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연대가 자리 잡은 곳

by 핑크뚱

뜨겁다. 내 안 깊은 밑바닥에서 시작된 뜨거운 화염이 나를 집어삼켰다. 매일 밤 뜨겁게 달뜬 몸을 누이나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나의 밝은 밤이 깊고 길어질수록 내 안의 화염은 점점 선명하고 뚜렷하게 힘을 키웠다. 갈수록 몸의 주인인 나를 압도한 괴물의 형태가 됐다. 괴물은 나로도 모자라 남편과 어린 아들에게로 삽시간에 번져 모두 태워 버릴 것 같던 날이 반복되던 때, 엄마를 바라보는 아들의 눈과 마주했다. 깊고 검은 눈동자 속에 담긴 붉은 괴물은 다름 아닌 내 모습이었다. 순간 정신이 아찔했다. 엄마라는 이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나는 끝끝내 괴물이 됐다.


나는 호수의 수면 아래 버둥대며 안간힘을 쓰는 백조의 발 같은 삶을 살았다. 착한 딸, 모범생, 현명한 아내, 자애로운 엄마라는 이름표가 더 이상 나를 버틸 수 없게 했다. 나와 사뭇 다른 결을 가진 아들을 키우는 시간은 자꾸만 내 안의 다른 나를 꺼내 놓아 힘들었다. 아무렇게나 구석에 던져 놓았던 감정은 주인의 돌봄을 잃어 엉켜 차곡차곡 내 마음을 채워갔다. 사십 년의 긴 시간은 오래되고 묵은 쓰레기 같은 감정을 바싹 마른 장작더미로 만들었다. 작은 스파크에도 활활 타오를 준비가 된 엉킨 감정이 육아라는 도화선에 의해 붉은 괴물이 됐다. 내 안의 불길을 가라앉혀야 했다. 괴물을 끄집어내야 했다.

내 어린 시절 살던 동네에는 아이들 일고여덟은 모여야 안을 수 있는 연리지 나무가 있었다. 이곳은 마을의 공동 육아 터이자 놀이터였으며 어른들의 달궈진 숨을 돌리는 쉼터였다.

한낮이 되면 들이나 밭에서 일하던 농부와 뜨거운 해가 숨바꼭질을 시작했다. 술래인 해를 피해 온 농부는 온몸에 품은 뜨거운 열기를 무성한 연리지 나뭇잎으로 뒤덮으며 몸을 숨겼다. 술래는 끝끝내 숨은 농부를 찾지 못해 뉘엿뉘엿 산을 넘었다. 그 틈에 농부는 탁주 한 사발씩 나눠 마신 후 목침 베고 누워 다디단 한숨 자고 일어나 들로 밭으로 다시 일하러 갔다. 아이들은 어른들 옆에서 시끌시끌 소란스럽게 뛰어놀았다. 연리지 나무에 올라 날다람쥐가 되기도 했다. 갓난아이를 품에 안은 젊은 아낙들은 시원한 그늘 속에서 젖을 먹이며 수다를 떨고 더위를 식혔다. 눈으로는 뛰어노는 아이들을 챙겼다. 그곳은 어린 우리들의 소란스러움도. 들일 밭일하다 숨 돌리는 어른들이 건네는 시답잖은 우스갯소리도. 갓난아기들의 울음소리도. 한여름 뜨거운 열기가 묻은 땀도 쉬이 사라지게 하는 모두의 쉼터였다.


아들을 통해 나라는 괴물과 마주한 그해, 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 프로그램 글쓰기 수업에 참여했다. 20회기 수업 일정으로 ‘나’의 삶을 되돌아보고 기록하여 자서전으로 출간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긴 과정이라 걱정이 많았다. 수업이 진행되는 교실로 어린 아들의 육아가 옮겨와 더 그랬다. 하지만 내 기우였다. 수업에 함께한 동료들은 아들과 나를 대견하다며 지지했다. 내 걱정 따위는 나뭇잎 위로 살랑이는 바람에 날려버린 동료의 따뜻한 태도가 있었다. 그들의 다정한 말은 마른 내 마음을 촉촉하게 했다. 그렇게 참여한 수업 시간은 어린 시절의 연리지 나무 그늘에 앉아 느낀 휴식이 됐다. 그들이 살아온 다채로운 삶의 이야기가 바람을 타고 내 귓가로 불어와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들도 역시 세상에 근심, 걱정의 거센 파도를 용기 있게 헤치고 지나왔다고 이야기했다. 그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내 안을 태우고 있는 열기를 조금씩 가라앉혔다. 바싹 마른 감정에 촉촉한 단비를 선물했다. 서서히 내 안이 편안해지는 시간이었다. 누구에게도 뱉어내지 못한 묵은 감정은 글이 됐다. 내 이야기에 함께 아파하며 눈물 흘려준 그들과의 시간은 또 다른 나와 마주하게 했다. 인정하게 했다. 그 시간을 통해 묵은 감정을 끄집어내 덜어내는 법을 배웠다.

자서전 쓰기 수업을 끝내고 헤어짐이 아쉬웠다. 동료들의 마음도 나와 같았다. 우리는 독서 모임을 만들었다. 매월 한 권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눈다. 혼자 읽었을 때 내 안에 갇혀 우물 안 개구리 같던 생각은 그들의 생각과 더해지고 보태져 점점 크고 넓은 바다로 향하는 듯하다. 책에서 배운 삶의 지혜와 동기 회원들의 경험들이 합쳐져 다양한 색깔로 내 안에 스며든다. 자서전 쓰기와 독서 모임을 통해 드디어 내 안의 괴물을 잠재운다. 밖으로 끄집어낼 용기가 생긴다.

나에게 도서관은 어린 시절 살던 동네 연리지의 무성한 나뭇잎이 만든 그늘에 모여 서로를 챙기며 함께하는 연대의 장소이다. 어린아이들의 시끌시끌한 소리가 시원한 바람이 되고, 따뜻하고 든든한 동료들의 말이 촉촉한 단비가 된다. 은은히 코끝으로 맡아지는 종이 냄새는 엄마 품의 젖내 같아 편안하다. 이 모두가 어우러져 함께인 이곳 도서관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