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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줌마 강릉댁의 강릉예찬

by 세일러 문

남편을 따라 아무 연고 없는 강릉으로 떠나오던 날, 나는 참 많이 울었다. 가까이 지내던 동네 언니들의 이사 배웅을 받으며, 즐겨 먹었던 언니네 김치 한 통을 받아 들고는 다 큰 어른이 울어버렸다. 서에서 동으로 가로질러 영영 살러 온 강릉. 친구도 없고, 가족도 남편과 두 아이뿐이라 아이들이 유치원에 가고 나면 테레비를 친구 삼아 온갖 드라마를 비롯한 여러 프로그램을 본방, 재방, 재재방까지 챙겨보는 일상에, 가끔은 폭음을 하기도 했다. 꼭 그런 날엔 남편에 대한 원망과 푸념도 잊지 않았고, 내 발등을 내가 찍었다며 자책도 많이 했다. 그 무렵 나는 아마도 많이 우울했었나 보다.


그 우울감이 조금씩 거둬지기 시작한 것은 집 밖을 나돌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낯선 타향살이에 아이들도 어렸던 터라 강릉에서의 첫해, 육아휴직을 신청했고 1년이라는 시한부 베짱이의 삶이 이러다간 집콕으로 끝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집을 나서기로 했다. 아이들을 유치원에 데려다주고는 운전대를 잡고 홀로 무작정 바다로 갔다. 조용한 순긋 해변은 차에서 내리지 않고서도 모래사장과 바다를 만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고, 안목 커피의 거리를 지나 강릉항 옆 죽도봉을 끼고도는 한적한 일방통행 도로는 시간을 두고두고 혼자 편히 바다를 담을 수 있는 최애의 장소였다. 어떤 날은 고요한 바다를 보며 생각에 잠겼고, 어떤 날은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 같은 거친 파도에 마음의 근심, 걱정 다 쓸려 보냈다. 어떤 날은 시리도록 푸르른 바다에 깊은 슬픔들을 잠식시켰고, 또 어떤 날은 맑디 맑은 에메랄드빛 바다에 설렘을 가득 품고 돌아왔다. 김신이 은탁이를 향해했던 고백처럼, 정말이지,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았다. 그렇게 나는 우울감을 털어내고 바다에 빠져 강릉에서의 첫 해를 무탈히 보낼 수 있었다.

바다, 너와 함께한 시간 모두가 눈부시고 아름다웠다.





긴 육아휴직 6년을 보내고 첫 복직, 그것도 타시도에서. 시골의 작은 학교로 발령을 받아 가보니 어마 무시한 업무들(교직경력이 많지 않을뿐더러 업무는 늘 두려움의 대상이고, 딱 일할 나이였기에)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렇게 시작된 워킹맘의 삶은 가히 쉽지 않았다. 친구들이 아무도 등원하지 않은 썰렁한 유치원에 두 아이를 등원시키고, 퇴근 후 데리러 가면 신발장에 덩그러니 남아있는 나의 두 아이 신발이 그렇게나 마음이 아프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그 시절을 버틸 수 있게 해 준 것은 출근길마다 만나는 경포의 아침이었다. 경포의 아름다운 다섯 개의 달. 하늘의 달, 호수에 비친 달, 바다에 비친 달, 술잔에 비친 달, 님의 눈에 비친 달, 이 다섯 개의 달만큼이나 아름다운 경포 아침의 해는 지금은 비록 힘들지만 잘 버티면 눈부신 날이 올 거라 약속해주는 것 같았다. 희망차게 떠오른 아침의 해, 경포 바다를 비추고 잔잔한 경포호를 눈부시게 빛나게 해주는 그 아침의 해가, 마치 나에게 그런 앞날을 선물해줄 것만 같았다. 아름다운 것에는 왜 마음이 무장해제되어버리는지_아름다운 경포의 아침이 업무폭탄의 날 선 복직자 마음을, 가정과 일터에서 고군분투하며 애쓰는 워킹맘의 굳게 닫힌 마음의 빗장을 열게 했다. 내 비록 집안일을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내 새끼들을 일찍이 유치원에 넣고 왔지만, 언젠가 눈부신 날들이 찾아와 줄 거라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 밖에 나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던 날들.

그날들 경포의 아침은 날마다 위로를 선물했다.



강릉으로 떠나오기 전에는 한 시간씩 지옥철을 타고 걸어서 출퇴근했더랬다.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출근길에 지쳐버려 믹스커피로 당충전을 해야만 하루일을 제대로 시작할 수 있었던 내가 매일 소나무 숲을 달려 출퇴근하는 삶이라니. 강릉에는 해송이 많다. 소나무들이 바닷바람을 맞고 오랜 세월을 견뎌내어 숲을 이루었는데, 나는 그중에서도 700년 동안 자리를 지켜온 송정의 소나무숲과 사천의 소나무 숲을 제일로 좋아한다. 오래 걷고 싶은 날에는 송정 소나무 숲을, 앉아서 풍경을 감상하고 싶을 때는 사천의 소나무 숲을 찾아 시간을 보내곤 하는데, 계절 또는 매일의 날씨, 누구와 함께 하느냐에 따라 팔색조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커피를 가지고 소나무 숲에 앉아 일렁이는 바다를 보고 있노라면 그 어느 핫플레이스 카페 못지않게 근사한 나만의 카페가 된다. 한적한 곳에서 아이들과 솔방울 야구라도 하는 날엔 ‘엄마 최고!’를 외치는 내녀석들과 솔밭을 배경으로 한 아름다운 풍경이 또 하나의 추억이 된다. 그리고 이 소나무 숲에서 느낄 수 있는 은은한 솔향과 피톤치드는 영육을 정화시켜 백세인생을 완성시킬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마저 들게 한다. 소나무 숲, 두고두고 지켜내야 할 강릉의 보물이다.

팔색조의 매력, 소나무숲.


오늘도 대관령의 바람개비들을 보며 미세먼지를 체크하고, 소나무 숲을 달려 출근, 매 순간 다른 빛깔인 바다를 수집하며, 어찌 이 강릉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생각한다. 반갑지 않은 우울감이 때때로 찾아올 때가 있기도 하지만, 강릉의 자연이 건네는 위로들로 그 우울이 오래가지는 않는다. 어쩌다 되어버린 강릉댁은 이제 스스로 강릉댁이기를, 여생을 강릉댁으로 살기를 자처한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강릉에 살어리랏다. 해 질 녘 바다를 등지고 노을 지는 대관령을 바라보며, 서쪽에 두고 온 나의 인연들에게 안부를 묻는다. 오겡끼데스까. 와따시와 겡끼데스. 강릉에 살러 오지 않을래? 강릉에 놀러 오지 않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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