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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스의 그림에 추억을 입히다.

모든 삶은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니까.

by 세일러 문

"서~~~~어 벼~~~~~얼 니~~임!!!!!!!!!!"


단전에서 끌어올린 샤우팅으로 달밤에 새로 이사 온 집이 부들부들 흔들렸을 것이다. 나의 분노만큼.

그렇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아들의 인격권을 지켜주기 위해 별님의 애칭을 사용해 봅니다. 이름 석자를 내질렀답니다. 나의 이웃님들 초면에 죄송했습니다.)



계획에 없었던 이사를 하며 지출이 컸던 터라 불필요한 소비는 참고 있었지만, 마티스의 그림을 큰맘 먹고 들여놓았다. 오래 고심하여 마음에 드는 그림을 골라 주문해 두었고, 이삿짐센터 사람들이 가자마자 벽걸이 티비 밑 콘센트 부분에 세워 두었다. 자리를 찾으니 더 마음에 쏙 드는 둥근 꽃병 드로잉. 너~~어무 마음에 들어 '보고 또 보고'의 시전이 반복되었다. 따뜻한 베이지 색감 종이에 무심한 터치만으로 완성된 드로잉이지만,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따뜻하게 살아가는 동안 또 우리의 색이 입혀질 것 같은 기대감 때문이었을까. 모처럼 애정이 가는 대상에 마음이 즐거웠다.



....

살림들을 우리 가족의 라이프스타일에 맞게 이곳저곳 다시 정리하고 있는데, 두 녀석이 보이지 않는다. 어느 순간 찾아온 고요함에 갑작스럽게 불안함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아이들이 조용한 순간은 조용히 사고를 치고 있는 것임을 다년간의 경험으로 엄마들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지..



마티스 꽃과 잎 드로잉 그림 구석에 얼룩덜룩 무언가 어둠의 기운이 느껴진다. 얼룩덜룩의 정체는 기름으로 추정되고,,,이사의 무료함을 말랑말랑 고무 도마뱀으로 달래고 있던 아들 별님이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엄마, 잘못했어요. 엄마가 좋아하는 그림인데, 제가 망가뜨렸어요.ㅠ"


다정하고 섬세한 아들은 내가 그림을 놓아두고, 오면서 가면서 그림을 보고 즐거워하는 것을 캐치하고 있었나 보다. 두 눈에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물기를 머금고 안절부절못하는 아들이 안쓰럽기도 했지만, 애증의 고무 도마뱀이 가져다 줄 불행을 이미 수차례 얘기하며 경고했던 터,

'이노무새퀴 그 봐 그 봐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 엄마가 뭐라 핸 - 던지고 놀다가 여기저기에 붙고 기름얼룩 묻고 한다고 몇 번을 얘기해 - 그림 얼룩은 지울 수도 없어 - 저 그림은 하루도 안 된 그림이야 - 하필 또 엄마는 그림이 정말정말정말 너무 마음에 들어서 간만에 신이 나 있었다구 - 너는 또, 또 또 또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버렸구나.'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아들에 대한 원망과 비난을 음소거 모드로 퍼부었다. 그러고 나니 그림이 망가졌다는 슬픔에, +어릴 적 망손이었던 나를 닮은 아들에 대한 미안함(왜 그런 걸 닮아서..왜 또 그런 걸 물려줘서...), +아들의 실수를 너그럽게 용서해주지 못한 나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 더해져 기분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어릴 적 나는 뭐든 잘 망가뜨렸다. 타고난 호기심 덕에 살펴보고, 만져보고, 분해해 봐야 직성이 풀렸던 어린 시절. 운동회에서 샀던 무지개 스프링과 같은 단순 장난감류부터 라디오나 마이마이 같은 전자 기기까지 내 손을 거쳐 간 녀석들은 내덕에 운명을 다하기도 했고, 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마음 한 구석엔 '결국엔 또 망가뜨리고 말았구나.' 죄책감이 조금씩 조금씩 자라났다.

(물론 이 탐구정신이 다 나빴던 것만은 아니었답니다. 그렇게 키워 온 탐구정신으로 ①웬만한 치케아나 마켓벌 같은 가구류 조립을 혼자서도 뚝딱뚝딱 조립 가능, ②석고보드 & 철판 등 모든 천장에 커튼봉이나 롤스크린 달기 가능, ③ 통신-전자 기기 매뉴얼 보고 조작 가능, ④미세방충망 혼자 교체 가능, ⑤2층 침대 혼자 분리&조립 가능!!!!!! 한 어른이 되어 있습니다.)

이 무거운 죄책감들 때문에 나를 온전히 사랑하기가 쉽지 않았다. 한 번씩은 그것들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으니까. 그래서 내 아이가 이런 무거운 감정을 느끼며, 때때로 불행해질 것이 두려웠다. 아이의 얼굴을 보니, 이미 너무 그러한 것 같아서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달님아, 모든 삶은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니까. 그냥 그렇게 될 것이 조금 더 일찍 그렇게 된 것뿐이라 생각해~." (갑툭 남편 등장)



[ 엔트로피 ]모든 물질과 에너지는 오직 한 방향으로만 바뀌며, 질서화한 것에서 무질서한 것으로 변화한다는 열역학 제이 법칙. 이는 곧 우주 전체의 에너지양은 일정한 반면 시간이 지날수록 사용 가능한 에너지양은 점차 줄어드는 지구의 물리적 한계를 의미한다. 출처 : 네이버 사전



우주의 모든 현상은 질서에서 무질서로 변화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란다. 유시민 님 왈, 물리학에서 말하는 엔트로피 법칙은 우주의 묵시록으로, 결국 모든 것은 사라진다 했다. 엔트로피 법칙의 핵심은 영원성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며, 이 우주에는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고, 오래간다고 의미가 있다는 것도 아니라고. 그저 삶은 내가 부여하는 만큼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서 각자가 만들어야 한다고. 출처:유시민 님의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남편의 말에 뒤통수를 후려 맞은 느낌이었다. "그렇구나....그렇네....그렇다!!!"

'유레카~~~~~~~' 나는 그제서야 나의 오랜 죄책감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한 줄기의 빛- 희망을 만난 느낌이었고, 망가진 그림이 추억을 입는 순간이었다.

물론 그림이 망가지지 않았다면, 나는 그 자리의 마티스 둥근 화분을 보며, '참 예쁘구나.', '어쩜 저리 분위기 있지?' 라며 오래도록 행복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나는 때때로 나의 망손 역사를 원망하고 자책하며 불행했을 것.



"별님아, 엄마 마음이 조금 속상하긴 했어. 그런데 이제 안 그럴 수 있을 거 같아. 아빠 말처럼 어차피 오늘이 아니어도 낡거나 망가질 그림이었고, 이 일로 이제 다른 의미가 생겨버렸거든. ^^ 그림의 얼룩으로, 이사 온 첫날, 새 그림에 별님이가 고무 도마뱀을 철썩 붙여서 몹시 좌절한 오늘을 웃으면서 추억할 수 있을 것 같아. 괜찮아~ 근데 다음부터는 꼭 엄마 말도 경청해서 들어주고, 너도 조심하기다~."


별님이가 나를 와락 안으며 말했다.

"엄마 미안해요.. 엄마 사랑해요.." 우애애앵

불행에서 해방되어 그제야 마음을 놓고 울어버리는 귀여운 아들의 울음소리.



모든 삶은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니까-무질서해지고, 낡아지고, 망가지는 것들은 당연한 것이다.

너무 연연해 말고,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말고, 나름의 의미들을 만들며 소중한 오늘을 살아야지, 생각했던,

마티스의 그림에 추억을 입혔던, 그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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