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쓸개를 제거하다.
겨울이었지만, 그래도 햇살만큼은 적당히 따듯했던 그날의 점심시간, 직장인이 평일 대낮에 병원에 갈 수 있는 사치는 쉽지 않았기에, 산뜻한 바깥공기만큼 기분만큼은 나름 나쁘지 않은 상태로 익숙하지 않은 외출을 나섰고 그렇게 목적지인 병원에 도착했다. 그렇게 두꺼운 병원의 강화 유리문을 열자 역시나 적응 안 되는 특유의 병원 냄새가 풍기고 있었고 병원스러운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예약을 했냐고 묻는 차가운 간호사의 표정은 내가 아파서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 아님 지극히 보통적인 그녀의 표정인지 혼동될 만큼 웃는 상도 우는 상도 아니었다. 사람이 아프면 생각이 많아지고 서럽다. 여하튼 나는 예약을 했기에 바로 담당 의사를 만났는데, 의사는 내 증상과 몇 가지 검사를 해보고는 나에게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었다. 이렇게 젊은 나이에 쓸개에 돌멩이가 차서 쓸개를 제거해야 하는 경우가 요즘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 담석(쓸개에 생기는 돌) 전문 병원도 아니기 때문에 젊은 환자들은 못 만나봤다고 그렇게 뉴욕의 의사는 나에게 차분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그는 이어서 식습관도 문제일 수도 있지만 젊은 나이에는 특히 스트레스가 많아서 그럴 수 있다고 나도 예상했던 내용의 심심한 의사 소견을 전했다.
나는 수술을 해야 하냐고 물어봤지만, 수술이 필요한지에 대한 여부는 복부 초음파 결과를 보고 나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한국에서는 뭐든지 척척, 의료도 한 곳에서 모든 게 진행 가능하지만 미국의 경우에는 따로따로 되어있는 경우가 보통이기에 나는 복부 초음파만 전문으로 하는 곳에 가서 초음파를 해야 했다. 예약을 하고 며칠의 통증의 밤이 흘러 당일 그 병원 주차장에 통증과 함께 나의 차를 주차해놓고 나는 정말로 내 쓸개 속 돌멩이가 큰 사이즈는 아니기를 소망했고, 수술할 필요가 없는 정도이기를 희망했다. 약물로써 어떻게든 되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걸음을 병원으로 옮겼고 예약을 했기에 어렵지 않게 차가운 초음파실 침상에 누웠다. 내 복부를 차가운 기계로 이리저리 스캔을 하던 의사는 내가 긴장했던 게 보였는지, 아니면 늘 하는 이야기인지 나에게 약간의 미소를 띠며 "나이가 젊은 사람들은 막상 검사해보면 걱정할 수준이 아닌 경우가 많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녀는 히스패닉 계열의 여자 의사였는데 만난 지는 얼마 안 되었지만 그 짧은 순간에도 차가운 초음파실 공기와 환자의 불안한 마음을 그녀의 머리카락 색상만큼이나 따듯하게 해 주었다. 그런 그녀의 말에 나 또한 미소가 지어지면서 "그래 별일 아닐 거야"라는 생각을 했다.
초음파를 보던 그녀의 얼굴은 따듯한 미소에서 점점 굳은 표정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녀는 말해줄 수 없다고 했지만, 이미 표정에서 결과를 말해주고 있었다. 복부 초음파 검사 결과는 나의 담당 의사에게 전달되었는데 그는 검사 결과가 좋지 못하니, 곧 수술을 해야 할 거라고 역시나 차분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또한 미국에서의 수술은 비용이 너무 많이 나오기 때문에 한국에서 수술하는 것은 어떻겠냐고 권유했다. 이어서 돌멩이를 단순히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쓸개를 제거해야 하는 수술일 거라고 그는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쓸개를 제거하는 수술에 대해서 본인이 알고 있는 이론을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본인이 수술을 집도 할 의사도 아니면서 마치 의학 지식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요즘에는 배꼽으로 넣어서 쓸개만 제거해서 빼내면 된다는 둥, 흉터가 많이 안 남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둥 이때의 의사는 그동안의 차분한 어조가 아니라 약간은 높은 하이톤으로 계속 설명을 이어갔다.
본인일이 아니라고 저렇게 신나게 설명을 하는 걸까? 아니면 의사의 친절한 설명을 어긋나게 생각하는 걸까? 역시나 아프면 쓸 때 없이 생각이 많아진다. 삶을 살다 보면 발생하는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히는 것만큼 속 시원한 경우는 별로 없다. 나는 계속 떠들어대는 의사에게 오히려 차라리 잘되었다고 무표정하고 차가운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내 얼굴 건너편에는 거울이 없었기에 내 얼굴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확실히 그런 표정이었을 것이다. 약간 어리둥절해하는 의사에게 나는 이참에 일도 좀 쉬고 한국에 들어가서 수술하겠다고 그리고 나중에 뉴욕에 와서 수술 소식은 알려드리겠다고 이야기했다. 젊은 나이에 쓸개에 돌이 생긴 환자의 선전포고처럼 들렸을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차가운 간호사의 표정을 등 뒤로 한채 병원 유리문을 열고 나섰다. 병원 앞 보도블록에서 그대로 눈을 감고 숨을 천천히 깊게 들이켰다. 눈꺼풀 위로 따듯한 햇살이 나의 눈동자 뒤쪽까지 따듯하게 감싸고 피로를 회복해줄 것만 같은 햇살이었다. 날씨만큼은 그랬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평일의 따듯한 점심시간이었다. 나는 그날 저녁 통증이 오기 전에 가장 빠른 한국 비행기 편으로 예약했고, 회사의 대표에게는 이 소식을 차분한 어조로 전달했다. 그렇게 나는 서울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사람들은 각자의 결심을 하고 그들이 살아온 곳을 떠날 때 성공해서 돌아오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어렸을 때부터 이런 내용의 영화나 소설을 보았기 때문에 무의식 중에 학습된 부분도 있겠고 또 떠나는 마당에 그런 마음을 해야 정상일 것 같아서... 그리고 그렇게 되고 싶었기에 7년 전 그날 나 또한 그렇게 결심했었다. 그러나 7년 만에 쓸개를 제거하기 위해서 서울에 돌아와 버린 나의 현재 상황이 허탈했는지, 인천공항에서 계속 헛웃음이 나왔다. 수술만 하고 바로 돌아갈 일정이었기에 정말 친한 친구 1명 정도에게만 연락을 취하고 나는 곧장 호텔로 향했다.
호텔에 짐을 풀어놓고 잠시 주위 산책을 나갔다. 7년 만에 다시 도착한 서울은 수술을 앞둔 내 마음처럼 하늘이 뿌옇었다.(사실은 중국 미세먼지 때문이지만, 그때의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역시 아프면 생각이 많아진다)
한국은 뭐가 그렇게 척척이고 빠른지, 일 잘하는 사람들만 모아놓은 국가인지 내 조국이지만 모처럼의 한국의 일처리는 내 장기들이 적응할 시간도 없는 채 병원의 간호사 상담부터 수술까지 모든 부분이 막히는 것 하나 없이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일사천리로 이어졌다. 수술하기 전 의사에게 돌멩이를 받을 것인지 수술 장면을 볼 것인지 선택을 할 수가 있었는데 나는 모두 "Yes"로 체크했다. 그렇게 수술이 끝나고 나는 쓸개 속 내 돌멩이를 받아봤고 동영상으로 내 쓸개가 어떻게 레이저로 제거되고 절개되는지, 피가 얼마나 나는지 이를 지켜봤다. 분명히 영상 속 장면들은 나이스 한 장면들은 아니었다. 빨갛게 피가 튀기는 장면이 많고 징그러운 모습들이 많이 연출되었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신기하게 징그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동안 내 몸속에서 스트레스를 온전히 감당하고 힘들게 토해내고 있었을 쓸개에게, 그리고 내 몸안에서의 타인에 의해 독립되어가는 그 과정이 눈물 나고 처절해 보였다.
그렇게 며칠의 시간이 흘렀고 회복과정을 통해서 나는 미국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 정확히는 내 몸이 준비가 되었겠지. 나는 그렇게 한국을 떠나는 모든 준비가 되었으나, 한 가지 들러보고 싶었던 곳이 있었으니 그곳은 병원 앞에 미역국 매장이었다. 7년 전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혼자서 한국생활을 정리하고 혼밥을 했었는데, 그때의 메뉴가 미역국이었다. 20대의 나의 열정만큼 뜨거웠던 미역국을 삼키면서 미국에서의 삶을 견뎌내고 이겨낼 거라고,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지금의 이 선택이 훗날 돌이 켜봤을 때 후회 없을 선택일 것이라고, 그렇게 최면하고 용기를 냈었다. 그리고 쓸개 제거 후에 다시 미국으로 복귀해야 하는 새로운 상황에서 새로이 삼키는 30대의 미역국은 20대의 그때만큼 뜨겁지는 않았지만 다른 의미로 뜨거웠고, 새로운 다짐들을 하는 진정한 회복의 미역국이었다. 나는 그렇게 다시 미국으로 복귀하였다.
삶은... 좋은 날도, 나쁜 날도, 슬픈 날도 엮여있는 실타래 같은 나날들의 연속인 것 같습니다. 그 가운데 그때의 미역국의 의미가 저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여러분 각자의 삶 속에도 이런 눈물 나는 한 끼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했던 다짐들이 부끄럽지 않도록 하루를 살아가세요. 수년이 흘러 다시 그 한 끼 앞에서 부끄럽지 않을 자신이 되어보길 저도 희망하고 노력합니다. 글로써, 영상으로써, 멀리서, 음성으로써 여러분의 삶을 열심히 응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10편을 마지막으로 "내 나이 32, 쓸개를 떼었다"는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치열했던 젊은 날의 삶 속에서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서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소중한 무엇인가를 희생해야 했던 많은 분들에게, 저의 경험의 글들이 그분들에게 따듯한 공감과 위로의 글이 전달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