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아이들과 사십춘기(아직 갱년기는 아닐 거라 믿어본다.) 엄마는 빨간 날이 어째 더 위태위태하다. 9월 추석연휴부터 시작되어 10월 초까지 연달아 등장하고 있는 빨간 날, 호르몬 대환장 향연 속에 크고 작은 전쟁들이 발발하고 있다. 참전자가 누구냐의 차이로. 오늘 아침은 나와 아들 별님이다.
누나의 등교준비가 늦다며 재촉과 푸념을 늘어놓던 별님이 집을 나설 타이밍이 되자 깜빡했던 영단어장을 서둘러 찾는다. 어젯밤 분명 가방을 다 쌌다 했었고, 아침에도 먼저 준비를 마쳤다며 루루와 놀던 놈이다. 결국엔 찾지 못하고 차에 타면서도 뭘 잘했다고 지가 쌩~하자, 좋게 좋게 타이르던 나도 간신히 붙들고 있던 이성의 끈을 놓치고 말았다. 나의 딥빡(깊은 빡침)이 단 두 문장으로, 분노와 매서운 눈빛과 함께 아들을 관통했다.
최근 제 기분 상했다며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내는 아들을 보며 타일렀더랬다. 지난주 할아버지와 갑작스런 식사를 할 때에도, 아침 등굣길에 별님이가 인사를 잘 안 하는 것 같다는 애들 아빠의 말에도. 그저 호르몬 때문이라 귀인하며 좋게 좋게 이 시기를 잘 보내려 이해하고 나름 노력했다.
"자기감정 조절 못하고, 옆에 있는 사람들 배려하지 않는 사람 될래? 어디서 싸가지 없게. 여기서 너 기분 상했다고 등교인사까지 패스해 봐!"
"다녀오겠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
쿵, 바람이 차문을 닫고 그렇게 아들은 저 멀리로 사라졌다.
작년까지만 해도 아이들의 등굣길이 곧 나의 출근길이었다. 모두가 바쁜 아침 시간이었어도, 지금보다 성숙하지 못한 나이였어도, 서로를 이해하며 위하며 그 시간을 버텼다. 전보다 여유가 생기고, 나이 드는 만큼 익어가고 있다 믿는 지금, 이렇게 부끄럽게 이성의 끈을 놓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조용히 사진첩을 뒤적인다. 나에겐 아이들 어릴 적 사진첩이 끓는 속을 다스리는 나름의 사춘기자녀 퇴마서. 오늘은 별님이 네 살의 어느 가을날 여의도 공원으로 갔던 데이트 사진에 눈길이 간다.
애들 아빠 레지던트 4년 차 시절로 일주일에 하루를 볼 수 있으면 다행인 시절이었다. 오롯이 셋이서 가을을 보내던 시절, 또래의 딸을 키우는 친구네와 큰맘 먹고 티봉이를 타고 여의도 행차를 했다. 알록달록 예쁘게 핀 백일홍 밭에서 뛰어놀며 초가을의 정취를 즐겼던 날, 떨어진 느티나무 잎을 주워 귀여운 포즈를 취하며 해사하게 웃던 아들의 모습이 선하다. 그 가을날의 청량한 공기와 부비던 아이의 옷 촉감까지 더해진 선명한 기억.
그리움은 멀리서 와 쿵, 하고 떨어진다. 늘 옆에 있어 그 소중함을 망각하게 되는 것들, 오늘이 그렇고, 좋은 가을이 그렇고, 사춘기래도 인사는 하는 내 아들이 그렇다. 너무 당연해서 이 소중한 것들을 잘 보지 못하고 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가. 또다시 먼 훗날 그리워하게 될 것들을 쥐고 자꾸만 불평불만을 하게 되니 아직도 마음의 수련이 많이도 필요할 일이다.
그날의 기억이, 그리움이 가을과 함께 성큼 다가온다. 아들이 귀가하면 힘껏 안아주고, 이날의 이야기를 해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