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진실

그대, 모른 척 덮어둘 텐가.

by 세일러 문

지난 여름, 묻지 마 살인을 기억하고 있다.

신림역에서, 서현역에서, 대전에서.

살기 싫어서, 자신이 불행해서 다른 사람도 불행해지길 원했다는 그들의 진술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나의 교실에도 세월이 흘러 뉴스에서 소식을 듣게 될까 두려워지는 아이들이 있었다.

몇은 나의 고민이 무색해지리만큼 잘 성장해 있었고, 더러 몇은 조용히 잊혀져 갔다.




지그시 한 눈을 감아 나를 응시하던 뾰족한 눈빛, 그리고 작은 엄지와 검지 손가락을 펴 탕- 겨누어 총질을 하던 여덟 살 아이의 손짓은, 아마 덜컥- 마음이 내려앉는 기폭제로 아마 심장 언저리에 오래도록 머물러 있을 것 같은 슬픈 예감이 든다. 머리가 쭈뼛, 피부의 말초 신경들이 곤두서 작은 오름들을 만들어 내며 간담이 서늘해졌던 지난 여름, 나는 너무도 추웠다.


입학 초 모두의 아이를 소중히 생각해 주십사, - 아이들이 비교적 어린 시기에 많이 실수하고 배우며 성장할 수 있도록 너른 양해를 부탁드렸기에- 대다수의 학부모님들께서는 잘 이해하고 견뎌주셨다. 매일매일 외줄 타기를 하고 있는 듯한 불안정한 나의 하루에 비해, 양호한 횟수(일주일에 두세 통 정도)의 민원 전화를 받았고, 그럴 때마다 나는 아이들을 더 살피겠다, 노력하겠다 어김없이 약속드렸다.


우리 반 아이들 역시 고맙게도 잘 참아주고 버텨주었지만, 자꾸만 반복되는 갈등과 사건 속에 아이들도 점점 지쳐갔다. 조금은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아이들 덕에 착한 마음으로 그 아이를 품어주려 기꺼이 짝활동을 자원했던 아이는 기어이 싸움의 대상이 되곤 했다. 본인에게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들이 나올 때면 곁을 내준 고마운 친구에게 원망과 비난을 쏟아부었다. 짧은 순간들이었지만 나는 그 불편한 순간들을 목격해야만 했다. 매일매일 착한 아이들이 상처받고 눈물지으며 인생을 배워가던, 인간의 본성에 환멸을 느꼈던 그 순간들을 말이다.



매일매일 반복되었다. 친구를 놀리고, 친구를 밀어버리고, 친구를 때리고, 놀이에서 특정 친구를 배제시키고, 친구를 발로 가격하고, 학급 물품과 재료들 중 자기 마음에 드는 것들을 골라 갖고, 이야기와 설명마다 거꾸로 대답하며 부정을 하고, 또 놀리고, 이상한 소리들을 내고, 멋대로 돌아다니며 행동하고, 소리소리를 지르는 일상.


참고 기다리며 아이의 변화를 끌어내 보고자, 2-3주 정도에 한 번 아이의 학교 생활과 노력 중점에 대해 상의하려 어머님께 전화를 드렸던 것 같다. 어머님도 힘드실 테지... 죄송하다 말씀하시는 그 어머니에게 무슨 죄가 있을까 싶어 공감해 드리고, 잘 아이를 이끌어보자며 서로의 마음을 다잡았다. 꾸준히 가정과 소통했음에도 그 아이가 아이들을 발로 차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어쩔 수 없이 재발의 방지를 위해 더 자주 연락을 취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던 어느 날엔가, 아이가 또 친구들 가슴 높이만큼 발을 올려 차 전화를 드리자,

선생님,,,, 저희 아이에게 장점은 하나도 없는 건가요?

물으시는 어머님께, 더는 드릴 말씀이 없었다. 맞은 아이의 상태에 대한 걱정은 커녕 그저 자신의 아이에게 장점이 없냐는 어머님의 물음이 아이의 생활과 너무도 닮아 있었기에.


그리고 가을, 서이초 연필사건이 우리반에서 재연되었다. 면직의 시기를 고민했고, 이 아이와 가정의 대응에 대해 관리자분들과 어느 정도 얘기를 마쳤을 즈음이었다. 피해 학부모님께 먼저 전화를 드렸더니, 상처가 나지 않았으니 그냥 좀 두고 보겠다- 가해 아이 가정에서 사과를 받고 싶진 않으시다기에, 나 역시도 그 아이의 어머님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은 마음에 하이톡으로 사건의 내용을 전달드렸던 것이, 몹시 유감이라 하셨단다... 선생님이 전화를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하이톡으로 이야기를 전달하여 피해아이 부모와의 중간에서 자신의 입장이 곤란하게 되었다고. 아이가 왜 자꾸 그런 행동을 하는지 모르겠고 본인도 너무 힘들다는 말을 피해 학부모님께 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반응인지라 놀라지는 않았지만 씁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찌할 길이 없었다.



가끔은 비난의 화살이 나에게로 쏟아져, 나의 문제인가, 이 아이가 다른 담임을 만났더라면 더 행복하거나 괜찮아질 수 있진 않았을까 의심이 들기도 했다. (그러기엔, 고통받는 우리 반 아이들도 - 나의 모습도 너무도 확연히 잘 보였던 것도 문제.) 점점 마르며 생기를 잃어갈 무렵, 존경하는 동료 선생님들께서 너무 애쓰지 말라고, 우선 스스로를 돌보며 이 아이는 잘 포장해서 다음 학년으로 올려 보내라 조언을 주시기도 하셨다. 아이들의 불편한 진실은 포장되어도 괜찮은 것일까.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자랑도 교만도 아니하며, 사랑은 모든 것 감싸주고, 바라고 믿고 참아내며, 사랑은 영원토록 변함없네


'교육'이라는 것도 이와 닮아서 오래 참고 온유하게 감싸주면 되는 줄 알았다. 지금에 와서야 나는 생각한다. 과연 참는 것이, 온유하게 감싸 안아주며, 믿어주는 것이 능사일까. 이것이 최선이었을까. 자꾸만 되묻게 된다.


자신의 작은 불편에 파르르 하면서도,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관대한 아이들.(고통과 아픔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라 느끼는 아이들의 그것에 대해 함부로 말하고 싶진 않지만.) 누군가의 발을 밟아 놓고도, 왜 발을 거기에 두었고, 너는 왜 그렇게 예민하냐며 탓하는 아이들을 보며 생각했다. 분명 인류의 종말은 머지않았다고, 지금의 교실은 인간성을 상실한 세기말의 예고편을 보고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우리의 미래는 괜찮을 수 있을까. 이 아이들이 이끌어갈, 내가 살아갈 노년세계는 정말 괜찮을 수 있을까.





다시, 지난 여름.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던 묻지 마 폭행과 살인을 떠올린다.

그들은 어떤 아이들이었을까. 악마가 악마로 성장한 것인지, 보통의 아이가 악마로 길러진 것인지 궁금해진다. 그럼에도 불편한 진실은 분명 그들의 유년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으리.


기적 같은 세상 속에 이기적인 아이들이 되느냐, 이기적인 세상 속에 기적 같은 아이들이 되느냐는,

결국은 살아내야 할 아이들의 몫이겠지만, 아이들이 어릴수록 이는 어른들과 무관할 수 없지 않은가.


당신의 교실은 강녕하신지,

당신의 가정은 강녕하신지,

그러므로 당신의 마음은 강녕하신지 안부를 물으며


부디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는 자, 그대들의 오늘을 후회하지 않으며 아이가 성인이 되어서까지도 그 미래를 오래오래 오롯이 감당하시길 응원한다.


사진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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