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는 많은 자기들이 있다. 40, 50대의 여자 선생님들은 가끔 동료교사들을 '자기~'라고 부른다. 나는 다정하고 따뜻하여 때로는 엄마 같고, 때로는 언니 같기도 한 선배 선생님들의 '자기'라는 호칭이 좋았다.
참고로 담백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남편과 나는 결혼 후에 서로에 대한 호칭을 바꿔보려 했으나 오글거려 손과 발이 없어질 것 같다며 포기한 전력이 있었더랬다. 여보와 당신. 자기. 끝끝내 이루지 못한 그것.
여보의 의미 ; 如(같을 여)寶(보배 보) 보배와 같다 당신의 의미 ; 當(마땅할 당) 身(몸 신) 내 몸과 같다 ( =자기 )
이토록 아름다운 의미를 가진 호칭에 대한 로망과 아쉬움이 사실 오래도록 있었으나 남편에겐 내색하지 못했다. 부르지도 못할 것을 탐하지도 말 것이지, 가진 적이 없어 더 갖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모순적인 마음으로 여보~ 혹은 당신~, 자기야~ 부르는 사람들을 보면 내심 부러움이 있었을 것.
그런 나에게 자기야~ 불러주는 다정한 내 자기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동학년을 맡고 있는 선생님들이시다. 여자 일곱이서 어려운 시절을 함께 하며, 함께 웃고- 함께 울고- 함께 분노하는 가운데, 그렇게나는 원 없이 자기 소리를 듣는 소.원.성.취.의 감사한 한 해를 보냈다.
방전 직전 위기의 막내가 급속 당충전을 위해 믹스커피를 탈 때면 누구보다 걱정스레 자기야~ 한 잔만 마셔~.
공교육 정상화의 날을 앞두고, 자기야~ 이렇게는 안 되겠어. 그래, 우리 뭐라도 하자.
학급의 일이나 처리해야 할 일들로 얼굴에 지친 기색이 비치면 자기야~ 무슨 일 있어?
서로의 처지와 고충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하며 같이 견딜 수 있었다.
마지막 학년 회식인 줄 알았던 자리가 실은 나의 송별회였으니, 맛있는 저녁 식사와 함께 가족용 머그잔을 선물 받았다. 자기~ 내가 써보니 그립감도 그렇고, 입술에 닿는 촉감도 그렇고 커피도 마시는 동안 따뜻하게 유지되고 정말 좋더라구. 너무 받은 것이 많은데, 또 이리 주시다뇨. 막내는 울어요 쿠라이쿠라이. 떠나는 발걸음이 이미 자기들에게 기운 마음으로 가볍지만은 않다. 힘든 한 해를 버틸 수 있게 해준 근원이었던 이 마음이 발목을 잡는다. 이제 자기를 남발할 나이도 되었건만, 한 번도 자기야~ 해보지 못하고 떠남이, 앞으로도 그럴 수 없음이, 못내 아쉽기도 한가 보다.
어쨌든 연구실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밤이 깊어가는 줄, 마음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게 하하 호호 얘기 나눈 저녁시간이 참 좋았다. 그리고 전해주신 선물은 가뜩이나 컵덕후인 내게 취저의 선물이었는데... 어머나 세상에... 이럴 수가. 한 손에 들기에 적당한 무게, 입술에 닿는 부드러운 촉감, 마지막 모금을 마실 때까지 온기를 품어주는 완벽한 잔이라니. 이 완벽한 잔에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이질감 없이 촥 포개어지면서 미끄러지듯 믹스가 흘러 들어온다. 입 안 가득 퍼지는 커피와 따스한 온기.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 뱃속까지 이어지는 믹스의 향연에 방전된 에너지가 충전된다.
막내가 믹스중독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으셨겠지만, 아침부터 믹스를 뜯었다. 파이팅 넘치는 하루를 보낼 비장한 각오로, 내 자기들의 달달한 사랑과 믹스커피로 당충전 중.
자기들~~ 3잔까지는 안 가도록 참아볼게요... 그치만 이 잔으로 먹으니 더맛있는 걸 어떡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