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가 빨간 과일 다섯 개를 대보라 한다.
괜찮아, 건망증이야. 바빠서 그래.
삐삐삐삐삐삐삐, 삐비빅!
삐삐삐삐삐삐삐, 삐비빅!!
"딸, 우리 집 비번이 뭐였더라?"
딸아이를 데리고 귀가하다 현관문 앞에서 브레이크가 걸렸다. 집 비번을 누르다 연거푸 실패하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가족에게 의미 있는 숫자들의 조합으로 만들었던 비번이었고, 손에 익어 습관처럼 무의식의 영역에서 눌러댔던 비밀번호였다.
"엄마!!! 장난치지 마세요. 진짜 기억이 안 나요?!"
"누... 누구세요?"
아이의 반응에 장난이 치고 싶어진 나는 "누... 누구세요?" 초점을 잃은 눈동자로 건조하게 묻자 아이는 이내 눈물을 글썽이며 막 울어버릴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나 정말 심각하단 말이에요.ㅠ 장난치지 마세요. 엄마ㅠ 진짜 치매 검사 좀 받아봐야 되는 거 아니에요?"
삐삐삐삐삐삐삐. 도미솔~! 철컥
"장난이야, 장난."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던 숫자의 조합을 하나하나 차근차근 떠올리며 다시 도전한 끝에 무사귀가에 성공, 그러나 순간 정말 뇌정지가 온 것은 사실이었다. 집 비번이 뭐였는지 천만 경우의 수에, 요즘 과부하로 종종 찾아오는 깜빡의 타이밍에, 정말 내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닐지 나도 내가 걱정이 됐다. 현관을 지나 2층 계단을 오르며 딸아이는 물었다.
"엄마, 빨간 과일 다섯 개만 얘기해 보세요."
"사과, 딸기, 체리, 자두..... 음 속이 빨간 수박도 괜찮지?"
"제가 씻고 나와서 다시 질문할 거예요. 지금 얘기하는 네 단어를 순서대로 잘 기억했다가 얘기해줘야 해요. 귤 자동차 오토바이 고양이."
네 단어를 덩그마니 내려놓고는 화장실로 사라지는 딸. 자꾸 이것저것 깜빡하는 통에 내 머릿속에 지우개가 있는 것은 아닐지 염려스러운 나는, 딸아이를 또 걱정하게 만든 것이 미안해 짧은 서사로 네 단어를 기억했다.
'귤을 까먹고 있는데 자동차와 오토바이를 봤어. 그런 내 곁엔 항상 고양이가 있지.'
훗, 익숙한 서사에 혼자 조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엄마~."
"응, 귤 자동차 오토바이 고양이!"
딸이 질문을 채 마치기도 전에 네 단어로 당당하게 선수를 치고는, 얼마나 진심으로 기억하려 노력했는지, 나는 정말로 괜찮은지 약간의 씁쓸함이 마음 한 구석에 번졌다.
입주를 앞두고 바쁜 나날이다. 결정할 것도, 고민할 것도 넘치고 넘쳐 백조의 삶을 살고 있다. 우아한 백조가 물속에서 열나게 발놀림을 하고 있듯, 고요한 일상 가운데 머릿속은 열나게 바쁘다.
수 주 전에는 생애 첫 입주박람회를 가서 많은 정보를 들으며 끝없이 주어진 결정사항들에 기함을 치고 나자빠지는 일이 있었다. 보다 안전하고 편리한 입주와 삶을 위해 전문적으로 연구해 온 업체들이 한 데 모여있었기에 입주예정자들이 보다 편리하고 효율적으로 입주 준비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런데 나는 업체들의 열과 성을 다한 설명에,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더 모르겠는 상태가 되는,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기이한 체험을 하는 경지에 이르렀더랬다. 정말 알아서, 몰라도 되는 것들을 알게 되어서 병이 생길 지경이었달까. 모르고도 잘 살아왔던 옛날이 그리워지기도 했고.
스마트한 세상일수록 인간의 불안감을 조장하여 지갑을 열게 하는 것들이 많다는 것을 또 한 번 깨달았다. 결국 이것들은 돈으로 어느 정도 해결이 가능한 것들이었는데, 버는 게 어렵지 쓰는 건 순간인 것 같아 자꾸만 이것저것 재고 따지게 되는 모태짠순이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사전점검업체 39만 원, 사후점검 8만 원, 어플등록 5만 원 추가, 입주청소 69만 원, 줄눈시공 51만 원(시공부위선택과 자재에 따라 플마 있음), 새집증후군, 나노코팅, 미세방충망 등등 뭐 이리 많고 비싸다냐... 그것들이 가져다 줄 편의와 안도보다도 부지런히 벌어온 나와 남편의 피, 땀, 눈물이 일단은 더 크게 느껴졌다. 웬만한 것은 셀프로 하고 전문가의 손길이 필요한 부분들을 추후에 결정하기로 보류를 결정하니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고는 몸이 피로할 일만 남았었나.
사전점검 관련한 유튜브 방송을 시청하며 관련 자료들을 찾아보며 지난주를 보냈었다. 그 덕에 주말의 사전점검은 셀프로 만족스럽게 마쳤다. 미처 발견하지 못한 부분은 살면서 고쳐가기로 마음먹었고. 난생처음 자기 방들을 갖게 되어 신난 남매의 얼굴을 기억하며 바쁠수록 보다 너그럽고 여유로운 마음을 잃지 않으려 마인드 컨트롤 중이다.
사전점검날과 겹쳤던 아빠 생신도 아름다운 가을이라 따뜻한 밥을 지어먹으며 아름답게 잘 보낼 수 있었고, 아이의 산출물 발표 준비로 라이딩에 열을 올리는 주중의 일상에도 이번 주말 어머님의 생신파티로 인한 상경 준비를 잊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월요일의 만남을 지키지 못해 내내 마음이 무거웠던 까닭으로 잠깐 브런치에 들렀고, 굳이 굳이 안부를 묻고 부러 기척을 두고 간다. 혼자 아점을 하며 작가님들의 일상도 들여다보고 글들도 읽어봐야지 생각을 하며,,, 오늘은 딸아이가 노란 과일을 물으려나, 바나나 레몬 망고 참외 또 뭐가 있었지... 생각하다 도저히 하나는 떠오르지 않아 네이버에 검색한다. 파인애플, 노란 용과, 배, 노란 수박, 골드 키위. 많지는 않구먼.
아직은 잊고 싶은 것보다 기억하고 싶은 것이 많은지라, 아직은 딸아이를 걱정시키지 않고픈 불혹의 청춘인지라 뇌운동만큼은 게을리하지 않으려 한다. 천천히 조금씩 잊어가는 것도 축복이라지만 아직은 잊지 않고 싶은 나라 그렇다. 내친김에 주황색 과일도 생각해 본다. 감, 귤, 오렌지,,,,어 또 뭐가 있었더라.... 나 정말 괜찮은 거 맞니...? 괜찮아 건망증일 거야. 바빠서 그래...
사진출처 :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