓여 먹고서 그 국물을 졸여 파스타를 해 먹을 요량으로 파스타도 샀다. 내일 아침으로 먹을 사과와 토르티야도, 길을 걸으며 먹을 자몽도 야무지게 사 왔다.


 오늘 구미를 확 당기는 와인이 없기에 가장 저렴한 친구와 함께 왔다. 맛이 실망스러웠다. 한국에서 먹는 맛없고 저렴한 화이트와인의 뉘앙스를 강하게 풍겼다. 스페인에서 5유로 이하 가격대에서 마음에 드는 와인을 여러 번 접한 터라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조개탕은 맛있었다. 시원한 국물이 좋았다. 영어로 이 맛있음을 어찌 표현할 수 있는가 고민했는데 잘 모르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시원하다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표현이었다. 국물을 남겨서 졸여내고 파스타를 따로 삶은 뒤에 올리브오일과 마늘파우더를 넣고 육수를 더해가며 조리해 냈다. 맛있었다. 둘이서 파스타 한 봉을 다 먹었다. 맛있음 그 이상으로 감정적인 것을 충족해 주는 그 식사에 기분이 좋았다.


34일차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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