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이 망한 나라에 미래는 없다.

교육과 보육의 경계에서, 학교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by 세일러 문

보육이 시대의 트렌드인가? 나라는 아이들이 돌아갈 부모님들의 품을 내어줄 방안을 마련하지 않고, 자꾸만 학교에 아이들을 밀어 넣는다. 비교적 안전하다고 신뢰하는 학교라는 공간에서 돌봄에 이어 '늘 돌본다는' 늘봄이 오고 있다. 교육과 보육, 그 경계에서 학교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요즘 학부모들은 학교에서 교육보다도 돌봄, 즉 보육을 기대하는가 보다 싶어 씁쓸한 마음이 들 때가 많았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수요자들의 니즈를 반영해야 함을 알기에 노력은 했다만, 점점 더 기괴하게 변해가는 학교와 교실에 머무르기가 괴로웠다. 아마 교육과 보육, 그 경계 어딘가에서 지독히도 외로웠던 이유.




여덟 살 자신의 아이 기분이 상하는 게 두려워 직접 묻지를 못하고 아이의 받아쓰기 점수를 물으려 전화를 한다. 아이가 등교할 때마다 짖는 옆 집 마당의 개를 안 짖게 단속해 달라는 요구를 담임에게 하는 경우가 드물지만 있다. 아이의 상처에 연고를 자주 발라줘야 하는데 선생님 손이 더러울 수 있으니 꼭 면봉으로 연고를 발라 주라는 어머님도 있고, 아이가 모기 물린 데를 간지러워하니 시간마다 발라주라는 부탁을 받을 때도 있다. 폭력 사건의 가해자 어머니는 자신의 아이가 그 아이를 오죽했으면 때렸겠냐며 그런 자기 아이의 마음은 읽어주셨냐고 그 어떤 사과와 자기반성보다도 먼저, 되려 묻기도 한다. 등교 전 병원진료받고 등교 시 병지각처리 됨에 불만을 표출하고, 아이의 텀블러를 잃어버렸다고 학교 cctv 열람을 요구하고 있는 곳, 이곳이 바로 대한민국 초등학교의 현주소이다.

아이의 화장실 다녀온 횟수까지 보고받길 원하고, 아이의 문제점을 살피기보단 담임교체를 요구하며 그것이 반영되었을 땐 자신의 영웅담 삼는 학부모와 아이들. 제 발에 더러운 것이 묻는 게 싫어 넘치려는 쓰레기통을 나서서 밟지 않는 아이들. 주변에 떨어져 있는 쓰레기가 자기 것이 아니라며 다른 자리로 밀어내는 아이들이 태반이다. 무언가 잘못되어도 이렇게까지 잘못될 수는 없을 일 아닌가. 원칙과 선이 무너진 학교는 온갖 사람들의 감정을 쏟아 버리는 쓰레기통보다도 못한 곳이 되어 있다. '의무교육기관'이 아닌 '의무보육기관'으로 학교를 타락시키려는 사람들, 의무 보육을 원하고 딱 그만큼의 생각으로 사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고 있기에, 앞으로의 나라가 어떻게 흘러갈지 그 미래를 다 알기가 두렵다.




교육은 온전한 교육으로 남았어야 했다. '교육 서비스' 라며, 교육을 교육이 아닌 서비스 정도로 치부했던 사람들이 학교와 세상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은 아닐까. 인격을 가르치며 사람으로 길렀어야 하는 학교가 달콤한 말들로 교육서비스를 제공했기에, 무고한 시민들의 목숨을 앗아간 조원종이 길러진 것이고, 살인을 해보고 싶어 토막살인을 한 정유정이 길러진 것은 아닐지. 남은 생동안 나와 나의 사랑하는 이들이 이런 불행에서 완전히 무관할 수 있을지 두렵고 막막한 마음이다.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는 학교에서 제대로 교육을 할 수 없게 만들었으니 어찌 보면 세상이 요지경이 된 것은 이미 어느 정도 예정되었을 일인지도 모를 일.


지난 두 계절동안 소중했을 학교를 떠나는 대신 세상을 떠난 꽃 같은 분들을 기억한다. 어떤 분노와 슬픔은 시간이 지나도 결코 무뎌지지 않음에, 마음은 여전히 추운 여름을 살고 있다. 교대 입결은 매해 낮아지고 있고, 수능날 강의실이 아닌 수험장으로 발길을 돌린 교대생들이 많았다고 하며, 참교사는 단명한다고 한다. 그리하여 교직탈출은 지능순, 혹은 재산순이라는 우스갯소리 마저 나오고 있는 이 시점에서, 지금이라도 학교는 반드시 정상화되어야 한다. 사랑하는 내 아이를 위해서, 그리고 사랑할 내 아이의 아이를 위해서라도 학교는 반드시 정상화되어야 한다. 보다 안전하고 정상적인 교실에서 선생님들은 가르치고 싶고, 아이들은 배우고 싶다. 가르치는 일은 고통이 아니라 희망이 되어야 함을, 교육만이 우리의 희망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아이를 중심으로 마음을 모으고 협력해야 할 교사와 학부모를 갈등구도로 몰아붙이는 것은 누구인지, 누가 사람들에게 공적 가치를 잊게 하고 모두를 파멸의 길로 인도하는지, 교사들을 사지로 내몰며 학교를 온전한 교육기관으로서 기능하지 못하게 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명명백백 밝히고 바로 잡히길 바라며...


아이들과 눈을 맞추고 아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도 모자랄 귀한 시간에, 교사들은 학부모의 불편한 마음을 들어주고 조율하느라 아이들에게 쏟아야 할 에너지를 다 소진하고 있다는 것. 아이들이 더이상 아이답지 않고 기적일만큼 이기적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 이로 인해 가르치는 일이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라는 확신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것. 그것들을 나와 같이 느끼고 있을 사랑하는 동료들의 오늘이 평안했길 바란다.



* '교육 서비스'라는 교육을 망치는 말 (naver.com) 2023.09.05 최진성 기자의 기사를 나누고 싶다.


교육은 권리가 아니라 의무... 교사는 학부모 요구 아닌 공적 가치 위해 일해야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말 가운데 교육을 망치는 말이 있다. 바로 '교육 서비스'다. 교육 서비스라는 말은 교사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이고 학부모는 서비스를 소비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학부모가 본인을 교육 소비자로 인식하면 학부모가 할 일은 평점을 남기거나 서비스 개선을 요구하는 것이 되고 심한 경우에는 블랙 컨슈머가 된다.

요즘 크게 문제가 되고 있는 서이초를 비롯한 일련의 사태도 학부모가 교사를 서비스 제공자, 본인을 서비스 소비자로 인식한 탓이 크다. 그런데 원하는 것을 요구만 하는 것이 과연 학부모의 역할일까?

우리 헌법은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분명하게 규정하고 있다. 헌법에 의하면 교육은 권리가 아니라 의무다. 이것은 학교가 학부모의 편익이 아니라 공공의 이익을 위해 존재함을 의미한다. 교육 기본법도 우리 교육 이념을 "민주국가의 발전과 인류공영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에 이바지" 하는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처럼 학교는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다. 그러므로 교사는 학부모의 요구가 아니라 공적 가치를 위해 일해야 하고 학부모도 자녀가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 잘 자랄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한다.

또 만약 교육이 서비스라면 자녀가 없는 사람이나 자녀가 교육을 마친 사람은 교육에 들어가는 세금을 내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자녀가 학교에 다니는지와 상관없이 사람들이 이 비용을 기꺼이 분담하는 것은 학교가 사회의 공적 가치와 규범을 대변하기 때문이고, 학생들이 우리 사회를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가치와 규범을 배우길 희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낸 세금으로 월급 받고 있으니 교사들에게 무엇이든 요구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뿐만 아니라 교육 공무원법 43조는 "교원은 그 전문적 지위나 신분에 영향을 미치는 부당한 간섭을 받지 아니한다"라며 교사의 신분을 보장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교원의 신분을 보장하는 것은 교사가 교육적 신념에 따라 공교육이 추구해야 할 보편적 이념을 추구할 수 있도록 보호하기 위해서다.

최근 문제가 되는 몇몇 학부모처럼 아동학대 법을 악용해 교사를 공격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약속한 교사의 전문성과 중립성을 중대하게 침해하는 행위다. 학부모는 '우리 아이 춥대요(덥대요)'가 아니라 아이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잘 자라게 지도해 달라고 요구해야 한다.

인류학자인 사피어(E.Sapir)와 언어학자인 워프(B.Whorf)는 인간의 사고가 언어라는 틀에 의해 유형화되기 때문에 언어가 사고를 규정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올바르게 사고하고 행동하기 위해서는 사용하는 말과 글의 적절성을 잘 살펴야 한다.

그런데 '교육 서비스'라는 말이 교육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가지게 만들어 학교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학교 교육은 공동체의 구성원을 기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교육이 나의 편리와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서비스고, 소비자로서 무엇이든 요구할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헌법과 관련 법에 나타난 공교육의 취지를 다시 되새기고 학교의 공공성을 회복하자.


사진출처 : pixabay

keyword
이전 09화불편한 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