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부끄럽지만 닥치는 대로 살았습니다. 어차피 꺼내 입을 옷 따위, 개켜서 서랍에 두는 수고를 줄이겠다며 건조기에서 꺼내온 빨래들을 안방 부부침대에 펼쳐 놓고 살았거든요. 의류 진열대와 정리공간의 역할로서 침대는 다른 쓸모로 존재했었고, 덕분에 저와 남편은 거실에서 보다 청량한 공기를 마시며 숙면을 이루는 달밤을 보냈습니다. (tmi로 3년 전 이 집에 이사 와서 남편은 안방에서 자고 나면 개운치가 않다며 거실이나 애들 방에서 잠을 자곤 했습니다. 독수공방하며 잠이 드는 혼자만의 시간이 나름 좋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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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 배 골리는 일은 없게 하려, 부지런히 냉장고를 채워 살았습니다. 끼니는 거르지 않는다는 우리 가족의 불문율을 지키려 아무리 바쁘고 지친 삶에도 아침과 저녁을 거르지 않고 잘 먹이고 살았답니다. 그런데 문제는 끼니를 거를 걱정과 채우는 부지런함이 지나쳐, 냉장고에 다양한 재료들이 적체되는 수준에 이르렀던 거죠.
보기 싫은 것은 안 보면 그만이라고 안방문을 닫고 살았지만, 의생활을 피할 수 없어 들르는 안방에서 마음은 침대 위에 놓인 세탁된 빨래덩이들만큼 무거웠습니다. 그리고 냉장고를 열 때마다 가득한 식재료와 음식들을 보며 풍족함보다 답답한 체증에 가까운 마음이 들어 얼른 흐린 눈을 하곤 했지요. 괴로운 나날이었습니다.
나의 모친, 우리 이여사님은 알뜰살뜰 살림을 꾸리는 스킬이 남달랐습니다. 칼각을 이루며 정리된 서랍과 옷장은 기본, 살림살이들은 있어야 할 곳에 항시 존재했으며, 설거지를 몇 번 더 하는 수고를 마다 않고 예쁜 그릇에 정갈하게 음식을 차려 주셨습니다. 이런 유년 시절의 기억은 항상 제 마음에 따스함과 더불어 그렇게 살고 있지 못한 현생에 대한 죄책감으로 이어졌는데요, 정리되지 않은 제 삶에 뇌리를 떠나지 않는 정지훈비님의 목소리가 있었으니.... 태양을 피하는 방법의 '제대로 살고 싶어. 제대로 살고 싶어.'
정말 그(He)만큼이나 간절히 제대로 살고 싶었습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시작했습니다. ( 브런치 살림 고수 작가님들의 글이 정말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 언제고 유행은 돌아온다며 옷장 속에 잠재워 두었던, 미혼시절의 옷들을 대거 비웠습니다. 입지 않을 옷, 추억팔이용으로만 존재하기엔 제 마음이 너무 무거웠으므로 이제는 보내줘야 할 때가 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아이들의 작아진 옷들도 친구의 아이들을 위해 정리했구요, 짧아지고 닳은 청바지 몇은 반바지로 변신시켜 내년 여름을 위해 옷장 한 켠에 넣어두었습니다. 옷을 개켜 넣어두는 수고를 결심할 여유도 생겨 침대 위 빨래더미 정리를 하고 나니, 안방의 침대는 이제 쓸모를 잃은 것도 같습니다.
어느 곳보다 청결하고 신선해야 할 냉장고를 열어 재료와 쓰임에 맞게 정리합니다. 해마다 부친께서 손수 만들어 보내주신 도토리 가루 세 통이 고대로 보존되어 있고, 언젠가 양념으로 써볼까 야심차게 얼려둔 21년의 간장게장도 세월의 흐름이 무색하리만치 그대로, 거기 그대로 있더군요. 아마도 제 시간과 마음이 멈춰버렸던 것도 그즈음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우리 아이들을 키운 팔 할의 김, 김가루와 치킨 너겟은 왜 자꾸 사들였는지 불안한 마음들을 비우지 못하고 꼭 붙들고 있었나 봅니다.
정리를 하는 동안 제 삶을 돌아보았고 반성도 많이 했습니다. 어지럽게 쌓여 있는 것들처럼 제 마음도 딱 그러했다는 생각이 들었구요. 버리지 못하고 이것저것 끌어안고 사느라 지쳐버렸는데 냉장고에서도 집안 곳곳에서도 방만한 삶이 온전히 드러나 씁쓸했습니다. 정리를 마치고 나니 공간들이 생기며 숨 쉴 구멍이 생겨난 것 같습니다. 새 바람이 불어오는 듯도 싶습니다.
"와, 집이 점점 깨끗해지네~."
귀가한 아이들과 남편이 좋아라 합니다. 무심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알면서도 참고 기다려준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비워낸 공간만큼 마음의 여유와, 삶에 대한 애착을 채워 보았습니다. 오래 기다려준 가족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과 소중한 내 사람들에게 더 다정해야겠다는 다짐도 더해졌구요. 오래된 숙원 사업을 마치니 마음도 한결 가볍습니다. 이제 이 상태와 이 마음을 잘 유지하며, 비우고 채우는 정돈된 삶을 살아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