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면서 왜 물을까요?

누가와 함께 걷는 기다림 (10)

by 교회사이

기다리며 읽는 누가복음서, 대림절 두 번째 주 화요일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서, 예수를 시험하여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 그런데 그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 예수께 말하였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 . .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누가복음서 10:25-37)


영원한 생명.JPG photo by noneunshinboo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율법에 뭐라고 쓰여 있느냐? ”

“이러이러하고 저러저러하다고 쓰여 있습니다.”


율법교사랍니다. 몰라서 물었을까요?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인데, 율법 전문가인데. 그럼 왜 물었을까요? 모르면 묻는 것이야 당연하지만, 누구보다 잘 알면서 왜 물을까요? 좀더 확실하게 알기 위해서, 확실하게 하고 싶어서 그럴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살다 보면 솔직히 알면서 묻는 경우가 훨씬 더 많지 않은가요? 사실 아는데, 사실 하기 싫고. 사실 그냥 하면 되는데, 사실 그걸 하는게 싫고. 하는 것도 싫지만 내가 잘 알고 있다는 그 사실도 싫고. 그렇다고 내가 모른다고 남들이 나를 낮춰보는 것은 더 싫고. 그래서 나는 안다, 누구보다 잘 안다, 가르칠 수도 있다, 가르치는 사람이다, 그건 또 알려주고 싶고. 그러나 여전히 하기는 싫고. 그래서 묻는 게 아닐까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미 유치원에서 다 배우지 않았나요? 주일학교에서 다 배우지 않았나요? 배운 대로, 아는 대로 하면 되는데, 그게 . . . 싫은 게 아닐까요?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율법교사는 예수께서 하신 이 말씀을 칭찬으로 들었나 봅니다. 또 묻습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이러이러한 사람이 이러이러했고, 그때 저러저러한 사람들이 저러저러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율법교사라서 그런지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복음의 시작 2.JPG photo by noneunshinboo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그런데, 이 율법교사는 거기서 질문을 멈추었을까요? 질문은 그만 하고, 실천(行)하러 갔을까요? 아니면 또 다른 질문을 했을까요?


대림절, 질문은 예수께서 오시면 하고, 우선은 몇 가지 내가 아는 것을 하면 어떨까요, 예수께서 오시기 전에.


“주님, 주님의 율례들이 제시하는 길을 내게 가르쳐 주십시오. 나를 깨우쳐 주십시오. 주님의 계명들이 가리키는 길을 걷게 하여 주십시오. 내 마음이 탐욕으로 치닫지 않게 해주십시오. 내 눈이 헛된 것을 보지 않게 해주시고, 주님의 길을 활기차게 걷게 해주십시오. 아멘.” (시편 119:33-37)


이전 09화나는 지금 누구를 기다릴까?