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 귀신 둘이 산다.
귤 귀신이 귤 귀신을 낳았다.
겨울이 기다려지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아직까지 눈 내리는 날이 신나는 마흔이라 그렇고 찬 기운을 품고 오는 해질녘의 분홍하늘과 차갑도록 시린 깜깜한 밤, 그럴수록 밤하늘의 별과 달은 영롱하게 빛나 날 추워지는 것이 기다려지곤 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겨울을 기다려지게 하는 것들 중 하나로 귤, 귤이 있었다.
노랗고 말캉하여 새콤 달콤한 귤. 껍질을 후루룩 까 입에 넣어 오물오물 씹으면 시원하고 달콤한 과즙이 터져 나온다. 한 입에 귤 하나를 통째로 넣어 와구와구 씹어먹을 땐 귤즙이 시원하게 터져 나와 순식간에 기분이 좋아지고, 한 알씩 한 알씩 떼내어 먹으면 아는 맛을 아껴 먹는 소박한 즐거움에 기분이 서서히 좋아진다. 그렇기에 마음껏 귤을 먹을 수 있는 겨울은 항상 기다려지는 계절이었고, 긴 겨울날동안 귤은 소중한 반려과일로 항시 내 곁을 지켰더랬다.
하물며 돌잡이 사진에도 나는 귤을 들고 있었는데 울었는지 눈가는 촉촉했고 콧물도 좀 반짝였던 것 같다. 때 이른 봄이라 양볼은 터 불그스레하고 가르마를 타 귀 옆으로 가지런히 넘긴 머리에 갖춰 입은 한복이 불편해서 울었었나 혼자만 상에 덩그마니 남겨져 낯설어 울었었나 하여간 운 기색이 역력했다. 울음을 멈추게 할 요량으로 쥐어줬을 귤을 양손에 쥐고 이미 귤을 한가득 입에 넣어 그제서야 카메라를 보고 웃었겠지.
겨울이 되면 귤이 떨어지는 날이 없도록 박스로 공수해 주시는 엄마 아빠의 부지런한 사랑 덕에 손발이 노래지고 노란 큐티클이 자라도록 겨울마다 부지런히 귤을 먹으며 무럭무럭 자랐다. 그러나 문제는 남편을 만나 결혼까지 했는데, 그가 귤을 좋아하지 않았고 맛있는 귤을 골라 입에 넣어주면 모를까 부러 까먹지 않는 사람이었던 것. 신혼 때 장을 보면 그는 누가 먹는다고 귤을 박스로 사냐 묻곤 했다. 다 먹어 또 장을 보면서 카트에 귤박스를 담을 때면 언제 혼자 다 먹은 거냐 놀려대는데, 오랜 연애 후의 결혼이래도 이런 면들까지는 서로 속속들이 알 일이 없었으므로 무려 부부의 연을 맺고 한 집에 살기 시작했으면서도 계면쩍어지곤 했다. 다행히 장을 볼 때나 그렇지 장을 봐온 귤들이 오로지 내 차지가 되었던 이유로, 의외로 내 귤사랑은 서른 즈음부터 완전 노가 나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 같다. 첫째 햇님이도 그다지 과일을 좋아하는 아이는 아니었어서 겨우내 나 혼자 신나게 귤을 먹어댔고.
둘째 별님이가 태어나 스스로 귤을 까먹을 줄 아는 나이가 되면서부터는 달랐다. 찬 바람 불어올 즈음부터 시작되는 이 귤을 먹고사는 즐거움이 조금 다른 양상을 띠게 되었으니 경쟁 구도가 추가되었달까. 일단 아들은 많은 귤 중에서 어떤 귤이 맛있는 귤인지를 단번에 고른다. 태생에 그런 능력을 갖고 태어난 것은 아닐 텐데 십일 년 인생 성실히 귤을 골라 먹은 경험치가 점점 더 그의 능력을 탁월하게 만들고 있다. 쏙쏙 맛있는 귤을 골라 먹는 아들 녀석 덕에 부지런히 나도 귤을 골라 먹는다. 사십 년의 경험치로도 종종 실패하는 나는 "엄마 귤 하나만 골라줘." 가끔 그의 능력을 빌어 맛있는 귤을 먹고 싶은 사심을 채우고 있다. 먹는 것과 관련한 자제력은 왜 나이 먹을수록 약해지는지 이맛 저 맛 상상하며 귤을 골라먹다 수북하게 쌓여 있는 귤껍질무덤을 마주하곤 뒤늦게 칼로리와 당을 걱정하면서 말이다.
그러고 보니 어느 정도 예상된 일이었던가도 싶다. 귤귀신이 낳았으니 귤귀신이 태어날 수밖에. 유전의 신비와 힘은 실로 놀랍지 않은가, 귤에 대한 기호도 어쩔 수가 없나 싶다. 귀신 같이 맛있는 귤을 골라 먹는 아들 녀석 덕에, 때 아닌 귤전쟁. 이제는 혈당도 그렇고 칼로리도 생각해야 하는 나이인데 아들의 등교로 경쟁자 없다고 마음이 한껏 여유로워져 한 개만 먹는다는 것이 한 자리에서 또 세 개나 까먹는다. 한 개는 정 없고, 두 개는 아쉽다며 기본 세 개에서 시작하는 이 귤까먹기 레이스가 벌써 시작되었다.
사진출처 :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