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난중일기 02화

아버지는 삼겹살이 싫다고 하셨어......

싫다고 하셨어.

by 세일러 문

바쁘다. 방학이 될 때까지 미뤄둔 일처리들로도 충분하지만, 삼식이는 안 된다는 트렌드에 맞서 하루 다섯 끼의 장금이를 자처하고 있다. 그간 엄마를 따라 일찍이 나서느라 아침잠이 부족했던 두 녀석들 방학만이라도 조금 더 재우려, 일찍 출근하는 남편을 위한 7시 15분의 아침, 뒤이어 일어나는 아이들을 위해 9시의 아침을 차린다. 점심은 하루 한 끼는 무조건 볶음밥으로 타협해 볶아 볶아, 그나마 아이들이 학원에서 일찍이 파하고 귀가하는 날에는 온 가족이 함께 저녁을 먹지만, 아이들 학원이 늦게 끝나는 화, 수, 목요일은 7시에 퇴근한 남편의 저녁상과 8시 귀가한 아이들을 위한 두 번째 저녁상을 차리고 있다.


*삼식이 : 오로지 집밥만 고집하여 외식을 안 하고 삼시세끼 끼 집밥을 먹는 사람을 일컫는 신조어


방학 돌밥에 돌아버릴 지경. 영원한 방학을 맞이한 나는 사직서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 개학을 손꼽아 기다리는 희대의 배신자가 되어 있다.


애미는 학기 중에 성실히 해먹이지 못한 미안함과 건강에 대한 의무감으로 집밥을 해 먹이고 있다. 그런데 남편과 아이들은 외식을 나름 좋아하니 전생에 나라를 구했는지 어찌 되었든 현생의 복이다. 엄마아빠의 짧은 외출엔 요즘 잘 따라나서질 않는 사춘기 남매 덕에, 피자를 주문하여 가져오는 일요일의 잠깐이 남편과의 오붓한 데이트 시간이 되었다. 중년 부부들의 데이트는 대충 이렇지 않을까. 와, 나는 오빠가 바깥 음식을 또 좋아해서, 그렇게 좋더라~ 그치? 삼식이들도 많다던데. 그러니까 우리 아부지가 삼식이 대표시잖어. 엄마가 고생이 많으셔. 아이구, 내일 일처리 할 거 많다고 했나? 내일 저녁은 애들도 일찍 오니까 밖에서 삼겹살 사 먹을까? 완전 콜~ 남편이 피자로 이미 점수를 적립하고는 연이어 삼겹살 콤보 적립으로 간만에 애정의 수치가 급 깊어진 아름다운 밤이었다.




갑작스레 잡힌 햇님이의 수영보강이 남편의 퇴근시간과 맞물릴 것 같아 근처의 삼겹살 집을 점찍어두고 한가한 저녁 시간을 맞는다. 갓 구운 따뜻한 고기를 좋아하는 햇님이와 별님이를 맛있게 먹이려는 시간 계산 끝에. 일찍이 도착한 남편과 삼겹살 집으로 향하기 전 슬쩍 수영장에 들른다. 모처럼 엄마아빠가 자신이 수영하는 걸 보러 와주어 신난 아이들을 보니, 멀리서 바라보는 훌쩍 커버린 모습이 낯설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다. 끝나면 샤워하고 육즙이 가득한 고깃집으로 오라고 싸인을 보내고, 올라가 1층에 있는 가게로 들어선다. 음~ 언제 맡아도 향긋한 고기냄새.

늘 주문하던 대로, 삼겹세트와 세트에 있는 주류를 공깃밥 두 개로 변경, 육회 비빔밥 두 그릇과 차돌된장찌개까지 주문완료. 아들 별님이는 작년부터 육회비빔밥 하나를 뚝딱 해치우는 먹성을 보여주며 외식 메뉴 선정에 있어 나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고 있다.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다른 류의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참 감사한 일일 것. 식성과 취향이 데칼코마니 수준으로 닮아가니 맛있는 떡볶이도 먹어주고, 육회 비빔밥도 한 그릇 뚝딱하고, 볶은 김치도 좋아하고, 가끔 스트레스 쌓일 땐 매운 음식도 함께 할 수 있는 지금, 인생은 역시 더 살아봐도 재밌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제 간장 게장을 함께 즐길 일만 남은 것인가. 그것마저 굉장히 기대되는 요즘.



초벌을 맛나게 해 주시어 손수 잘라주시는 구이 전문 알바생들의 손길은 귀하디 귀하다. 딱 알맞게 겉바속촉으로 고기가 구워질 찰나, 아이들이 등장한다. 나이스 타이밍. 수영을 해서 배가 고팠다는 아이들이 고기를 하나 입에 넣자, 진실의 미간이 그 맛을 증명. 우아 천상의 맛! 극락이로다! 엄마, 너~~~~~무 행복해요. 찬사가 끊이질 않는다. 명이나물에 싸 먹고, 파절이와 먹고, 쌈도 싸 먹고, 육회비빔밥도 먹어주니 기분이가 좋아진다. 고기를 잘 굽는 모습에 반했던 남편은 여전히 고기를 잘 구우니 알바생들만큼 귀하디 귀한 솜씨로 부지런히 구어 밥그릇에 한 점씩 고기를 올려 준다. 하하호호 웃으면서 넙죽넙죽 고기를 받아먹다 보니, 불판에 덩그마니 남아있는 한 점. 셋이 눈치를 보다 이제 된장찌개에 밥을 먹겠다 하니, 남편 왈


엇, 그럼 별님이가 먹어.
요즘 성장기잖아.
아빠는 오늘 삼겹살 한 점 밖에 안 먹었는데
별로 먹고 싶지 않아.


띠로리. 부지런히들 움직이는 젓가락 속에 남편도 자기 몫을 챙겼을 줄 알았는데 한 점 밖에 안 먹었다니. 삼겹살 앞에서 의리를 저버린 남편이고 나발이고 넙죽넙죽 잘만 받아먹는 돼지였구나 싶다. 미안함과 민망함 플러스, 이토록 가족을 사랑하는 가장의 어진 마음에 감동의 물결이 안구에 차오른다. 세상 자기밖에 모르던 사람이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여 이리 어진 가장으로 탈바꿈한 것이 참으로 고맙다.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남편의 성장 드라마.


아버지는 삼겹살이 싫다고 하셨어.
아버지는 삼겹살이 싫다고 하셨어.


죽이 잘 맞는 남매는 들끓는 부정에 보답이라도 하듯 떼창을 하는데...


오늘은 차돌된장찌개를 깜빡하시고 그냥 된장찌개로 가져다주셨나 봐~


성장기인 별님이는 제 육회비빔밥을 다 먹고서도 배가 차질 않았다 하여 공깃밥을 추가하여 된장에 만다. 하얀 밥에 서걱서걱 된찌를 비비는데 차돌이가 보이질 않아 얘기하자 허허허허허 웃기만 하는 남편. 고소한 맛이 나는 이 된장찌개에는 분명 고기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 오늘 그저 아버지는 돼지고기보다 소고기가 땡겼던 날이었던 것을. 추운 날씨에 아버님은 돼지고기구이보다는 뜨끈한 차돌 된장찌개에 매료되어 후루룩 짭짭 혼자 차돌된장의 부드럽고 고소한 고기를 골라 한 점의 양보도 없이 올클리어 하셨겠다? 와, 역시 아빠 대단~하세요. 사람이 갑자기 너무 많이 변하면 그날이 가까워온 것이라고, 뭉클했던 마음이 안도 한 스푼 섞인 웃음으로 저녁 식사가 마무리되었다. 아버지는 삼겹살이 싫다고 하셨다. 단지 차돌박이가 더 좋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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